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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진실이라는 허무의 무게영화 “라스트 듀얼”이 속삭이는 또 하나의 진실
이정훈 | 승인 2022.01.23 06:15
▲ 영화 “라스트 듀얼” ⓒ20th Studio

지난해 10월 개봉한 영화 한 편이 있었다. 영화가 개봉했는지도 몰랐지만 SNS를 통해 소위 재미있는 영화라는 입소문이 돌길래, 이제야 필자도 관람했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계의 거장 ‘Ridley Scott리들리 스콧)’ 감독이 제작해 기대를 받았고, 주연 배우들, Matt Damon(맷 데이먼), Adam Driver(애덤 드라이버), Jodie Comer(조디 코머), Ben Affleck(벤 애플렉) 등 한 앵글에 다 담아내는 것도 힘든 배우들이 출연한 그야말로 대작이지만 소위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평가된다.

이 영화는 미국 UCLA대학교 영문과 교수인 Eric Jagger(에릭 재거)가 쓴 동명의 소설 『마지막 결투: 실제로 일어난 범죄와 스캔들과 결투 재판의 기록』(김상훈 옮김[오렌지디, 2021])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14세기 즉 130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프랑스 역사상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던 ‘마지막 결투 재판(trial by combat)’에 관한 실화를 다루고 있다. 제7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각자’의 진실을 한 편에 담은 영화

영화의 첫 장면은 한 여성이 드레스를 입는 장면과 두 남자가 결투를 준비하는 장면을 번갈아 보여주며 시작된다. ‘Jean de Carrouges’(장 드 카루주, 맷 데이먼)와 ‘Jacques Le Gris’(자크 르 그리, 애덤 드라이버)가 왕 앞에서 신성한 결투를 맹세하고 서로 창을 겨누고, ‘카루주’의 창이 ‘그리’를 치는 순간 화면이 암전되며 영화 제목이 등장한다. 결투 장소나 복장이 실제 중세 시대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윽고 또 다른 소제목으로 보이는 문구가 나타난다. “CHAPTER ONE – The truth according to JEAN DE CARROUGES”이다. 번역하자면 “제1장 장 드 카루주에 따른 진실”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영화는 두 개의 제목을 더 보여주는데, 총 153분의 러닝 타임 중 42분 정도에 “CHAPTER TWO – The truth according to JACQUES LE GRIS”(제2장 자크 르 그리에 따른 진실)와 85분 즈음에 “CHAPTER THREE -  The truth according to THE LADY MARGUERITE”(제3장 마르그리트 부인에 따른 진실)가 각각 등장한다.

▲ 제3막의 제목 ⓒ20th Studio

소제목에 있어 한 가지 추가적인 장면이 등장하는데, 제3장에 해당하는 장면의 시작에서 또 다른 문구, “The truth”(진실)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마치 제3장의 내용이 이전 장의 진실보다 더 진실인 듯한 인상을 심어주는 효과를 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진실에 대한 여부를 동일한 사건의 전과정을 목격하고 있는 관람자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것으로 보였다. 영화가 추구하는 진실은 이 하나의 사건, 즉 원래는 전장에서 서로의 목숨을 구해줄 정도 가까웠던 ‘카르주’와 ‘그리’의 갈등, 즉 “카루주의 부인 ‘마르그리트’를 그리가 ‘강간’한” 것으로 인해 발생한 갈등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찾는 것이다.

스콧 감독은 이 사건의 전과정을 각 인물 입장에서 각각의 에피소드로 구성해 최종적으로 한 편에 담아놓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두 남자는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마르그리트와 아주 어린 아기만-실제 이 어린 아기가 ‘누구’의 아들인지에 대해서 암시적일 뿐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남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She never remarried.”(그녀는 결코 재혼하지 않았다)는 문구를 끝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누구에게는 영민함으로 다른 이에게는 어리석음으로

이러한 모든 흐릿함에도 각각의 에피소드에는 중세 시대 생활과 남성과 여성의 위치를 명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중세 시대의 영주의 삶과 제도, 평민 혹은 노예 그리고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특히 마르그리트의 행동 하나하나를 중세 시대의 입장에서 해석할 때와 현대의 시각으로 이해할 때의 차이점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장면 사이에 남겨 놓았다.

