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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투옥과 석방, 파란만장한 삶이었다정명기 목사, 『한국 감리교회 빛과 그림자』를 추적하다 ⑴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2.01.09 16:02
▲ 지난해 12월 초 정명기 목사가 『한국감리교회 빛과 그림자』를 출간하고 한국감리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애정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에큐메니안

정명기 목사가 지난 12월 초 『한국감리교회 빛과 그림자』(신앙과 지성사)를 발간했다. 이 책은 한평생 감리교회 목사로 사역한 한 정 목사가 목회의 소명을 감당하고 한국 감리교회를 향한 통렬한 회고와 반성이 담긴 책이라고 회자된다. 한 마디로 애정 어린 눈으로 역사적 뒤안길에서 감리교를 다시 되돌아본 책이라는 의미이다.

정 목사는 1950년 강화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부인 고 강명순 목사와 함께 강남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을 졸업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로 1975년 서울 사당동 빈민촌에 희망교회를 개척한 것을 필두로 광야교회, 예광교회, 안산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또한 정 목사는 감리교 본부 선교국 간사를 거쳐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KSCF) 총무를 역임하였으며 안산지방 감리사 등을 지냈다. 본서는 무엇보다도 한국감리교회에서 전 생애를 지냈던 정명기 목사가 감리교 역사를 그의 삶의 체험의 현장을 통해 기술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책일 수도 있다.

정 목사는 이 책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1988년과 1991년 ‘한국 감리교회의 계보정치 및 대안으로써 민족사적 과제’와 관련된 두 편의 글을 쓴 적이 있었다(감신, 30·31 합본호, 93-102). 그 후 30년의 시간이 경과하여 지난 2020년 5월 21일 경기연회에서 은퇴하였다. 40대 초반에 한국 감리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썼던 글을 읽고, 지난 136년간의 감리교회의 역사를 다시 반성하면서, 감리교회의 다가올 미래세대를 위해서 한국 감리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과 분단된 현실 속에서 우리 민중들의 소원인 민족통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 신앙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한국 감리교회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과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정 목사는 책을 통해 “한국 감리교회 과거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민족의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민족을 구원하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교회 자체 문제로 분열하고 진통을 겪게 되므로 민족과 민중 앞에서 사회를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거나 직무 유기해 왔음을 반성하게 된다.”며 뼈아픈 반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 감리교회 아니 온 한국 교회를 죽이는 암적 요소로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계보정치의 낡은 유산, 특히 학연간의 암투, 그리고 더 나아가 금권과 보·혁 갈등’을 손꼽고 있다.

더 나아가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는 것은 앞으로 한국 감리교회가 역사와 민족, 그리고 하나님과 민중 앞에서 민족 최대의 과제인 민족통일을 성취하고 세계선교를 통한 세계평화실현(Shalom)의 도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계속해서 한국 감리교회의 미래 대안과 개혁방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 한국 감리교회는 영적이며 민중적이며 민족적인 교회였는가? ▲ 한국 감리교회는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신앙고백과 경험과 실천에 충실하였는가? ▲ 한국 감리교회는 에큐메니컬 선교운동을 통해 세계의 개인, 교회, 사회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민족의 평화통일 및 생명존중, 사회적 평등경제가 실현된 정의사회 구현(하나님의 나라)에 책임적이었는가? 등의 3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3가지 질문은 감리교회를 넘어 모든 한국 교회를 행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나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2월 중순 에큐메니안은 연희동 ‘신앙과 지성사’에서 정명기 목사를 만나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정 목사의 인생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다. 단 한 줄로, ‘투옥과 석방으로 이어진 삶’이었다.

