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담, 「물속에서 스무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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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이 자기가 당한 물고문을 형상화하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작품을 통해 자신이 겪은 고문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만이 자신이 받은 상처, 심문관의 파괴된 인간성을 치유하는 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까지 우리가 본 ‘물속에서의 스무날’ 연작과 작품 ‘반가사유’이다.

홍성담은 3년 동안의 수감생활 후, 1992년에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간수들은 그에게서 붓과 물감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의 변호사가 그에게 연필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보호 아래 밤이면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이 그림들은 책에 끼워져 몰래 감옥 밖으로 빠져 나갔다.

홍성담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고조되었다. 1987년에는 독일에서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민중판화전이 열렸고, 1988년에는 독일 마르부르크의 헨케 갤러리에서 홍성담 판화전이, 1990년에는 양심수를 위한 함부르크 재단과 미국 로스앤젤레스 홍성담 구명위원회가 그의 판화전을 열었다. 1996년에는 영국 글래스고우 국립현대미술과 개관기념전에 초대받았고, 1998년 엠네스티 영국 런던 지부에서는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판화전을 조직했다.

그러나 홍성담 자신은 초대전에 정작 가지 못했다. 1992년에 석방되었지만 1998년에 이르러서야 여권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1)

홍성담이 자유로운만큼 한국 사회도 그 사이 민주화되었다. 광주민중항쟁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보상과 배상도 이루어졌다. 정보부와 비밀경찰에 의해 의문사당한 사람들의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조직되었다. 인권침해를 막기 위한 국가인권위원회, 민주화 기념사업회도 조직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정권도 바뀌었다.

이로써 고문당한 홍성담의 상처와 고문한 가해자의 파괴된 인간성도 치유되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진상이 규명되고 보상과 배상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엄밀한 의미에서 이미 일어난 불의는 원상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살해당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우리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맞은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고, 우리는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2)

그러므로 ‘상처받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당한 불의와 다른 사람이 저지른 죄를 복수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 아닐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 아닐까?’라고 몰트만은 반문하면서, “복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화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화해는 굴종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다.(3)

그렇다. 불의는 보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정의와 질서가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체제와 구조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불의를 당하면 자존심은 상처를 받고, 상처받은 자존심은 복수를 통해 치유 받고, 또 굴욕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복수를 하지 못할 경우 피해자는 병들게 된다.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용기 없는 자신을 증오하거나,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법체제를 원망하면서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만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한 불의에 대한 복수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의무의 문제인 것이다.(4) 이런 의미에서 몰트만은 ‘자신이 받은 고통을 삼키면서 극복하는 소인배보다 복수의 용기가 있고, 또 보복의 의지를 보여주는 사람이 훨씬 강하고 위대하다’고 말한다.(5)

홍성담은 저항했다. 그 저항의 힘을 그는 명상에서 찾는다. 그래서 2003년 10월 뉴욕의 퀸스 미술관(Queens Museum of Art)에서 열린 전시회, ‘동쪽의 물결’ 전에서 홍성담은 자신의 전시회를 ‘저항과 명상’으로 이름 붙였다.(6) 나는 홍성담이 어떻게, 어떤 명상을 통해 저항의 힘을 얻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해자와 화해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인도 아닌 것 같다. 그가 명상을 통해 저항의 힘, 화해의 힘을 얻었다면, 그것은 저항과 화해가 단순히 인간적 가능성만이 아니라, 어떤 신적 가능성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사법제도가 구속력 있는 화해를 제도적으로 보장해 줄 수는 있다. 여기서 화해는 갈등의 반대개념이고, 그러므로 갈등의 해소가 화해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나와의 직접적인 갈등의 영역에서 비켜나 있는 이들은 화해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더구나 생태계와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필연적이 된 자연과의 화해, 미래 세대와의 화해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인간 사이의 화해를 신과 사람 사이의 화해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성서는 갈등의 직접적인 대상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희생자들에 대한 인간의 ‘무한책임’을 부각시킨다. ‘무한책임’이란 ‘내가 한 것을 넘어선 책임성’을 의미한다.(7) ‘무한책임’은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태도를 말한다.

그렇다면 ‘무한책임’의 근거는 무엇인가?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존재의 자기 목적성’, 곧 ‘생명’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생명의 비존재에 대한 존재의 명백한 대결, 즉 비존재에 대한 거부이며 생명의 긍정이기 때문에 한스 요나스는 책임을 존재하는 것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모두를 포괄하는 존재론적 당위로 이해한다.(8) 갈등의 현실 가운데서 화해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꼭 신을 전제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보이지 않는 타자와 자연을 위해 무한책임을 지는 행위는 생명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홍성담은 생명의 근원인 물에 대한, 고향에 대한 기억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물의 현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로서의 물고문을 이길 수 있었다. 기억은 가해자를 회개에로 촉구하고, 피해자를 분열시키면서도 치유한다. 모든 기억이 치유적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파괴적 기억도 있다. 그러나 자기초월적 기억도 있다. 이 기억은 개인적 고난의 경험을 시대의 경험으로 볼 수 있도록 지평을 넓혀주는 집단적 기억이며, 억압의 기재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변혁적 기억이다.

나는 홍성담을 치유한 기억은 바로 자기초월적 기억이었다고 생각한다. 물에 대한 기억, 생명의 근원에 대한 긍정이 홍성담을 치유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물속에서의 스무날’ 연작이 가해자들을 회개에 이르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희생자가 변했다는 것, 희생자가 가해자에 대하여 가졌던 관계가 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여성주의자(Womanist) 앨리스 워커(Alice Walker)는 이렇게 노래했다(9):

그들이 당신 어머니를 고문할 때
나무를 심으세요
그들이 당신 아버지를 고문할 때
나무를 심으세요
그들이 당신의 형제
자매를 고문할 때
나무를 심으세요
그들이 당신의 지도자와
연인을 암살할 때
나무를 심으세요
그들이 당신을 너무 고문해
말도 할 수 없을 때
나무를 심으세요

그들이 나무를
고문하기 시작하고
나무가 이룬 숲을
베어내면
또다시 시작하세요

인간에게 가해진 고문, 폭력, 강탈은 가해자에게 보복됨으로써, 가해자를 제거함으로써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심는 행위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 생명은 죽음보다 강하고, 역사보다 길고, 삶보다 크기 때문이다. 화해는 과거에서부터, 과거와 함께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화해는 전적으로 새로운 미래에서부터, 미래와 함께 시작된다. 폭력은 보다 큰 폭력에 의해 확보되는 우월성이 아니라, 희생자의 도덕적 우월성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 이런 도덕적 우월성은 원수의 종말이 아니라, 증오의 종말을 지향하는 실제적인 원수사랑의 실천자에 의해서만 확보된다.(10)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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