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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인을 꿈꾸던 형숙 씨, 어쩌다가 ‘비’뚤어진 장애인이 되었을까나쁜 장애인, 이형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를 만났다 ⑴
정리연 | 승인 2022.02.13 15:37
▲ 이형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여성 장애인으로 두 아이를 양육하며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정리연

‘앗, 불길해’

안고 있던 아이의 몸이 축 늘어지는 순간, 엄니는 직감했다. 두 팔 위에서 아이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널브러지더니, 이내 딱딱해졌다.

두 시간 전, 밤 열 시쯤이었을 거다. 잠을 자던 아이가 갑자기 깨어나 울기 시작했다. 이마와 몸이 뜨거웠다. 낮에 잘 놀고 밥도 잘 먹었기에 단순한 열감기거나 체했으려니 했다. 엄니는 아이를 업고 동네 한의원에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기척이 없었다. 다른 두 곳도 마찬가지였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가보지는 않았지만, 근처에 양의원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길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작정 달렸다. 두 팔에 안긴 작은 불덩이는 식을 것 같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다.

“계시오!! 문 좀 열어 주소!! 여보시오!!”

‘여기가 마지막이야, 더는 갈 데도 없어’ 절박한 마음은 두려움이 되었다. 쾅쾅! 숨이 차올라 정신없이 뛰는 심장박동처럼 문을 두드리는 엄니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 문이 열렸다. 의사는 아이의 열을 재더니

“40도가 넘네요. 열을 내려야겠어요.” 하더니 아이 몸에 주사를 한 방 놨다.

잠시 후, 아이의 몸에서 불덩이가 식었다. 그리고 아이의 몸은 차디찬 돌덩이가 되었다. 형숙이가 세 살 때였다.

가족, 물빛 멍을 주고받는 사이

제가 자라면서 엄마가 자주 했던 말씀이 있어요. “건강하게 태어났는데 이런 병에 걸린 것도, 하필 동네 한의원에 사람이 없어서 돌팔이 의사 만난 것도 다 팔자다.” 소아마비 접종도 다 했는데, 이 병에 걸렸으니까요. 고열을 천천히 내렸으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봤어요. 한의원에서는 아마 그렇게 했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인제 와서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초월한 듯한 그 마음을 조금도 가늠할 수 없었다. 혹시 어머니는 딸이 장애인이 된 것에 대한 죄책감은 있었을까? 지금은 몰라도 예전에는 자식이 잘못되면 무조건 ‘내 탓’이라고 하던 시대니까.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그녀, 원망과 상처는 없었을까?

엄마가 이것저것 좋다는 약은 다 썼대요. 근데 이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말초 신경들을 마비시키니까 운동 신경도 마비되는 거죠. 그때부터 6~7살 때까지 누워만 있었대요. 혼자 못 움직이니까. 엎어놓으면 온종일 혼자 엎어져 있고 앉지도 못하고요. 제 기억으로는 일곱 살인가, 여덟 살 때 겨우 벽에 기대고 앉을 수 있게 되었어요. 몸이 좀 성장이 하니까 조금 힘이 좀 생겼었나 봐요.

그런데 성장하면서 가정사가 바뀔 수밖에 없어요. 지금 시대에도 가정 안에서 발달장애가 생기면 이혼하는 부부가 많아요. 우리나라 남성들이 집안에 이렇게 아픈 사람이 있으면 집에 잘 안 들어와요. 밖으로 돌아다니고 바람을 피우기도 하죠. 그때, 저희 엄마도 아버지가 바람나서 이혼하고 저를 혼자 키우기 시작해요. 오빠가 한 명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보내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남성이 벌고 여성은 가정을 지키는 때잖아요. 저희 어머니가 36년생이니까. 엄마 생각에는 오빠는 아빠한테 보내야 학교도 다니고 사람구실 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면에 저는 몸도 성치 못하니까 보낼 수 없었던 거겠죠.

안타까웠다. 자식이 아프면 오히려 곁에서 서로 힘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움직이지 못하는 자식이라면 돌보는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들지 않을까? 아비라는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떠날 수 있었을까? 여성이 홀로 장애아를 키우면서 유혹은 없었을까? (정말 나쁜 생각이지만) 낯선 어딘가에 가서 잃어버린 척 할 수도 있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설에 보내거나.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성인이 되니까 ‘우리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만 해도 남아 선호사상이 심할 때인데 장애가 없는 아들을 보내고 저를 떠맡은 거잖아요.

