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최봉설을 키운 와룡동실패한 거사 「철혈광복단」의 15만원 탈취사건 ⑴
이이소 | 승인 2022.01.29 16:12
ⓒ이이소

무기를 위하여!

전쟁은 무기이고 무기는 총알이다. 갑오농민군이 우금치에서 대패를 한 것도 무기의 부족과 화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1908년 3차 거병을 하고 삼수와 갑산 그리고 함흥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연전 대승을 거두었던 홍범도가 그 해 가을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도 탄환 부족 때문이었다. 탄환이 부족해서 총을 버려야 할 절박한 상황에 이르자 그는 “약철(총알)이 없어 일병과 쌈도 못하고 일본이 온다면 도망하여 매 본 꿩 숨듯이 죽을 지경으로 고생하다가 할 수 없서 외국 중국 땅 탕해로 10월 9일에 암녹강(압록강)을 건너”(1) 망명을 결정하였다고 그의 일지에 쓰고 있다.

1920년 10월 하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 홍범도와 독립군들이 1921년 초에 러시아 영토로 이주를 하게 된 것은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러시아 혁명군과 협동하여 일본군과 싸우려는 일말의 희망도 없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탄약이 거의 사진(射盡) 되었고 중국내에서는 보충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절망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그와 김좌진이 공동명의로 발표한 흩어진 군사들의 집결을 촉구하는 포고문의 내용에 “노농정부와 약정하여 군수충분하게 또 무기탄약은 제한 없이 무료로 공급받을 것”(2)이라는 표현에서 당시 독립군이 처한 곤궁한 상황과 러시아행의 이유를 알 수 있다.

홍범도는 전쟁이 곧 무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08년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망명한 후에 무기 마련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부두에서 짐꾼으로, 아무르강 유역 암군의 금광 땅꾼으로 일하였으며 추풍 당어재골에서 아편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45세에는 니항의 어장에서 1년간 노동하였으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시기에는 크로바트, 퉁구스크, 비얀코, 얀드리스크 등지의 금광에서 노동하며 모은 돈으로 이만으로 나와 오연발총(17개)과 탄환(17,000개) 등 무기를 구입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라는 국제적 상황에 대응하여 향후의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3) 홍범도 장군의 40대 10년의 행보는 그야말로 독립전쟁에 필요한 무기 마련을 위한 고뇌와 피눈물로 점철되어 있다.

홍범도처럼 무기 없이 전쟁 없고 전쟁 없이 독립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열혈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저항 비폭력의 만세 시위로 친구들이 죽고 부상을 당하는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현실을 목도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자 했던 독립청원이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짓밟히는 약소국 국민의 비애와 절망을 깊이 맛보았다.

게다가 3·1운동의 결과로 민족의 염원 속에서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하고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재출범을 선언하는 등의 일로 북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이 표류하고 있었다. 이 때 조국의 독립을 원하는 청년들의 가슴은 화산처럼 뜨거웠고 의기는 하늘을 찔렀지만 그들에게는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파리강화회의의 종료와 함께 독립의 문이 영원히 닫힌 것 같은 상황에서 한없이 절망하며 분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젊음을 독립운동의 제단에 받치기로 결의하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기 위해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와룡동 그리고 와룡동교회와 창동(昌東)학교

북간도의 독립운동 유적지 중에 연길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은 연길 중심지에서 애단로를 따라 동쪽으로 십리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소영자의 길동기독학당의 후신인 광성학교 옛터와 연길시에서 서북쪽으로 십여 리 남짓에 있는 와룡동의 옛 창동학교 터와 15만원 탈취의 거사의 도모지인 최봉설의 집이 있다.

독립운동 유적지를 혼자 찾아다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조선족 형제들의 도움을 자주 받았다. 그 분들의 도움으로 조금 익숙해지면 혼자서 탐방을 시도하였고 그런 덕분에 머무는 곳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와룡동에 여러 번 다녀왔다. 와룡동을 자주 찾아다닌 것은 그곳에 1907년에 세워진 와룡동교회와 창동학교 그리고 최봉설의 생가 유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와룡동은 지금도 그다지 개발되지 않은 산 아래에 길게 늘어진 마을이다. 상발원에서 하차하여 북쪽으로 개울을 따라 20여분 걸으며 민흥촌 제3, 4촌민소조마을을 지나게 되고 마지막에 길이 하얀 고층 건물에 의하여 막히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원래의 와룡동 터이다.

