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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라는 것들’의 ‘의도적 폭력’일 뿐 -‘조동연 보도’를 보며2021 NCCK신학위 <사건과 신학> 12월호 ⑴
민성식(「종교와평화」 편집장) | 승인 2022.01.04 15:03
ⓒ국회출입기자단

조동연 논란…. 그런데 이것을 ‘논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개인의 사적인 삶을 놓고 무자비하게 가해진 이른바 ‘언론이라는 것들’의 폭력을? 조금 거창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냥 ‘사태’라고 하자. 그나마 객관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주체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므로 한 단어를 보태 ‘조동연 보도 사태’라고 하자.

조동연 보도 사태…. 이 사태를 일으킨 주체는 셋이다. 하나는 강용석 변호사가 운영하는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라는 유튜브 채널이고, 다른 하나는 거의 모든 언론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앞의 두 주체가 생산한 컨텐츠를 마구 퍼나르고 악성 댓글을 달기까지 한 누리꾼들, 말하자면 소비자들의 일부이다. 하지만 유튜브가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지금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사실상 이 사태의 주체는 생산자인 언론매체와 그 생산물의 일부 소비자들, 이렇게 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태가 어떻게 시작돼서 어떤 방향으로 흘렀는지는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사태의 내면에 들어 있는 의미들을 저널리즘의 입장에서 짚어 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사태는 ‘기레기’라는 말을 탄생시킨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 그리고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가족들에 대한 보도에 이어 대한민국 언론의 세 번째 ‘흑역사’로 남게 되리라는 것이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확신한다. 왜 그런가?

이 세 개의 ‘흑역사’를 들여다보면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우선, 고질적인 ‘받아쓰기’와 ‘복붙’ 습성이 여지없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전원 구조’라는 희대의 오보는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 쓴 탓이었고, 조국 가족 보도는 검찰이 흘리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쓰면서 문제가 시작됐으며, 이번 사태는 유튜브의 내용을 받아서 퍼나르다 시피 한 보도들이 출발점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언론들은 ‘열악한 미디어 환경 때문’이라고 이야기할지 모른다. 속보 경쟁과 클릭 수 경쟁 속에서 그렇게라도 기사를 생산해 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이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정확한 취재도 없이 무작정 받아쓴다거나 복붙을 반복하는 행위는 기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라는 것 정도는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기자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세 ‘흑역사’들의 두 번째 닮은꼴은 ‘보도로 인한 피해자’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서부터는 좀 더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난다.

독자들도 기억하시고 또 알고 계실 것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언론들이 유가족들을 ‘시체장사로 세금 도둑질이나 하려는 무리들’로 무자비하게 매도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조국 사건 보도와 이번 조동연 보도에서는 그 가족들을 어디까지 몰고 갔는지를.

물론 특정 사건을 파헤치고 보도하다 보면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의도치 않게 생겨난 일이어야 하고,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세 개의 흑역사들은 ‘피해자를 만들어 낸 과정’마저도 서로 닮아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 쪽에서 언론에게 ‘잘 보도해 달라’고 요청했었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조국 가족 보도에서는 검찰이 가장 큰 ‘소스’역할을 했다. 조동연 보도의 경우는 악의적인 유튜브가 근원이었지만, 여기에는 보도 대상이 여당의 공동 상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된 사람이라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서 피해자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권력’(제1야당도 집권만 하지 못했을 뿐 엄청난 정치권력이다)이 개입했다는 공통점을 세 개의 흑역사는 갖고 있는 것이다.

세 흑역사에서 언론과 손을 맞잡은 권력의 속성이나 뿌리 또한 사실상 동일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의 주인은 현 제1야당이었고, 조국 보도의 모판 역할을 한 검찰의 당시 수장은 지금 제1야당의 대선 후보이다. 조동연 보도의 경우는 그가 막 맡기 시작한 일을 생각한다면 그 연결고리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 개의 흑역사를 타고 흐르는 유사성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언론이 특정 권력과 결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보도로 인한 피해자들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이번 조동연 보도 사태를 우리나라 언론의 ‘세 번째 흑역사’로 규정하는 첫 번째 이유다.