“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빠를 보냈다.”

엄마가 자주 말씀 하셨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내 장애가 너무 싫었었어요. 네, 상처 많이 받았어요. 엄마도 힘드셨겠죠.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여자가 할 일이 뭐가 있었겠어요? 식당이나 막일밖에 더 있나요. 물리치료가 어딨어요.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벌어서 먹고살기 바빴죠.

‘친구처럼’ 살고 싶은 그저 단순한 꿈

그때나 지금이나 장애가 있으면 돈이 더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제 기억에 어릴 때 엄마가 어떻게든 학교를 보내려고 할라치면 저를 업고 택시를 타고 가야 했어요. 먹고 살기도 힘든데 택시비는 또 얼마나 비싸요? 그래도 엄마가 그런 걸 감당하셨어요. 그런데, 대부분이 그 정도 되면 시설을 보내게 되는데 엄마는 안 그러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동사무소에서 찾아와서 안내했을 것 같거든요? 월세로 셋방살이했으니까 생활이 뻔하잖아요. 엄마의 품성으로 짐작해보면, 아들을 다른 데로 보냈는데 딸까지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어찌 됐든 죽으나 사나 본인이 데리고 살아야 한다고요.

시설은 안 갔지만 결과는 집이 시설이었죠. 엄마가 저를 업어주거나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못 나가니까 집에만 있는 거니까. 엄마가 아침에 일 나가기 전에 같이 밥 먹고 밥상을 옆에 차려놔 줘요. 그러면 저는 점심때 그 밥 먹고 엄마만 기다리는 거죠. 일도 늦게 끝났겠지만, 엄마도 힘드니까 가끔은 술도 한 잔씩 드시고 오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래도 저는 집에 혼자 있으니까 왜 늦게 오냐고 하면서 엄마한테 화 많이 냈죠. 그게 반복되는 삶이었어요.

그러면서 정말 비장애인이 너무 되고 싶은 거예요. 주변 친구들을 보면 비장애인의 삶이 온전하게 사는 거지 이렇게 장애인으로 사는 게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빨리 가정을 이뤄서 아이 낳고 비장애인들처럼 온전히 살고 싶은 게 꿈이었어요. 흔히 말하는 ‘현모양처’ 되는 거요. 돌이켜보면 불가능한 건데요.

또 다시 웃는 그녀. 마스크에 가려있지만, 씁쓸함과 아픔이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도 지금껏 느껴진 이형숙 대표는 엄청나게 씩씩하고 활달하다. 아무에게나 있지 않은 위트와 말빨(?)이 부러울 정도다. 들은 바로는 결혼해서 딸이 둘이라는데, 꿈을 이루신 건가?

절대 안 되죠. 누가 저를 보고서 결혼하겠어요. 불가능한 건데 봐온 게 그거밖에 없잖아요.

책을 봐도 tv를 봐도 다 그런 모습만 보이지 현실의 삶은 알 수 없단 말이에요. 아마, 엄마만 알았을 것 같아요. 제가 성장해도 저런 가정을 이루고 살기 힘든 사람이라는 걸요. 아무도 저한테 그런 얘기해준 사람이 없었어요. 친구들은 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가거나 직장을 갔어요. 앞으로 뭐할 건지 서로 계획을 얘기해요. 그런데 저는 할 게 없을뿐더러 누구 하나 저한테 묻지도 않더라고요. 친구들은 미팅도 하고 그러는데 어느 누구도 “같이 갈래?”하는 사람이 없었고 교회도 열심히 다녀봤지만, 참여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관계에서 항상 배제를 당하는 거죠. 정말 많이 서운하고 마음이 힘들었어요.

근데, 힘들다는 것을 표현했어도 됐는데 방법이 없었어요. 누가 물어봐 주지도 않는데 먼저 친구한테 그런 얘기를 할 수 없었어요. 엄청 친한 친구들도 있었는데 ‘내가 왜 말을 못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할 수조차도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제가 못 움직이니까 주로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왔어요. 그러면, 생활이 되게 힘들었는 데도 엄마는 친구들한테 엄청나게 잘해줬어요. 쌀이 없으면 수제비라도 만들어서 주시고(엄마 얘기를 하니 갑자기 눈물이 나네요) … 고마운 친구들이죠.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혼자서는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다 큰 딸내미를 바라볼 때마다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그런 자식을 일부러 찾아와 주는 친구들이 얼마나 이쁘고 고마웠을까! 그러니, 정성을 다해 뭐라도 먹이고 싶었을 게다.