▲ 정 목사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목사님 몇 년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정명기(이하 정): 순천에서 목회하신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또 옮기셨더라고요(웃음)

▲ 네. 지금은 에큐메니안 대표를 하고 있고, 신학연구소도 하고 있습니다. 우선 목사님의 『한국감리교회 빛과 그림자』를 정말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었습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라고 그럴까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정: 제가 작년에 은퇴를 했습니다. 은퇴하고 나니 시간 여유도 있고 해서 제가 지금까지 몸담고 살아왔고 마치 모태와 같은 곳인 감리교회역사 역사를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과거를 뒤돌아보게 되었고 현재 감리교회의 현실을 잘 알고 있고 따라서 감리교회가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 하는 그런 원로 목사로서의 노파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앞으로 감리교회의 미래 세대를 위해서 지난날 역사를 좀 정리해서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정리를 해서 이번에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 저자로서 이번에 출간하신 『한국감리교 빛과 그림자』의 특징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 감리교의 120년 책을 발간하면서 120년 역사에서 감리교 지도자들을 나름 열거합니다. 그것을 읽어보니까 주로 남자 위주였습니다. 몇몇 여성 지도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감리교 지도자들의 명단을 남자 위주로 해서 선택을 했더라고요.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여기저기 흩어진 있는 여성 지도력을 발굴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여성 지도력의 재발견, 이것이 이 책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 목사님은 감리교 목회뿐만 아니라 KSCF 총무도 하셨고 옥고도 두 번이나 치르셨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어떤 이유로 옥고를 치르게 되셨습니까?

정: 옥고라기보다는 교도소에 갔던 거죠. (웃음) 도합 3번에 걸쳐 교도소에 간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73년도 소위 남산 부활절 사건 때였습니다. 박형규 목사님 등이 구속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KSCF 학생이었습니다. 그때 재가 학생 신분으로 남산 부활절 사건에 관련을 맺게 되어서 남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구류를 살았습니다.

저는 남산 부활절 사건의 배후 인물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조금 심부름(?) 했다고 저를 유치장에 가둬 놓았습니다. 일주일 정도 보안사에서 조사받은 후에 남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서 당시 문래동에 있는 지방법원에 가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저의 죄목을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해서 약 20일 구류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KSCF 학생 몇 명과 함께 남대문 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를 산 적이 있습니다. 그게 아마 공식적으로 보면 교도소까지는 안 갔지만 유치장에서 보낸 첫 번째 구속이었습니다. 두 번째가 민청학련 사건이었습니다.

▲ 민청학련 사건 때는 어떻게 개입이 되셨던 것입니까?

정: 민청학련 당시 저는 학교를 군목 후보생으로 있었습니다. 이미 학교 다닐 때 군목 후보생 자격을 취득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졸업하면 안수를 받은 후에 장교로 입대를 하게 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감신대 대학원에 입학을 했어요.

그리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동시에 산업공단이 있는 독산동에 있는 ‘경수산업선교회’가 운영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에 파송을 받았습니다. 전도사로 일하게 된 거죠. 1월부터 4월까지 교회를 섬기고 목사 한 수 받으면 곧바로 군목으로 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대학원도 입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 구속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정: 예전에 KSCF 활동을 같이 했던 선배 중에 고 김경남 목사님이 계셨는데 당시 그 분이 박형규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서울제일교회에 다니셨습니다. 언제가 그 선배를 만났는데 그 분이 나보고 4월에 전국 시위를 계획하고 있으니 감리교 신학대학에서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않느냐 하시면서 감신대에서도 전국 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나는 학부는 졸업을 했으니 매일 학교는 다니지는 않지만, 후배들과 의논해서 참여하도록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리고 당시 KSCF 활동을 같이 했던 이상윤 목사에게 4월 시위에 대하여 말하고 감신도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런 일이 계기가 되어서 감신도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후일 감신대 시위의 배후세력이 누구인가를 조사하는 중에 제가 배후자로 지목이 되고 조사를 받고 구속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사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시위와 관련이 없었던 수 년 전의 사건까지도 조사내용에 포함되었습니다. 히타치 건이라 불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일본 히타치 기업에 재일교포 청년이 취업을 했는데 부당 해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불법해고에 대하여 한국에서 문제를 삼고 시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항의 시위 사건을 민청학련 사건과 엮어서 저를 포함하여 기독교계에서 한 20여 명 정도가 구속이 되었습니다. 재판을 받고 1심에서 징역 10년을 받았습니다.

▲ 형량이 꽤 높았군요?