와룡동은 1860년대 북관에 연이어 있었던 자연재해로 말미암은 대기근과 조선 관료의 가혹한 수탈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도망쳐 나온 조선 상민과 천민들의 피난처였다. 그들은 엄한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하여 무인지대, 원시림이 무성한 간도의 산골짜기로 숨어들어와 화전을 일구었다. 그 시기에 함경북도 회령의 농민인 최종석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와룡동 골짜기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최초의 개척자가 되었다.(4) 그는 15만원 탈취사건으로 알려진 최봉설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5) 1869년 기사년에 대흉년으로 이주민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왔고 사람들은 마을 서쪽 산이 마치 용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여 와룡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6) 1883년에 이르러 와룡동은 80여세대가 사는 마을이 되었다.

1902년에 캐나다장로교의 선교사 그리어슨와 조사 홍순국이 북간도에 다녀간 뒤, 1906년에 용정시교회를 세웠고 이어서 양무정자교회와 광제암교회를 설립하였다. 1907년에는 남감리회의 선교사 하디와 이화춘이 와룡동교회를, 이응현과 이병춘이 모아산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두 교회는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지역 분할에 의하여 캐나다장로교로 소속으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북간도 최초의 용정 상주 전도사인 김계안의 보살핌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2년 용정에 선교부를 세우기로 결정한 이후로 와룡동교회는 선교사 부두일(W. R. Footel)과 목사 김영제의 섬김과 지도를 받았다.(7)

교회의 처음 위치는 마을 초입 서쪽 기슭에 있는 1935년 9월 12일에 졸업생 200여 명이 선생님들을 기념하여 세운 「사은기념비」에서 멀리 마주 보는 언덕에 있었으나 경신대학살 후에 「사은기념비」 아래 마을 길 앞 평지에 길게 자리 잡은 창동학교 뒤편 북쪽 평지로 이전하여 재건축 되었다.(8)

와룡동교회는 3.13용정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과 와룡동 출신 최익선이 순국한 것, 일제가 조사한 항일 선인 마을에 포함된 점, 경신년에 토벌을 당한 점(9) 국민회 지회가 세워진 점,(10) 그리고 창동학교 교사 면면을 보면 캐나다장로교의 지도급 인사들과 국민회 회원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 손엔 성경을 들고 한 손엔 조국독립의 기치를 높이든 교회였음이 분명하다. 정기영, 정기선, 오상근, 이병휘, 남성우, 신홍남, 김종만, 홍우만, 이진호, 김이택, 송창희, 서성권, 문경이 그러하였고 「철혈광복단」의 최봉설, 한상호, 임국정이 그러하였다.

창동(昌東)학교는 1908년 4월(11)에 남성우, 이병희, 오상근 등이 와룡동 주민 최병균(최봉설 부친), 최종환, 최병규, 오상인, 김성옥, 정지형, 지병학, 라시영, 전윤민, 정종현, 오관준, 한영운(한상호 부친) 등 12명의 학교후원회원과 함께 소학교로 세웠다. 창동(昌東)에는 동쪽 조선의 창성을 염원하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1912년에는 중학부를 증설하고 이름을 창동(昌東)학원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원장은 오상근, 부원장은 이병휘와 남성우가 맡았고 교사로는 신홍남을 비롯한 7명이 있었으며 중학부 학생은 80여 명에 이르렀다. 북간도 각지와 남, 북만과 연해주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있었으며 학생들은 다 기숙사에 입사하였고 일체 학비는 학교 후원회에서 부담하였다.(12)

