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사진 왼쪽)와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사진 오른쪽)

영지주의자들과 성서

이상의 고찰을 고려하여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은 명백히 정경에 속하는 문헌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성서로 받아들였으며, 최초로 주석 작업을 시도한 자였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가톨릭교회에 의해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 그 이상의 복음서들을 가지고 있었다. 나그함마디의 책들은 모두 정경복음서가 아니었다. 심지어 거기에는 『아담의 묵시록』, 『셈의 석의』, 『셋의 세 가지 석판들』, 『멜기세덱』과 같은 구약의 인물들의 이름으로 작성된 경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마르시온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그들이 구약 전통을 악한 것으로 거절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플라톤의 공화국』, 『조스트리아노스』(조로아스터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음), 『섹투스의 문장론』 등과 같은 이방인의 문헌까지 속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영지주의가 다양한 전승들을 폭넓게 수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경>과 정경

영지주의자들은 성서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렇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경은 없었다. 혹 정경(canon)이 있었을 지라도 <정경>(Canon)은 없었다. 정경과 <정경>을 구분되어야 한다. 정경은 일종의 마음의 기준이며 그가 받은 전통으로 말미암아 그 외 여타 경전에 대해서 수위를 차지하는 해석의 중심이 되는 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경>은 배타적이다. 그것은 패쇄적인 것이며 다른 것을 거절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마르시온을 제외한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은 정경을 소유하고 있었나 다른 경전들에 대해서도 매우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고정된 경전에 집착하지 않고”, “끊임없는 심사와 수정”을 거쳤다.(2)

심지어는 경전(복음서)을 창작하는 위치에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정경에서 신학이 나온 것이 아니라 신학에 따라서 정경이 선택되고 창작될 수 있는 신학적 자유가 있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정경에 대한 태도는 “고정되고 폐쇄된 경전을 주장하는 교회의 입장”(3)이나 마르시온의 입장과 대조적인 것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의 공헌

2세기 기독교 영지주의는 기독교 역사와 성서 해석사에 있어서 다음의 세 가지의 주된 공헌을 했다: ① 영지주의는 가톨릭에게 신약성서를 알레고리화하는 것을 가르쳤다. ② 영지주의자들은 가톨릭에게 기독교 종말론을 전환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③ 영지주의는 우리가 <주석>(Commentary)이라고 부르는 성서 석의의 형태를 창출했다.(4)

알레고리적 해석학

성서 해석사에 있어서 영지주의의 가장 중요하고 항구적인 공적은 신약성서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도입이다. 알레고리적 해석의 특징은 “역사성을 부인하거나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위해서 역사성을 무시”하는 것이다.(5) 그러므로 알레고리적 해석은 <역사성>과 <의미>의 딜레마에서 역사성보다는 의미를 중시하는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텍스트>나 <저자>의 의미를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독자>의 의미를 중시한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알레고리적 해석학은 독자중심의 읽기방식이 된다.

해석학, 수용미학과 영지주의

지난 세기에 이루어진 해석학(Hermeneutik)과 문예학(Literaturwissenschaft)의 발전은 영지주의자들의 성서해석학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과거의 해석학에서는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해석학의 임무였다. 이 시기의 해석학들은 <저자> 중심의 해석학이며 독자는 그야말로 <발아래 앉아서> 들을 뿐이다.

그러나 가다머(H.-G. Gadamer)에 의해서 제시된 <지평융합>(the fusion of horizons)(6)의 개념은 독자에게 보다 많은 권리를 부여해 주었다. 적어도 그는 저자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의 융합을 주장하므로 독자의 권리의 많은 부분을 복권시켰다. 가다머의 해석학을 문예학에 적용시키고 발전시킨 야우쓰(H. R. Jauß)의 <수용미학>(Rezeptionsästhetik)은 텍스트의 존재론을 저자와 독자의 상호과정에 종속시킴으로서 독자의 권리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7)

이런 독자 중심의 해석학은 영지주의자들이 시도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현대적인 발전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행해졌던 대부분의 비판인 영지주의의 <혼합>과 <절충>은 지평융합과 독자중심의 성서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를 불교적 용어를 수용해서 <회통>(會通)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실존론적-인간학적 해석학

영지주의의 성서해석학의 두 번째 특징은 실존론적-인간학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종교철학과 영지주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존재해석의 차이, 곧 우주론의 차이이다. 묵시문학이 희랍의 공간적 우주이해에 시간의 차원을 가져왔다면 영지주의는 우주해석에 인간학적 개념을 도입시켰다.

