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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희망으로 가득 찬 세계를 깨뜨리시다위기에 처한 생명을 향한 손길(이사야서 42:1~9)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01.12 23:27

니체가 자신의 마지막 저작 <이 사람을 보라>에서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라고 한 적이 있지요. 성서일과를 따라 오늘 본문말씀을 대하면서 “왜 이렇게 좋은 말씀들만 줄줄이 이어질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연말연초 이어지는 말씀 본문들이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가장 좋아하는 성경말씀의 한 대목입니다. 성서적 신앙의 정수가 담긴 본문입니다. 역사의 주이자 창조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이루시고자 하는지를 너무나도 실감나게 표현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개인적 차원에서 신앙의 지표와 같을 뿐 아니라,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바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22년 역사 가운데 이미 여러 차례 이 말씀을 나눴지만, 오늘 또 다시 그 의미를 새길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주저 없이 그 말씀의 뜻을 다시 새기고자 합니다.

본문말씀이 포함된 제2 이사야서(40~55)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고난의 시기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통찰에 이르게 되었는지 말씀을 들여다볼 때마다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신앙의 역사, 정신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습니다.

바로 그 시기를 통하여 성서의 세계는 한 민족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 세계로 펼쳐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유대 민족이 강성해져서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그 고난의 의미를 새기고, 나아가 인간의 진정한 희망에 대한 깨달음에 이른 정신적 성취를 통해서였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그 진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시절에 선포된 이 말씀은 제국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뤄질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 희망으로 가득 찬 세계 안에 진실한 하나님의 종을 통한 새로운 역사를 선포합니다. 그 형식으로 볼 것 같으면, 본문말씀은 고대 근동에서 제왕이 즉위하여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공포하는 절차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은 그 내용상 나라의 제왕이 법을 제정하고 선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1절).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2~3절)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2절) 이 말씀은 흔히 나라의 제왕들이 법을 제정하고 선포하는 것과는 전혀 달리 하나님의 종이 공의를 실현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소통을 유념하지 않습니다.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압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법질서를 강조하고 신민들이 그것을 무조건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권력의 위엄을 과시하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백성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권력의 의지를 말합니다. 반면에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한다.’는 것은 백성 위에 군림하겠다는 의지로 그 위엄을 과시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실한 공의를 실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편 19:3~4) 노자 도덕경(41장)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큰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큰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大音希聲 大象無形).” 우리에게 에밀레종으로 알려져 있는 성덕대왕신종에는 이런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태음(大音)이 천지 사이에 진동하고 있는데 아무리 들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들릴 듯 말 듯 긴 여운을 갖고 있는 종에 정치적 이상을 담은 것입니다. 작은 소리가 요란한 법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소리는 구설수를 야기하기 십상일 뿐 화평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자기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가닿는 목소리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평화를 이룹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3절) 하나님의 종이 진실로 베푸는 공의는 메마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진리로써 공의를 베풀 수 있는 것은 그가 진실로 가장 연약한 존재를 사랑하는 그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마음입니다. 시인 윤동주가 서시에 고백했듯이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꺼져가고 죽어가는 것들을 더욱 가혹하게 내쳐버리지만, 하나님의 종은 그와 정반대로 그들을 죽게 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 무엇입니까? 거센 바람 앞에 무력하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존재를 말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은 물질의 위력, 곧 경제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에 기반한 정치적 권력을 말합니다. 또한 그러한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통속적 상식을 말합니다. 돈이 있어야 잘 산다는 생각, 경제를 발전시켜야 잘 산다는 생각,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정치권력과 군사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등을 말합니다. 국가가 등장한 이후 그것은 상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 거짓된 희망을 깨고 새세계를 여시는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그 차제가 희망이시다. ⓒGetty Image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사람들의 일상 안에 실현된 그 질서와 그 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통속적 상식에 반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습니다. 거센 바람 앞에 무력하게 사라질 수도 있는 존재를 보호하고, 그 존재들을 다시 일으키고 다시 살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합니다. 위기에 처한 모든 존재들, 궁지에 내몰린 약자들과 소수자들에게 긴급히 다가와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 냅니다. 위기에 처한 생명을 살려냅니다.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상식에 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련을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4절) 이 말씀은 오직 진실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일 자체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쇠할 수’도 있으며 ‘낙담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힘은 만만치 않습니다. 권력은 누군가를 복종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입니다.

그러나 그 권력의 의지에 꺾이지 않는 이가 곧 하나님의 종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로 공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종은 쇠하지도 않고 낙담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내가 하나님의 종이다’라고 요란하게 선언하는 것으로 자신의 몫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쇠하지도 않고 낙담하지도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로, 그리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본분을 다합니다. 생명의 위기에 비로소 진가를 드러내는 이가 곧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 놀라운 일은 반드시 세계만방 가운데서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5~9절의 말씀은 1~4절과는 구별되는 독립적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선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그 백성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선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앞의 말씀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긴밀히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너의 손을 붙들어 주고, 너를 지켜 주어서,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니, 네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다.”(6~7절)

여기서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선포한 말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핵심입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과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전형적인 인간의 고통을 말합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생래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이며,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인간사회의 작위적인 부조리에 의해서 겪게 되는 고통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해낸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인간사회의 부조리에 의한 고통의 극복은 가능한 것이지만, 생래적으로 주어진 어떤 한계는 극복 불가능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모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이 불편함을 겪고 고통을 겪는 것은 사회적 질서와 환경이 특정한 사람들 위주로 짜여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예컨대 왼손잡이가 불편한 것은 그것이 결함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른손잡이 위주로 모든 환경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장애’로 불리는 것은 그 자체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여서가 아니라 그것을 장애로 만드는 환경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소수자는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하나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소수자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환경입니다. 고통을 겪는 이들을 구해내신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로 만들고 장애인으로 고착시켜 고통을 겪게 만드는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존재로 저마다의 삶을 영위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렇게 놀라운 일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 가운데 한 대목이지만 그저 옛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바로 오늘 본문말씀이 선포하고 있는 그 뜻 안에서입니다.

이 말씀이 선포하는 뜻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뤄졌다고 믿고, 우리 역시 그 진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요체입니다. 그 점에서 오늘 말씀은 신구약성서를 통틀어 그 뜻을 집약하고 있는 말씀에 해당합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이루는 길,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주어진 숭고한 사명입니다.

내가 잘났다고, 내가 뭐든 잘할 수 있다고 외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는 정치의 현실, 더욱이 그렇게 자기를 내세워야만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선거를 앞두고 있는 국면에서, 오늘 본문말씀은 너무나도 그 현실과 괴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그 현실의 한계를 돌파해내지 못한다면 부질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현실이 괴리되어 있다는 것은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에 비추어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끊임없이 되묻고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이 우리의 진정한 삶의 좌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진정한 좌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에, 이 세상에 희망이 생깁니다.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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