▲ 여전히 갈길 먼 장애인의 사회적 권리를 위해 아침마다 혜화역에서 선전전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이형숙 대표도 온갖 욕을 듣고 있다. ⓒ정리연
어찌 됐든 저도 남성을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어요. 결국엔 헤어졌지만. 비장애인 삶 속에서 살려고 치열하게 노력했어요. 한복 만드는 이모님이 계셔서 거기 가서 일을 시작했어요. 바느질을 잘해서 한복을 잘 만들었는데 점점 재미도 없고 장애 때문에 손을 움직이는 것도 힘에 부치더라고요. 또, 제가 성향상 외향적인데 가만히 앉아서 한복 만드는 게 답답하더라고요. 다른 사람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데.

어떤 경우에도 길은 있고 다른 길과 이어진다

나름대로 외향적이다 보니 운전을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야 이동할 수 있고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때만 해도(80~90년대 초) 지금처럼 장애인 운전 교습하는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설로 배우는 곳을 찾아가서 면허를 땄어요. 그래서 솔직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동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어요. 23살에 운전을 시작해서 거의 20년간 잘 돌아다녔죠.

이건 무슨 소리?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해서 버스 밑에 들어가 누워 있기도 했고, 버스에 쇠사슬로 몸을 묶기도 했다는 무시무시한 분이 이렇게나 자유로이 돌아다니셨다는 말이야? 그럼, 어쩌다가 활동가가 되신 걸까? 

장애를 갖고 있으면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저를 알고 있는 지인과 친인척들은 “너는 누가 다른 사람이 엉덩이만 들면 다 부려먹고 시킨다”라고 말하더라고요. 앉아 있다가도 추우면 문을 닫고 싶은데 저는 창문이 안 닿으니까 누가 있으면 부탁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부탁한 건데 다른 사람들은 그걸 부려 먹거나 시키는 것으로 느끼는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남한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서, 비장애인처럼 살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살았어요.

그러다가 94년생인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학교에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중고를 구해서 집에서 연습할 수 있게 했는데, 아이가 이러더라고요.

“엄마는 컴퓨터 못 하지.”

그 말을 듣고 컴퓨터를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일반 학원은 비싸서 못 가고 장애인 무료 교육해주는 곳이 있는 걸 알아내서 갔거든요? 저는 평소에 장애를 되게 구질구질하게 생각했어요. 남한테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저는 운전하고 다니니까 사실 이동권에서 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있는 장애인들을 보고 제 생각이 깨졌어요. 주변에 이렇게 많은 장애인이 있는데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그러면서 운전하는 것을 멈추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야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지 알 수 있잖아요. 마흔 넘어서 장애인 활동가를 시작하게 된 거죠. 더 이상 착하게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나쁜 장애인이 되기로 했죠. 거칠게라도 말을 하고 겉으로 드러내야 눈길이라도 한 번 더 주잖아요.

우리가 ‘비’뚤어진 사람 같나요? 그래도 ‘나쁜’ 장애인의 길을 택할게요

시민들의 출근으로 복잡한 아침 8시, 혜화역 5-5 플랫폼 부근에서는 일부러 욕먹고 자식뻘 되는 청년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장애인들이 있다. 벌써 39일째(2022.1.26.)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들과 비장애인 활동가들은 아침마다 지하철역에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부정적인 시선도 많다. 당연하다. 하필이면 일분일초가 급한 출근 시간에 도대체 왜!! 좀 더 한가한 시간에 하거나, 덜 복잡한 곳에 가서 하면 안되냐고? 그렇게도 해 봤다. ‘착하고’ 얌전하게 천막 치고 앉아 있기도, 그저 조용히 전단지 돌리기도 해봤다. 바뀌는 게 없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비장애인을 배려해 주는 ‘착한’ 장애인이 아니라 ‘나쁜’ 장애인이 되기로 했다. 제발 우리가 뭘 요구하는지 들어 달라고, 우리 상황을 알아 달라고 직접 움직여서 보여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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