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피고소인의 자리에 앉으시다변론하시는 하나님(미가 6:6-8)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1.30 13:53
▲ 하나님은 친히 고소 받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Getty Image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오늘은 주현절 넷째 주일이자 설 주일입니다. 교단 교회력 성서일과에 따른 이번 주일 말씀은 미가 6장 1-8절, 시편 111편, 마태복음 7장 13-23절, 야고보서 1장 16-27절 말씀입니다. 이번 주일 본문들은 설 주일보다는 주현절에 맞춰서 선정된 본문들로 보입니다. 미가의 본문은 저희가 오늘 살펴보겠지만, 시편 111편은 높으신 하나님께서 사람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시며 그 은혜를 베푸시고 정의를 세우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야고보서의 경우는 믿음보다는 실천을 강조하는 편지입니다. 유명한 구절은 야고보서 2장 17절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의 본문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율법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주현절 기간 동안 계속 말씀드리고 있지만, 주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이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며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던 삶을 기억하면서 그 삶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다짐하며 노력하는 기간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력에 나타난 본문들은 율법에 관한 본문이거나 말씀을 준행하는 삶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한 직접적인 말씀은 계속해서 전해드리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미가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조금 특이할 수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점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우선 저희가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미가 1장을 보면, 그는 남왕국 유다의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북왕국 수도인 사마리아의 죄와 남왕국 수도인 예루살렘의 죄를 경고합니다.

미가가 정확하게 몇 년도부터 몇 년도까지 예언 활동을 펼쳤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의 예언들을 살펴보면 대략 히스기야가 남왕국 유다를 통치하던 시절,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되었던 시절에 활동했던 예언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북왕국 이스라엘은 붕괴된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되었고, 북왕국을 점령한 아시리아의 위협은 남왕국 유다에까지 미쳤습니다. 즉 국가의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미가는 예언을 선포했습니다.

6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선포하십니다. 산과 언덕 앞에서 변론을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곳은 재판장이 됩니다. 판관 또는 배심원 역할은 산과 언덕이 맡게 됩니다. 보통 예언자들은 회개를 촉구하기 때문에 피고석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앉게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그 생각이 뒤집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피고인의 자리에 앉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변호하시겠다고 이야기합니다.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고, 무엇으로 너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기서 ‘괴롭게 하였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라아(לאה)’로 ‘지치게 하다’, ‘피곤케 하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개역 성경에서 ‘곤비케 하다’라는 말로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신이 자신을 믿는 신도들에게 자기변호를 한다는 사실 자체도 이상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신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이상해 보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내가 언제 너희를 힘들게 만들었냐고 신도들에게 되묻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던진 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종노릇 하던 때에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셨고, 후일 모압 왕 발락과의 다툼을 도우셨고,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은 출애굽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고, 5절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 정착이 완료될 때의 이야기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셨고 지키셨다는 이야기로 자신을 변호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자기변호를 하실 수밖에 없던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합니다. 남왕국 유다는 멸망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국제 정세로 보았을 때,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아시리아를 섬겼다는 점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히스기야 시절에도 아시리아에 의한 압박은 심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계속 믿으려 했을까요? 고대 사회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긴 나라의 신이 더 강한 신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신, 자신들을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끌지 못한 신을 사람들이 믿으려 했을까요?

아시리아가 자신의 속국에 자신들의 신을 섬기도록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신을 섬겼다면,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었던 하나님보다 더 강한 신, 하나님은 자신들을 위협에서 건져주지 못했지만 아시리아의 신들은 자신들을 도우리라 믿으며 우상을 섬겼을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멀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변호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시며 이끄신 하나님이라는 점을 호소하실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보면 신으로서의 권위도 상실했고, 지금의 도움이 아닌 과거의 도움밖에 말할 수 없는 무능한 신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하나님의 자기변호는 6절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전환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6절 이후의 본문에서 이제 ‘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8절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아담, אד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미가의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모든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1-5절까지의 본문과 6절 이하의 본문은 다른 이야기라고 말합니다만, 1-5절과 6절 이하의 본문이 연결되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갑작스런 전환은 하나님의 자기 변론으로 인해 사람들이 회개하였고, 이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소예언서의 첫 번째 책인 호세아를 보면 변론한다는 말과 회개, 돌아옴이라는 말이 함께 붙어서 나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변론은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미가에서도 변론이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의 변론도 이스라엘의 회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자신을 변호할 수밖에 없는 신, 자신을 섬기는 이들을 지킬 수 없는 신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그 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올바르게 섬겼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나님의 자기변호가 가능합니다.

6-7절에 나타난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고발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왔는지에 대한 고발의 문구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번제물의 양과 질에 달려 있었습니다. 일년 된 송아지, 천천의 숫양,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이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었습니다.

4-5절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변론이었다면, 6-7절은 이스라엘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고발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이스라엘의 몰이해에 대한 고발이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있지 않았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이 무엇인지를 이미 가르치셨다고 말하며 8절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행하고, 자애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9절 이후에는 이것을 알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불의와 강포가 가득하였고, 하나님의 법도가 아닌 사람의 법도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기변호는 하나님을 무능하게 보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잘못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장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그리 하셨던 것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을 지키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의 길에 들어섰다는 고발이 됩니다.

설 명절을 앞두고 기분 좋은 내용의 말씀을 전해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한 잘못과 그에 따른 심판의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죄에 대한 고발과 심판의 이야기 뒤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8절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세 가지라고 말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일, 자애를 사랑하는 일,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잊지 말고 그 뜻을 날마다 되새기며 행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품고 기억하기를 쉬지 않는 일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의를 행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정의를 펼치시는 분이기에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인자라고 번역되었는데, 번역의 문제는 없습니다만, ‘인자’라고 하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표현이 떠오르기 때문에 자애라고 바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인자(人子)가 아니라 ‘인자하다’라고 할 때 인자(仁慈)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헤세드(חס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애로우신 분이기에 우리도 그러한 마음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변호를 하신 점은 뒤따르는 이스라엘의 죄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생각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무능하기에 자기변호를 할 수밖에 없는 신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기에 자신이 먼저 낮아져서 손 내미는 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번 설 명절에 이런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라고, 하나님의 이러한 자애를 느끼시며 또 가족들에게 전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또 나만의 정의를 말하는 명절이 아니라 모두의 사랑 속에서 서로를 생각하며 정의를 찾아가고 펼쳐가는 명절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