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은행을 설립해 시민을 위한 시민의 은행에게 위탁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Getty Image

LTV 상향 공약을 둘러싼 대선 후보들의 입씨름

지난 2월 11일 대선 후보 4인의 TV 토론에서 청년 문제가 주제가 되었을 때, 청년들에게 LTV(주택담보대출비율)를 90%로 올려서 주택 매입을 지원하겠다고 공약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국민의힘당 윤석열 후보에게 (자신의 공약을 벤치마킹해서) LTV를 90%로 올리겠다고 공약했는가를 물었다. 윤 후보는 LTV를 80%로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건 뒤로 추가로 더 올리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두 후보 사이에서 LTV를 둘러싸고 입씨름이 벌어지자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LTV를 올렸을 때 혜택을 보는 청년들은 주택담보대출의 원리금을 상환할 수 있는 소득이 있는 사람들뿐이라고 지적했다. 심 후보는 상업은행이 설정한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40%를 고려할 때 서울에서 30년 상환 조건으로 은행 대출을 끼고 10억 원 상당의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청년들은 연봉 1억 원에 가까운 고소득자들로 국한된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이 토론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청년 주택 문제를 LTV 상향조정으로 풀겠다는 유력 대선 후보들의 발상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상업은행에서 엄청난 신용을 일으켜 주택을 장만했을 때, 그 주택을 매입한 사람은 원리금 상환을 마칠 때까지 은행 빚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챌 수 있다. 그나마 원리금 상환을 순조롭게 마치는 사람들은 다행스러운 경우이다. 만일 DSR마저 올려서 소득이 적은 사람에게 LTV 90% 수준의 주택담보대출을 해 준다면, 그 대출은 부실화되기 쉬울 것이다. 주택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하여 대출금보다 적어지면, 주택 투매 현상이 벌어져서 주택 가격은 더 내려가고, 많은 주택매입자가 파산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가 부실화되어 나타난 금융공황 사태가 우리나라에서 재현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정부가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은행의 줄도산을 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LTV 상향으로 누가 이익을 보는가?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것은 상업은행으로부터 너무 많은 신용화폐가 부동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양적 완화에 가까운 조치를 시행하여 은행 이자율이 유례없이 낮아지면서 상업은행의 화폐 창출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상업은행에서 풀린 돈은 LTV와 DSR 규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주택시장을 팽창시켰고, 전셋값이 높아지자 아예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이른바 갭 투자로 주택을 매입하는 사례까지 급증했다. 전셋값이 폭등하는 만큼 전세권 담보대출도 크게 늘었다. 어떤 방식으로 주택을 매입하든, 은행 대출을 전제로 해서 주택을 매입하는 일이 늘어났다. 한 마디로, 화폐자본이 부동산시장을 움직이고 주택 가격을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이다. 주택 가격이 폭등하는 시기에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듯 돈을 모아 주택 매입)이 불길처럼 퍼졌다.

이런 상황에서 LTV 상향으로 이익을 보는 것은 상업은행이다. 물론 주택매입자도 주택 가격 상승으로 자본이득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택의 자산가치가 우상향하는 조건이 충족될 때 가능한 일이다. 부동산시장 같은 자산시장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요동을 치고, 때로는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기도 한다. 그에 비해 상업은행이 주택담보대출을 통해 거두는 이익은 안정적이고, 그 이익의 규모는 대출금에 대한 복리 이자로 인해 엄청나다.

따라서 상업은행으로서는 주택담보대출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설사 대출금의 원리금 상환이 어려워지면, 은행은 담보로 잡은 주택을 가차 없이 처분하여 원금을 상환하고 그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은행의 존립을 뒤흔들 정도로 대출 부실 규모가 커지더라도, 정부가 은행청산을 결정하지 않는 한, 공적 자금 투입을 위시해서 다양한 안전장치가 작동해서 은행을 살린다. 이른바 ‘대마불사’의 신화가 현실이 되는 것이다. 2021년 2분기 기준으로 주택담보대출 잔액 규모가 603조 원에 달하는데, 어느 정부가 엄청난 주택담보대출을 안고 있는 상업은행들을 파산시킬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상업은행은 주택담보대출을 통해서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을 사회화하는 특권적인 지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업은행의 특권과 책임

상업은행은 지급준비금을 확보하는 조건 아래서 신용화폐를 창조하고 파괴하는 권한을 정부로부터 인가받았고, 은행의 지급준비금은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 의해 보장된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특권이다.