당시 학교에 설치한 학과목은 성경, 수신, 국어, 한문, 내외역사, 내외지리, 외국어, 산술, 대수, 기하, 생리, 식물, 동물, 물리, 화학, 법제, 경제, 창가, 체조 등 28개 과목들이 있었다.(13) 창동학원의 지도자들과 교사들은 민족문화와 역사를 가르쳤으며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 중학부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을 위하여 군사훈련과를 설치하여 항일투사들을 양성하였으며 1925년에는 중학부를 졸업한 학생들이 200여 명이 훨씬 넘었다. 학생들 가운데는 1915년과 16년에 왕청현 라자구 동림무관학교(라자구사관학교)에 가서 계속 군사 훈련을 받은 자들이 있었고(14) 최봉설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16년에 라자구에 가서 8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15)

1919년 3월 13일, 19년 동안 숨죽이고 살았던 3만여 북간도 간민들이 용정 서전대야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통하여 독립에의 열기를 마음껏 발산하였다. 와룡동에서도 교인들과 창동학교 전체 교사들과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하였다. 시위행진의 대오를 앞장서서 지휘하는 중에 총탄에 맞아 순국한 박문호는 창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전임 교사였고(16) 역시 순국한 최익선은 와룡동 출신으로 창동학원의 현직 교사였다.(17) 최봉설 등 많은 창동학교의 교원과 학생 및 졸업생들은 ⌜철혈광복단⌟에 혈서를 쓰고 가입하여 3.13 만세시위에 앞장을 섰으나 일제와 맹부덕 부대의 발포로 말미암아 유혈사태가 발생하여 19명(18)이 순식간에 희생당하고 40여명이 중경상을 입으며 94명이 체포를 당하는 피비린내 나는 현실을 목도하였다.

만세시위가 끝나고 간도 조선인 사회는 공포와 흥분, 절망과 비탄에 잠겼다. 모두들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변화를 갈망하였다.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무력은 무력으로 싸워 이겨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독립 운동가들과 청년들은 독립전쟁을 염두에 두고 미친 듯이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결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전쟁을 수행에 필요한 군자금 모금에 의논이 분분하였다. 그리하여 3월 13일 직후부터 30여개나 되는 많은 무장독립우동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다. 창동학원에 ❰간도국민회❱의 외곽단체인 창동학교 교사인 서성권을 회장으로 하는 ❰간도대한청년회❱는 본부가 세워졌고(19) 와룡동교회가 국민회 지회가 됨으로 신도들은 자연스럽게 국민회 지회 회원이 되었으며 정기영과 정기선은 연락부의 주요성원이 되었다.

미주

(미주 1) 반병률, 「홍범도 장군」 (한울 아카데미, 2019), 117.
(미주 2) 같은 책, 174.
(미주 3) 같은 책, 247.
(미주 4) 김택·김해진, 『연변문사자료 제5집 교육사료전집』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88), 24.
(미주 5)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2), 51.
(미주 6) 김호림,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글누림, 2013), 171.
(미주 7)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381, 382.
(미주 8) 김호림,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글누림, 2013), 175; 2019년 10월 방문 시, 마을주민 공씨의 증언을 직접 들었다. 그 분이 처음 터와 마지막 터를 알려주었는데 두 번째 교회 터의 위치는 김호림의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175에 나오는 장소와 일치하였다.
(미주 9)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57.
(미주 10) 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184, 185.
(미주 11) 허청선·강영덕,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1』 (연변교육출판사, 2000), 468; 1907년 4월 설립설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52를 참조하라.
(미주 12) 김택·김해진, 『연변문사자료 제5집 교육사료전집』, 26.
(미주 13)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52.
(미주 14) 김택·김해진, 『연변문사자료 제5집 교육사료전집』, 27.
(미주 15) 최삼룡, 『승리의 기록』 (연변인민출판사, 2015), 54.
(미주 16)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55.
(미주 17) 앞의 책, 163.
(미주 18)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년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94.현장에서 순국한 분은 10인으로 박상진·정시익·공덕흡·갬태균·김승록·현봉률·리균필·박문호·김흥식·장학관이고, 제창병원에서 순국한 분들은 4명으로 최익선·현상로·리유주·차정룡 등이며, 장례식 후에 순국하신 분은 5명으로 김병영·채창헌·김종묵·원용서, 허준언 등이다.
(미주 19)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56.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이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