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누가 복음을 부끄럽게 만드는가복음이 부끄럽지 않다(호세아 14:1-4; 로마서 1:16-17)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2.03 15:26
▲ Cody Miller, 「Gomer and Hosea」 ⓒGetty Image

호세아는 가장 이른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예언자의 출현이란 사실상 역사의 아픔이고 희망이기도 합니다. 현실 비판이 예언자들이 선포한 예언의 기본적인 내용이지만, 고발된 현실의 극복이라는 희망이 없는 예언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예언자들이 활동했던 시대는 정의가 실종된 만큼 고통스럽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억압적인 권력과 짓밟힌 민중의 사회구조는 바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이 짙어지는 시대를 향해 예언자들의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예언자들이 없는 시대는 그러면 평화의 시대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마저 침묵할 수밖에 없는 시대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또는 예언자들이 남긴 성서의 문서들 때문에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직접 예언자를 보낼 이유가 없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언자의 임무는 하나님을 믿고 성서를 읽는 독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받들고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요구됩니다.

현재는 과연 어떤 시대인지요? 예언자들의 활동이 없어도 되는 평화로운 시대인가요? 그런 시대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향한 예언자들의 말씀이 어떻게 선포되는지요?

호세아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의와 폭력에게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호세아의 결혼과 그 자녀들에게 지어주신 이름을 통해 그 분노를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주문하셨고, 그 사이에서 낳은 첫째의 이름을 이즈르엘, 둘째의 이름을 로루하마, 셋째의 이름을 로암미로 지어주셨습니다.

고멜과의 결혼은 이스라엘의 현재가 음란함을 알리는 상징이었고, 첫째의 이름 ‘이즈르엘’은 그 땅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의 폭력과 그에 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불쌍히 여겨지지 않는다는 둘째의 이름 ‘로루하마’는 심판당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으로 고통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는 셋째의 이름 ‘로암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음을 의미합니다.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의 백성이 되었던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에게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시니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호세아의 아내와 자녀들의 이름은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과 심판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를 호세아와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호세아는 구원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가족들의 이름은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버림받게 되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멜과의 결혼은 예언자 개인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하나님의 요구였겠지만, 호세아는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과연 그렇게 이스라엘과의 역사를 끝내실런지요? 과거 홍수 때를 잠시 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그가 지으신 사람들의 죄와 폭력으로 더럽혀지자 이를 후회하시고 마음 아파하시며 인간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시고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가족들을 살리셨고 홍수 후에는 악을 꾀하는 인간의 경향이 변하지 않음을 아시고도 그 인간들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결심 때문에 사람은 악을 떠나지 못함에도 세상에 존속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이스라엘에서도 반복될까요? 하나님은 호세아의 자녀들의 이름이 후에 이즈르엘, 루하마, 암미로 바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즈르엘은 바뀌지 않으나 내용이 바뀝니다. 이즈르엘은 본래 기름진 땅의 대명사였는데 그 모습을 가리키는 이즈르엘이 될 것입니다. 로루하마는 불쌍히 여겨지다는 루하마가 되고, 로암미는 내 백성이라는 암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이 생기지 않는지요? 고멜은 어떻게 될까요?

온전하다는 뜻의 고멜이라는 이름이 다시 언급되지는 않지만, 오늘의 본문은 그에 대해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너의 하나님께 돌아와 본문에 있는 것처럼 고백하면 반역하는 병을 고쳐주고 기꺼이 사랑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분노를 거두시고 이스라엘의 음란, 곧 반역의 병을 고쳐 온전하다는 그의 이름대로 온전하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에게 돌아온 이스라엘은 강대국과 군사력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것입니다. 이것은 위기 때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힘에 의존하는 정치와 권력은 언제 어디서나 불평등과 억압과 불공정을 초래할 것입니다. 정치와 권력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다윗에 대한 평가가 시사하는 대로(삼하 8,15) 강제와 억압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며 정의와 공의로 평화사회를 수립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만든 우상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는 것은 한 분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깨닫고 그를 경외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상은 탐욕의 형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골 3,5; 엡 5,5). 곧 자신의 탐욕을 신으로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신은 자신의 탐욕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상이 만들어지고 그 우상이 숭배되고 탐욕이 충족됩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은 탐욕의 자리에 사랑이 있게 합니다. 사랑은 악을 멀리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는 대신 자신의 것을 나눕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게 하며 이즈르엘 곧 이스라엘을 풍요롭게 하실 것입니다. 독점과 차별을 거부하고 평등한 세상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들을 더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의심과 불안과 탐욕 때문에 이 순서를 바꾸고 우상을 만듭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이 뜻과 그 길을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뜻을 모든 사람의 것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복음을 부끄러워 할 것이 있겠습니까? 죄 곧 사람을 사람 되지 못하게 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신 하나님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 복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다 털어버리지 못한 탐욕 때문에 복음조차도 차별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지만, 복음은 그러한 시도들을 부정하고 사랑을 일깨웁니다. 이런데도 복음이 부끄럽습니까?

교회가 복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경우들이 많을지라도 복음은 우리를 탐욕과 불의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랑의 불길을 따라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의인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바로 이 믿음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나지 않을 때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를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자기를 드러낼 때 우리는 복음을 당당하게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교회가 부끄러운 것이 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사랑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삶이 우리 앞에 펼쳐지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상기 목사(백합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