일례로 카루주가 스코틀랜드로 전쟁을 나간 사이 카루주가 강압적으로 다루던 마굿간지기에게 마르그리트는 융통성을 발휘한다. 자신의 땅에서 소작을 하고 있는 소작농의 품삯을 한 달 정도 잊어버린 것을 통해 카루주의 농지의 행태를 개선하여 재정을 상당히 회복해 놓는다. 단순하게 보면 강압적이고 우격다짐이기만 한 카루주의 폭압적인 영지 운영에 비해 현명하고 꼼꼼한 마르그리트가 잘 챙겨주는 유능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영화에서 가장 다면적인 시각이 개입할 수 있다. 카루주가 씨암말과 관련해 난폭하게 행동하지만, 마르그리트는 마굿간지기에게 융통성을 발휘하는 장면은 또 다른 관점에서는 굉장히 어설프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중세의 말은 품종과 용도에 따라 엄청난 가격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카루주가 씨암말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러한 용도의 말을 키우기 위함이다. 이러한 용도의 말을 키우는 데는 품종, 영양, 훈련 등등이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 마굿간지기는 씨를 가려 받으려는 카루주의 명령을 어기고 숫말을 풀어두어 품종에서부터 어긋날 위험을 자초하는 인물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중심은 마르그리트에게 맞춰져 있다. 차별당하고 배제당하고 결국에서 성폭력 당하는 여성에게 중심이 있다는 뜻이다. 즉 여성이 당한 폭력의 원인이 무엇이고 이 폭력을 해결하려는 남자와 이를 방어하려는 남자의 동분서주가 영화의 줄거리이다. 결국 또 다른 폭력으로 해결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정당한 결투를 가장한 폭력.

복음서‘들의’ 예수

영화를 다 관람한 후 밀려오는 생각도 여러 가지였고 묘한 감동도 감동이었지만 첫 에피소드의 제목을 보자마자 생각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신약성서 복음서들의 제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원어 성서라는 관점에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로 된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가 권위를 가진 유일한 성서이지만, 신약성서는 헬라어로 된 판본이 크게 3종류가 있다. 전통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2012년에 28판이 등장한 『(Nestle-Aland) Novum Testamentum Graece: 28th Edition』 (이하 Nestle-Aland)이다. 그리고 2010년에 1판과 2014년에 5판이 각각 출간된 『The Greek New Testament: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Edition』 (이하 SBLGNT)과 『The Greek New Testament: 5th Revised Edition of United Bible Societies』 (UBSGNT)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 사진 왼쪽부터 Nestle-Aland, SBLGNT, UBSGNT

신약성서 3종류 판본 중 어느 것이 더 권위가 있다는 논쟁은 전혀 없고, 다만 단어적인 측면에서는 약간의 차이에도 내용적으로는 일치한다. 하지만 3종류 판본들의 난외주 구성에 있어서는 확실한 차이를 볼 수 있다. Nestle-Aland와 UBSGNT는 축적된 사본 연구의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면, SBLGNT은 독서용에 가깝다.

이러한 신약성서는 우리말로는 「마태복음」, 헬라어로는 「Κατὰ Μαθθαῖον」으로 시작한다. 「카타 맛타이온」을 첫 책으로 3권의 복음서들이 더 이어지고 있다. 4권의 복음서 중 앞의 3권, 즉 「마태」·「마가」·「누가」 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들 하며, 「요한복음」은 별개로 취급된다.

이 복음서들의 헬라어 제목은 모두 ‘Κατὰ’(카타)로 시작해, 각각의 복음서 저자라고 추정(?)되는 이름이 뒤에 따라 붙는다. 첫 단어인 Κατὰ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헬라어-영어 사전은 이 단어의 품사를 ‘Preposition(전치사)’로 규정하고, Κατὰ 뒤에 단어의 어떤 형태가 오느냐에 따라 뜻을 구분한다. 즉 Κατὰ 뒤에 ‘Genitive’(속격[소유격, 2격], ‘~의’) 형태의 단어가 오면 ‘against’나 ‘down’으로, ‘Accusative’(대격[목적격, 4격], ‘~을[를]’) 형태는 ‘according to’로 풀이해 놓았다.

즉 「Κατὰ Μαθθαῖον」이라는 제목에서 Μαθθαῖον(맛타이온, 마태‘를’)은 ‘Μαθθαῖος’(맛타이오스, 마태)의 목적격 형태이기에 “마태에 따라”로 번역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Μαθθαῖος의 소유격 형태인 ‘Μαθθαιοῦ’(맛타이우, 마태‘의’)는 신약성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Κατὰ Μαθθαιοῦ’가 가능하지만 실제로 신약성서에서 쓰인 예가 없으며, “마태에 대항하여(대하여)”나 “마태 아래에(로)”로 번역될 수 있는 문구 자체가 신약성서에는 없다는 뜻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우리말 성서는 복음서 제목에 대해 「마태복음」이라고 번역하지만, 영어성서는 번역본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어떤 영어성서 번역본은 「The Gospel of Matthew」라고 쓰거나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로 표기하기도 한다. 전자는 “마태‘의’ 복음”이 될 것이고 후자는 “마태‘에 따른’ 복음”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앞서 Κατὰ의 뜻풀이를 살펴본 바와 같이, 헬라어를 직역한 형태는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가 가깝다.

