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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적 폭력과 구경꾼의 이름으로2021 NCCK신학위 <사건과 신학> 12월호 ⑶
김민정(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소) | 승인 2022.01.18 14:52
▲ 조동연 교수가 자신에 대한 무차별적인 음해성 비난에 대해 사퇴로 답했다.

무엇이 폭력인가?

대한민국 대선 정국에서 군인 출신의 대학 교수 한 사람이 선거대책위원회의 공동상임선대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가 사생활과 관련된 의혹으로 사퇴한 사건이 있었다. 위원장 위촉과 자진 사퇴, 그리고 사퇴에 대한 공식 수용이 이루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4일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폭력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 사건은 어떤 면에서 폭력적이었을까?

각종 범죄에서 시작해서 테러, 폭동, 국제분쟁에 이르는 폭력은 가시적인 폭력으로서 우리가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반면 ‘언어’라는 상징을 통해 특정인을 규정하고 단죄하는 폭력은 비가시적인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상징적 폭력’이라 부른다. 필자는 조 교수의 사건에서 상징적 폭력의 두 가지 측면을 비평적으로 바라보았다. 하나는 이 문제를 심각한 폭력으로 인지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정상적인 의사소통 기능이 교란되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측면에서 볼 때, 이번 사건은 명백히 상징적 폭력이지만 ‘사실을 알 권리를 위해 폭로한 것일 뿐’이라고 포장될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사실이고 누구를 위한 권리일까? 여기서 무엇이 상징적인 폭력이었을까? 일단 ‘혼외자’ 라는 언어로 한 사람을 재단하자 그 개인의 삶의 정황과는 상관없이 한국 사회의 보편 정서에 따른 윤리가 절대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곧바로 부적절한 사람이 되었다. 그 언어가 실재 조 교수 개인과 관계없이 ‘비윤리적인 사생활, 부적격’이라는 상징 영역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 폭력성이 진행되어서 타인들이 그 개인의 삶을 비난할 당위성을 주는 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아이의 존재를 무자비하게 규정하는 정체성에 대한 폭력도 행사했다.

“적이란, 그의 이야기를 당신이 들은 적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처럼, 일반적으로 여론을 통한 비난이 쉽게 형성되는 것은 상대의 개인적 서사를 모를 때이다. 그런데 추후에 밝힌 ‘성폭력에 의한 임신’이라는 참담한 개인의 역사는 양심적인 대중에게 먹먹한 무게를 드리웠다. 한편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잘못이 아닌 타의에 의한 일이므로 진작 그 사실을 밝히고 위원장의 자리를 지켰어야 한다.’라고 말이다.

차라리 그런 조언이 통할 수 있는 현실이라면 조금 더 나았을까? 그런 저항이 과연 한 사람이 버텨내고 이겨낼 수 있는 무게의 것이었을까?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정치계의 울타리로부터 벗어나고 단절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끝나지 않는 제2의 폭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누구를 위해 저항을 하며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일까? 차라리 이 사회의 폭력 양상을 개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두 번째 측면인 ‘의사소통의 교란’은 대중들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다. 일단 어떤 사람을 규정하는 이미지가 언어를 통해 씌워지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실재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이미지를 구분해 내지 못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조 교수에 대한 폭력과 선정적 비난이 주어지고 난 후, 사람들은 그녀에게 맡겨졌던 직책이 무엇이고 어떤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우선인지를 잊었다. 이 일이 이슈가 된 이후에 생산된 의사소통은 대부분 교란된 것이었고 본질에서 멀어진 것이었다.

정치인은 영웅도 아니지만 희생양도 아니다. 다만 한 시민으로서 정치를 위해 전문할 대표성을 위임 받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맡겨진 자리와 임무에 대한 논의는 온갖 황색 언론에 묻혔다. 이 혼돈의 무대 주위에 구경꾼의 역할을 한 대중들이 있다. 어쨌거나 대중들은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목격자의 입장이 아니라 구경꾼의 입장에 선다. 그럼 구경꾼의 문제는 무엇인가?

구경꾼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정치 사회 칼럼니스트인 볼프강 조프스키(Wolfgang Sofsky)는 그의 저서 『폭력사회』에서 기독교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고백록』에 나온 ‘폭력의 유혹’에 대한 일화를 언급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친구이자 제자인 알리피우스는 친구들에 의해 반 강제로 검투 시합 구경을 갔다. 독실한 신자였던 알리피우스는 자기의 정신과 눈은 그 폭력성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검투사들이 입은 상처와 흘린 피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처음에는 폭력적인 현장에 대한 역겨움과 혐오감에 그것을 거부하던 구경꾼이 그 격렬함에 휘말리고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폭력 현장을 직시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사실 가시적인 폭력보다 더 무서운 비가시적 폭력이 첨예화되고 일상화되는 현실에서 자기 정신을 지켜 내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오늘날의 구경꾼은 알리피우스처럼 단순하게 반강제로 끌려가서 현장을 목격하는 경우에 그치지 않는다. 나름의 목적과 입장을 가지고 폭력을 찬성하거나 부추기지만, 책임에서는 떨어져 있는 다소 능동적인 구경꾼이 있다. 그런가 하면 폭력 현장을 혐오하지만 고개를 돌려 거리 두기를 하는데 그치는 방관적 구경꾼도 있다. 문제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구경꾼의 존재가 폭력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내 개인들에 대한 존중을 잊지 않는 시민 정신을 지켜내는 것’ 그리고 ‘폭력을 추동하는 에너지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성찰’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게 현실이고 만사가 다 그렇다. 세상을 냉철하게 보라.’고 할 수도 있겠고 그래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의 무관심이나 무심코 던지는 냉소가 곧 폭력의 질주에 순풍을 더해주거나 방치하는 방식으로 맞닿아 있을 수 있다.

대중과 희생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이 사건에 대한 막연한 동정은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공감을 시도하고 안타까움을 표하면서도 여전히 그 고통이 내 고통이 아님을 안다. 그리고 폭력이라는 것이 그것을 통제할 더 큰 힘을 통해 제어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적시해서 그 에너지를 빼고, 사회 안에 만연해 있는 폭력에 대한 암묵적 지지와 동의를 제거하는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시간과 함께 지나갈 것이다. 사실 그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필자에게는 부담을 안겨 준다. 혹여 갈등이 해소되고 나서 누군가는 그동안 표출했던 집단적 에너지를 ‘과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많은 것들이 이미 고통의 흔적이 된 이후가 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은 조동연 교수와 그와 같은 입장에 있었던 많은 다른 이들이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자신의 삶을 감당하며 용기를 내었던 역사적 경험’이 아니겠는가? 폭력의 야만이 춤을 추는 세상에서 용기가 우리를 다시 일으키고 성찰이 또 다른 내일을 불러오기를 기대한다.

김민정(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소)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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