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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한계를 넘어자녀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요한1서 3:1~3)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1.12.29 16:11

너무 유명한 이야기여서 한번쯤 들어봤으리라 예상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 1914년 성탄절 전야 영국군과 독일군이 대치하고 있던 전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영국군 병사가 독일군 진영을 보니 성탄절 트리를 연상시키는 불빛이 반짝이는 것과 함께 음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습니다. 영국군은 이에 뒤질세라 “저 들밖에 한밤중에”를 불렀습니다. 독일군은 박수를 보내며 “오 탄넨바움(소나무여)”로 화답했습니다.

마침내 “참 반가운 성도여”를 합창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일은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벌어졌습니다. 양측의 병사들이 참호에서 나와 담배와 술을 나누고, 과자와 먹을거리를 나누는 선물교환식을 갖기도 했습니다. 양측이 축구경기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양측 병사들이 도열한 가운데 공동장례식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찬송이 뒤섞였습니다. 그렇게 만난 병사들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주소를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벌어진 일들입니다. 전시에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권력자들의 통제로 그 다음해 성탄절에는 더 참혹한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그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인간의 심연, 그 밑바탕이 어떤 것인지 일깨워주는 의미심장한 일화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그래서 꼭 승패를 갈라야 하며, 심지어로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철칙을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일화입니다. 경쟁의 논리는 권력자들의 철칙일 뿐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상대를 똑 같은 인간으로 대하는 태도가 더 보편적이라는 것을 극적으로 일깨워줍니다.

성탄축하 예배이자 동시에 송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오늘 우리는 인간의 그 밑바탕을 다시 일깨워주는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서신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곧 인간에 대한 인식을 뜻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사랑이신 하나님에 잇대어 있다면 인간 역시 그 사랑을 구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서신은 요한복음과 함께 사랑의 공동체 전통을 대변합니다. 그 저자가 동일인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요한서신이 요한복음과 그 밑바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 초기 교회들 가운데서 요한 공동체는 특별히 ‘사랑의 공동체’를 대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던 시절 사도들은 ‘사랑의 공동체’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교회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곧바로 재림이 이뤄질 것으로 믿었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모습으로 예수님의 재림은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며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그 때 신앙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여러 가지 대안들이 나왔습니다. 두드러진 대안이 교회의 제도화였습니다. 교회를 조직화하여 질서를 만들고 윤리 규범을 확립하였습니다. 그 전통을 대변하는 사도가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교회를 조직화한 것은 아니지만, 조직화한 교회가 베드로를 예수님 다음 가는 권위로 인정하였습니다.

그와 다른 대안도 있었습니다. 제도화가 아니라, 소규모의 친밀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대안입니다. 바로 요한으로 대표되는 ‘사랑의 공동체’ 전통입니다. 요한복음이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항상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강조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눈여겨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합니다. 예수님 오른편에 베드로가, 왼편에 섬세한 여성 모습의 요한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은 교회의 전통을 그렇게 형상화했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불가불 조직화의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위험한 함정이 있습니다. 사랑이 식어버린 교회,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되어 버린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조직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위험성을 경계하고 사랑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이루고자 한 것이 요한의 전통입니다.

본문말씀은, 11절부터 이어지는 구체적인 사랑의 가르침에 앞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버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진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을 뿐 아니라 몸소 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전적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권위적인 위계관계 안에서 명령을 내리고 복종을 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부모와 자식 같이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신비한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잘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당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모른다는 것은 그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대 사람들에게 신은 낯선 존재가 아닌데, 어째서 모를까요? 자신들이 믿는 신과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권위적인 세상 질서를 재가하고 그 꼭대기에서 명령을 내리는 신에게 조아릴 줄만 알았지 부모와 같이 자애롭게 다가오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동등하게 자매형제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 “British and German Soldiers Arm-in-Arm Exchanging Headgear: A Christmas Truce between Opposing Trenches” ⓒWikipedia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도는 거듭 강조해 말합니다. 그럼에도 과연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염려 때문일까요? 사도는 덧붙여 말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지녔던 종말론적 믿음의 기대입니다.

아직 미심쩍어 보일지 모르지만,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실을 알게 되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순결한 삶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가닿아 있는지 의식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바와 같이 사랑이신 하나님에 그 근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근원을 그렇게 인식할 때 인간은 그에 합당한 삶을 누리기 위해 부단히 애쓸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이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말씀을 다시 새기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4:7~8)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이 땅 위에서의 삶에 대한 긍정’을 역설하는 요한서신의 요체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은 바로 그 삶의 기쁨에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뜻합니다.

이제 한 해를 보내고 다음 주면 또 새해를 맞이합니다. 더불어 우리 교회는 22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굳이 큰 교회를 지향하지 않고 적정한 규모를 고집하는 이유를 다시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생명력을 잃고 정체된 교회로 자족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규모의 논리에 사로잡힐 때 사랑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정체되며, 거꾸로 세상의 짐이 된다는 엄연한 진실 때문입니다.

우월한 힘을 자랑하고자 하는 욕망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폐해를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신의 성취에 도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며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지향합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걸어왔습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지난해와 올해 연이어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모든 상황을 무마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직접 대면도 어렵고, 직접적인 성도의 교제 또한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그 누군가에게 관심 기울이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관심 가져달라 하기 이전에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였는지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위기에 더욱 빛나야 할 사랑의 유대를 이루기 위해 우리 스스로 얼마나 애썼는지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사회적으로 체감하고 있는 위기감이 높아가고 신뢰가 무너지고 있으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매년 <교수신문>은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의 전망을 그리는 사자성어를 꼽고 있는데, 2021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묘서동처(猫鼠同處)’를 꼽았습니다. 고양이와 쥐가 함께 한다는 뜻인데,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지 않고 한패가 되었다는 것, 곧 이권을 탐하는 이들을 감독해야 할 관리들(관료, 감사자, 검경, 법관)이 그들과 한패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일부 세력이 최고 권력을 장악하려고까지 하는 판국입니다. 이런 세태 가운데 사회적 신뢰는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그 세태를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호 속에서 뛰쳐나와 사랑과 우정의 연대를 나누는 병사들과 같은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의 삶의 근원이 사랑이신 하나님께 맞닿아 있다고 일깨워줍니다. 그 진실을 새기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는 가운데, 또한 동시에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이 시간, 바로 그 진실을 새김으로써 새로운 삶의 희망으로 나서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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