이렇게 각 복음서는 각 저자가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좀 더 풀어쓰자면 마태가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마가가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 누가가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는 요한복음에도 동일한데, 요한이 풀어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적이다.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담고 있지만, 상당한 유사점이 있음에도, 상당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각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편린(片鱗)’을 담고 있을 뿐이며 4개의 복음서 전체를 다시 분해·재조합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나 말씀을 완벽히 구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衆論)이다. 학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Historical Jesus”(역사적 예수) 혹은 “Real Jesus”(실제 예수)의 모습은 영원히 미궁이다.

좀 더 과격한 설명을 동원하자면, 하나 같이 예수와 동시대를 살지 않았던 ‘마태의’ 예수, ‘마가의’ 예수, ‘누가의’ 예수 그리고 ‘요한의’의 예수일 뿐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진실한’ 아들”(마태 27,43; 마가 15,39)이자 “진리”(요한 14,6)라고 믿으며 각자의 복음서를 저술했지만 자신들의 진리일지도 모른다. “계시된” 진리이지만 동시에 “은폐된” 진리일지도 모른다.

예수에게서 벗어나면 보일지 모르는 것들

예수를 다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살짝 벗어나 복음서를 독서하면 우리는 예수가 살았던 시대나 복음서 저자들이 활동했던 시대 사람들의 삶과 제도들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특히나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 차별받고 배제당하고 폭력에 일그러진 사람들이 보일지 모른다. 뚜렷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흐릿한 상이라도 찾아볼 가능성은 존재한다. 예수를 벗어나 이들에게 관심을 주는 것은 불경한 일일까. 해서는 안 되는 일일까.

하지만 일각의 (신약성서)신학연구는 이미 이런 작업을 펼쳐 놓았다. 멀리는 남미의 ‘해방신학’이, 미국의 ‘흑인해방신학’이, 독일의 ‘정치신학’이 그리고 한국의 ‘민중신학’이 그러했다. 예수의 주변부 사람들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그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작업을 진척시켜 왔다. 예수 주위의 사람들이 바로 ‘나’일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했다. 예수를 따라다니던 고아와 과부, 장애인 중 그들 중 하나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각자의 진실이라는 허무를 극복하려면

▲ 마르그리트와 남겨진 아이 ⓒ20th Studio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언급했지만, 배우들의 유명세로 따져 남자 인물들의 역할을 맡은 맷 데이먼과 애덤 드라이버에게 관람자들은 시선이 고정될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강간당한 마르그리트에게 맞춰져 있다, 암시적이든 명시적이든 가리지 않고. 또한 영화는 이 강간 사건 이후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 명분을 찾아가는 두 남자의 진실을 그들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카루주’는 ‘카루주’대로, ‘그리’는 ‘그리’대로 말이다. 그리고 영화를 관람하다 보면 마르그리트가 강간 사건이 벌어지도록 행동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도록 묘하게 장면들을 엮어놓았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은, 결코 관람자의 시각이 강간당한 여성의 입장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어 보였다. 마르그리트가 강간의 빌미를 제공했을지 모른다는 의심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3개의 ‘진실’로 그려내는 것은 스콧 감독의 기발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관람자가 어느 진실에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지 않지만 말이다. 어떤 이는 카루주의 진실에, 또 어떤 관람자는 그리의 진실에, 어떤 사람은 마르그리트의 진실에 더 방점을 찍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백미는 그저 각자의 진실 중 너의 진실일 뿐이라는 허무를 깔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모두에게 명명백백한 진실이 아니라 각자의 진실일 뿐이라는 허무 말이다. 만약 이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이 허무를 견딜 힘이 있을까. 허무에 빠지지 않고 일상을 살아낼 수 있을까.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이런 허무를 극복하는 길은, 이것도 철저히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폭력당하는 사람의 진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결론지어 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서로 다른 뜻과 느낌을 가진 우리말의 ‘진실’과 ‘진리’를 영어로 번역하자면 모두 ‘truth’이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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