NCCK가 필자에게 요구한 주제는 ‘개인사와 가정사에 대한 언론의 선정주의적 보도 행태’이다. 어떻게 보면, 필자가 이제까지 주장한 것은 이 주제를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동연 보도 사태는 ‘개별적인 선정적 보도 사례’만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많다.

사실, 모든 언론은 태생적으로 선정적일 수밖에 없다. 태어날 때부터 ‘옐로우’의 DNA를 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기사 역시 팔아먹어야 할 상품이기 때문이다. ‘심층보도’니 뭐니 하는 그럴싸한 말들로 포장하지만, 그 속에는 ‘안보고는 못 배기는 내용이 있으니 기대하시라’라는 식의 선정적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언론은 ‘무조건 선정적으로만 나가지는 못하게 하는’ 장치들 역시 갖고 있다. 기자협회의 윤리강령도 있고, 각 언론사들도 나름의 보도 기준을 갖고 있다. 게다가 흉악범의 얼굴과 신상도, 관계기관의 결정이 없으면 보도하지 않는 게 대한민국 언론의 관행이다. 그런데 세 흑역사에서 이런 모든 기준과 장치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다. 조국 보도와 조동연 보도는 여러분들이 보신 그대로이고, 세월호 참사 보도에 있어서는 유병언과 그의 가족이 피해자가 됐다.

그동안 지켜 오던 기준이나 장치를 뒤집는 이면에는 모두 어떤 이유, 혹은 의도가 숨어 있다. 세 흑역사의 경우는 ‘권력과의 결탁’이 이유이자 의도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것이 세 흑역사를 타고 흐르는 또 다른 유사성이자, 필자가 조동연 보도를 세 번째 흑역사로 규정하는 두 번째 이유다.

그렇다면 언론은 왜 권력, 그것도 ‘특정 (정치) 권력’과 결탁하는 것일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언론으로서는 절대 가서는 안 될 길이라는 게 언론학의 기본인 동시에 그동안의 역사와 경험을 통해서도 익히 배워 왔던 것이다.

필자가 선배로서 후배 교계 기자들 앞에 설 때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교계 언론은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여러분의 눈은 항상 교회를 향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러분의 눈이 문제투성이인 대형교회만을 향할 때, 여러분은 기자가 아닌 기레기가 된다”

일반 언론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곳을 향하고 있는 이유나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들이 ‘(진짜) 언론’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기사의 내용이 개인의 가정사와 사생활을 들춰내는 선정적인 것도 문제지만,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기준과 장치를 뒤집어 가면서 그렇게 하게 만든 그들의 눈과, 그 눈 속에 숨겨진 이유나 의도가 세 흑역사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게 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그런 눈, 그리고 그런 이유와 의도가 담긴 보도는 ‘사적인 삶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폭력’이 되어 한 개인에게 가해졌다. 그래서 필자는 글머리에서 그들을 ‘언론이라는 것들’이라고 불렀다.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따라 특정 권력과 결탁해 한 개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집단들을 어떻게 ‘언론’이라고 부르겠는가. 이것이 세월호 참사 보도, 조국 가족 보도, 그리고 이번 조동연 보도를 한데 묶어 ‘대한민국 언론의 흑역사’로 규정한 마지막 이유다.

<덧붙이는 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조동연 보도 사태’의 두 주체 중 생산자인 언론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 주체인 ‘일부 소비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사실 이 부분은 조금 애매하다. 그들이 악성 댓글을 달거나 기사를 퍼나른 것은 ‘정치적 성향’이 같아서일 수도 있고, 또 그냥 악의적으로(예를 들어 ‘조동연이 무조건 싫어서’라거나 ‘여혐 때문에’ 같은), 혹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생산자와 같은 기준으로 ‘눈’이나 ‘의도’, 혹은 ‘이유’를 들어 책임을 묻기는 힘들 것 같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악성 댓글이나 음란하고 폭력적인 게시물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정부에서는 이것을 막기 위해 ‘인터넷 실명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시민사회는 ‘문화인권’의 차원에서 여기에 반대했다. 그런 문제는 누리꾼들의 인식이나 자정기능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번 사태의 한 주체인 일부 소비자들의 문제는, 언론이 아닌 문화시민사회의 의제로 남겨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민성식(「종교와평화」 편집장)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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