요나스는 영지주의자들을 우주이해의 충격을 경험한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근대의 신죽음의 현상을 영지주의에 접목시키면서 그 당시 영지주의는 <코스모스의 신이 죽었다>는 “최상의 가치가 탈가치화 되는” 가치전도를 경험했다고 추론하는 것이다.(8)

신화적 해석학

그러나 필자는 영지주의자들의 <알레고리적 해석학>보다는 <신화적 해석학>이 보다 영지주의자들의 사태에 부합하며 중심적인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영지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신화학자들 혹은 신화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에게 성서는 다른 고대의 신화와 같이 하나의 신화적 저작일 뿐이었다.

필자는 이 사실이 영지주의자들의 성서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지평>은 신화였다. 그들은 성서를 신화적인 문서로 간주했으며 그들의 ‘신화-만들기(myth-making)’의 자료로 이용했다. 영지주의자들은 현대인들과 같이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이 믿어지지 않아 고뇌할 필요가 없다. 신화적 세계관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걸림돌은 <역사>였다. 이점이 가톨릭과 영지주의가 교리문제 뿐 아니라 성서해석의 문제에 대해서도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그들도 역시 이야기 신학자들이었다. 다만 그들이 관심을 가졌던 이야기는 신과 인간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의 질문은 더 깊고 근본적인 것이었다. 오늘을 있게 한 역사적인 원인이 아니라 오늘을 있게 한 더 근원적인 원인, 신들과 우주의 역사에 그들은 관심을 가졌었다. 이 지식은 역사적 저작에서 글로 기록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랜 <비밀>(μυστηριον)이었다. 그들은 이 신비의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가장 사랑했던 본문은 구약성서의 『창세기』 1~3장과 『요한복음서』 서문이었다. 이는 고대 동방의 신화들이나, 인도의 신화들, 그리고 그리스의 신들의 탄생 이야기들과 비견될 수 있는 신화론적인 걸작이다. 바실리데스의 356개의 하늘의 광대한 상상력과 발렌티누스의 장엄한 체계는 그들의 전망이 얼마나 깊고 탁월했는지를 반증해준다.

비신화화 아닌 재신화화의 요청

영지주의자들의 신화와 계보를 이해하기 위해서 현대적인 <신화학>(Mythology)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신화>의 문제는 불트만의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 논의와 더불어 지난 세기의 성서해석의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었다.(9) 불트만의 시대에 <신화>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었다면 오늘날의 신화학에서는 신화는 인간실존의 대한 신성한 이야기로 호평 받고 있다. 그러므로 <재-신화화>(Rück-mythologisierung)가 요청되는 오늘날에는 영지주의 신화를 이해하는 것은 결정적인 일이다. 오늘날에는 성서에서 <신화>를 읽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영지주의에 대한 재해석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 영지주의자들과 그들의 성서해석을 살펴보았다. 필자의 입장은 그들이 사도적 전승을 이어받은 진지한 기독교인이고, 성서를 수용하고 해석한 성서해석자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들은 알레고리적 해석이라는 필로의 구약성서해석방법을 최초로 신약에 적용하였고 가톨릭에게 그것은 변형된 상태로 수용되었다. 반면 그들의 구·신약성서에 대한 신화적 해석은 교회에 의해서 거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해석은 오늘날 신화학의 부흥과 더불어 재평가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김재현(계명대)  verticalk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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