정: 당시에는 우리보다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철’은 사형을 언도 받기도 했기에 사실 10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죽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나의 경우에는 1심에서 10년을 받고 2심에서 감형이 되어 결국 7년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징역을 산 것은 한 10개월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처음에는 공산당의 배후가 있었다는 것으로 몰아가다가 결국은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졌습니다. 더욱이 기독교계에서 계속해서 문제 삼고, 국내외 여론이 나빠지면서, 결국에는 우리를 집행정지라는 형태로 해서 민청학련 사건 다음 해 2월부터 관련자들을 석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10~11개월 정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안양으로 이감되었습니다. 안양에서 2심을 받았는데 2심 후에는 더 이상 재판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집단적으로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고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상고 포기 후 미결수에서 기결수로 신분이 바뀌게 되어서 마지막에는 영등포 교도소로 이감을 가서 거기서 석방되었습니다. 두 번째 감옥 살이었습니다. (웃음)

▲ 그런 세 번째 감옥살이(?)에 대하셔 말씀해주시지요.

정: 세 번째는 이렇습니다. 감옥 갔다 오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제가 사당동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학교로 복귀도 안 되고 하니까. 그렇지만 나는 학부는 졸업했으니까 목회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감리교는 학부만 졸업해도 현장 목회가 가능했습니다.

저는 평소에 학생 때부터 빈곤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사회개발단’에서 사회선교훈련도 받고 고 제정구 선생이 활동하던 빈곤 지역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인연이 되어서 사당동 빈곤 지역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 이름을 희망교회로 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희망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지요.

마침 당시 감리교 선교국 총무님이 감리교회에서도 도시 빈곤 지역 선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도시빈민 선교에 대한 정책을 세우고 저를 희망교회로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교회 개척 얼마 후 고 강명순 목사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한 지 5~6개월 후에 또 구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 세 번째 구속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정: ‘3.1 구국선언’과 관련이 있는 구속이었습니다. 3.1 구국 선언 사건 때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을 받았는데 재야인사들에 대한 형량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당시 문익환 목사, 이우정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구속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시위가 참 많았습니다. 3.1 구국선언 사건 1년 후  1977년에 1년 후에 민주구국헌장이 발표가 됩니다. 민주구국 헌장이 선포되고 거기에 여러 사람이 서명했는데도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목회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끔 종로 5가를 방문하곤 했지요. 어느 날 우연히 박정열 선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선배가 민주구국 헌장이 발표됐다고 하면서 그 문서 한 장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문서를 가지고 와서 당시 희망교회의 청년이며 감신대 학생 김정택 목사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김정택 목사가 감신대에서 동료들과 함께 선언문을 복사해서 돌려보고 감신대학생의 입장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3.1 구국선언 이후에 한동안 학생 시위가 별로 없었던 때였습니다. 감신대 안의 시위가 빌미가 되어서 문서에 서명하거나 혹은 배포한 사람들이 조사를 받았습니다. 사실 그 사건 때는 종로 5가에서는 구속된 사람이 일체 없는데, 학생 시위사건과 관련된 나를 비롯한 학생들만 구속되었습니다. 그 때 나는 징역을 그리 많이 받지 않았습니다.

▲ 시위 전과도 있었는데 형량이 낮았다고 하시는데 어찌된 일이었습니까?

정: 거기에는 사연이 있어요. 1심 재판을 받게 되었죠. 그런데 제가 전과가 있잖습니까. 그런데 당시 김정택 목사는 전과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과가 있는 나는 형량을 엄청나게 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전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시위를 주동했고 배후자가로 인정되니까 형량이 많을 것은 거의 틀림없었습니다.

더욱이 결혼한 지 6개월도 채 안 됐을 때 아닙니까. 또 목회 시작한 지도 한 1년 몇 개월밖에 안 되었고,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유치장에 갇혀 있던 김정택 목사를 세면실에서 만나서 “내가 이번에 잘못하면 징역을 엄청 받을 것 같은데, 어차피 네가 주모자니까, 네가 다 한 걸로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니까 김정택 목사가 알겠다고 하면서 시위 주모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냥 단순 배후자가 되었던 것이고.(웃음)

그래서 결국 김정택 목사는 1심에서 3년을 받은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는 결국 2심에서 감형되어서 1년의 형량을 받았고 김 목사는 결국 1년 6개월을 받았습니다. 결국 나는 1977년 4월에 들어가서 1978년 6월 4일 형량을 꽉채우고 출소했습니다. 그것이 세 번째 감옥살이였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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