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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차별과 혐오의 울타리경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총(열왕기하 5:8-15; 마태복음 8:5-13)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1.27 15:50
▲ Pieter de Grebber, 「Elisha refusing the gifts of Naaman」 (1637) ⓒWikipedia

예수께서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갈릴리 호수가에 있는 가버나움에 사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의 공생애는 거기서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를 이사야의 예언대로 어둠을 비친 빛의 사건으로 보도합니다.

당시 천대받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거기 산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향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릅니다. 왜 이들에게 무엇을 회개하라고 하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와 다르게 그 말이 여기서 사용된 것일까요? 그 후 예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시며 병과 약함을 고쳐주십니다(마 4장). 이것은 마치 어떻게 하늘나라를 사는지 준비를 시키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회개하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걸맞는 모습이 되어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천대받던 지역을 어둠에 쌓인 지역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고  희망이 없는 곳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괜히 위축되고 스스로 비하하고 스스로 포기하는 삶을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이런 지역에 빛이 비친다면, 사람들은 당당하고 자기를 존중하며 자기를 실현시키는 사람으로 바뀌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적어도 이 문맥에서 회개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됨을 회복하는 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병과 약함을 고치시는 것은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어둠과 빛의 경계를 이렇게 넘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산상 설교 이후 가버나움에서 백부장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의 종이 중풍 또는 마비증세를 일으켜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이 아주 고관은 아닐지라도 자기 종의 아픔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닐 수 있는데, 그를 위해 직접 예수에게 찾아오기까지 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분의 경계를 넘는 그의 모습에 예수께서는 흔쾌히 그의 청을 들어주시며 가겠노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또 한 번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는 예수와 병의 관계를 자신과 부하의 관계에 비춰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듯 예수께서 말씀하시면 직접 가지 않으셔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예수께서 병과 약함을 고치시는 일을 그도 들었겠지만, 그로부터 병과 예수의 관계를 이렇게 추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로부터 더 충격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십니다. 그에 따르면 하늘나라 잔치에서 많은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을 것이고 그 나라의 본래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울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뒤집히는 일대 변혁적인 사건입니다. 이와 닮은 생각들이 구약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극적으로 이야기된 적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철벽같던 이방과 이스라엘의 경계가 이 사건에서 이렇게 허물어집니다. 경계밖 사람들에게 한없이 오만했던 이스라엘의 처참한 몰락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가지 이유를 우리는 나사렛에서 있었던 그 이후의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예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사야를 인용하여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눅 4장).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라고 또 요셉의 아들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놀랍니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이 아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백부장과는 다른 그들의 이 같은 반응을 보고 이로부터 예상되는 그들의 다음 반응을 말씀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라! 자신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고향 사람들의 예상되는 요구를 예수께서는 사렙다 과부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나아만을 예로 들어 거부하십니다.

가뭄과 흉년으로 고생하던 엘리야 시대에 도움을 받은 과부는 오직 이방인 저 한 사람뿐이었고 엘리사 시대에 나병을 고침 받은 사람은 시리아 사람 나아만 한 사람뿐이었다는 말에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이방인이었을 백부장에게 있었던 일이 그들에게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거부이며, 또 여기에는 그들이 하늘나라 잔치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우울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가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선택된 이스라엘의 몰락과 함께 이방인의 구원은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의 경계에 갇힐 수 있는 분이 아님을 우리는 예수의 이 사건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를 든 나아만 사건은 어떻습니까? 그는 백부장처럼 믿음의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나병을 고칠 수 있었는지요?

나아만은 시리아에서 추앙을 받는 장군인데, 그가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1절).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 시리아를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 자체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님을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 모두의 하나님이셨고 모든 역사의 주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을 때 이스라엘이든 기독교든 하나님을 독점한 것으로 착각하고 스스로를 오해하고 자만하고 오만해집니다.

나아만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그것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아내의 이스라엘 여종으로부터 치유 가능성을 들었을 때 그의 반응이 어떠했을지 넉넉히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당장 달려가 치료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곧 왕의 허락을 받고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이때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와 예물을 보내며 그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침략의 빌미가 아닌가 하는 오해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지만, 엘리사가 나서서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이스라엘 왕에게 말합니다.

엘리사는 그에게 온 나아만에게 사람을 보내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합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직접 오지 않은 것과 다마스커스의 강들보다 못한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는 것에 대해 노여워하고 그의 나라 강들에서 씻어도 낫지 않겠냐 하며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낫기만 한다면 더한 일도 하지 않겠냐고 만류하는 부하들 때문에 나아만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엘리사가 말한 대로 요단강에서 몸을 씻고 깨끗하게 됩니다. 분노와 우월감 때문에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를 만류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분노와 우월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병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가는 자들을 혹시 말릴 사람들이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여하튼 나아만은 이렇게 해서 나병을 고친 사람이 되었고 예수께서 예를 든 몇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경계를 넘어 은총을 베푸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종과 지역에 따라 국경을 만들어내고 성과 신분과 연령과 신체와 지식과 종교 등을 이유로 무수한 사회적 경계들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둘 때 비로소 안심하는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경계를 넘어가시듯 사람들도 경계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방향을 보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방과 자유, 평화와 평등, 정의와 생명을 지향하시며 세상에 대한 사랑을 그 동력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에게 경계가 있다면 그러한 방향을 거부하는 악과의 경계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어놓은 경계 안에 가둘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양 착각을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경계밖에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새 세계를 선물하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경계를 허물고 넘어설 수 있기를 하나님은 촉구하시고 기다리십니다. 경계를 높이 세우면 세울수록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나아만과 사렙다 여인 그리고 백부장처럼 경계밖 사람들은 경계를 허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갖가지 차별과 혐오의 장치들을 만들어내는 어리석음을 멈춰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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