사람들은 한국은행이 발권은행으로서 화폐를 발행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는 본원통화로서 시중에서 유통되는 통화 가운데 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시중에서 유통되는 대부분 통화는 상업은행이 창조하는 신용화폐이다. 그렇다면 상업은행이 창조하는 신용화폐의 원천은 무엇일까?

신용화폐는 상업은행의 대출을 통해 창조되고, 대출금 상환을 통해 파괴된다. 대출과 상환이라는 낱말이 사용되고 있기에, 요즈음에도 많은 사람은 은행 예금이 은행 대출의 바탕이 된다고 순진하게 믿는다. 물론 그런 생각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그러한 관념은 까마득한 옛날에 유대인들이 은행 예금 일부를 지급준비금으로 남겨놓고 나머지를 대출하여 이자를 챙기는 방법을 창안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오늘의 은행들은 그런 식으로 대출하지 않는다. 은행들은 대출을 원하는 사람의 계정에 대출금 액수를 기재함으로써 대출 업무를 종료한다. 은행의 대차대조표에는 대출금이 은행의 부채로, 대출자의 신용이 은행의 자산으로 잡히기에 차변과 대변이 균형을 유지한다. 대출자가 대출금을 상환하면, 대출자의 계정에 적힌 대출금의 액수는 삭제되고, 은행의 대차대조표에는 대출할 때 일어났던 것과 정반대의 장부 정리가 이루어진다. 그것이 은행에서 신용화폐를 창조하고, 파괴하는 과정이다. 은행에 맡겨진 예금은 지급준비금의 역할을 할 뿐이고, 그것을 헐어서 대출하는 법은 없다. 은행은 지급준비금을 지렛대(레버리지)로 삼아 그것의 열두 배 이상, 미국 같은 곳에서는 수십 배 이상, 대출한다.

상업은행의 화폐 창조는 사실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려 계정에 숫자를 기재하는 단순한 작업이고, 마치 허공에서 화폐를 만들어 공급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대출을 통해 화폐를 창조하고, 상환을 통해 화폐를 파괴하는 과정을 통해서 상업은행은 엄청난 이익을 본다. 그 이익은 화폐 창조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시뇨리지와 대출금에 대한 복리 이자로 구성된다.

상업은행이 화폐 창조와 파괴를 통해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은 은행의 공적인 역할 때문이다. 상업은행은 무엇보다도 상품의 생산과 유통 과정에 필요한 화폐를 적시에 적절한 규모로 공급하여 시장경제에서 지급 결제 기능을 원만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적 신용화폐 제도에서 은행이 맡았던 본래의 역할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상업은행은 정부의 채권 발행시장에 참가해서 정부 부채를 화폐화하고, 주식발행 시장에 참가해서 기업이 자본금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상업은행은 그러한 역할을 통해 그 자체로서는 영리기업이지만, 금융의 공공성을 실현한다.

상업은행은 정부 부채의 화폐화, 예·대출 업무, 생산과 유통을 망라한 지급 결제 업무 같은 전통적인 업무에 머물지 않고, 신자유주의적 금융화 과정이 시작된 이래로 가계 금융 업무를 크게 확대해 왔다. 가계 금융 확대는 주로 할부 금융 서비스의 형태를 취한다. 그것은 사실 말이 좋아 가계 금융 서비스이지, 가계의 금융 포섭이며, 가계를 옴쭉 들쭉 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채의 덫이다. 여기서는 가계의 금융 포섭이 정부가 교육, 의료, 주택, 복지 분야 등에서 긴축 정책을 폈기에 나타난 결과라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

상업은행이 실패하는 지점

상업은행은 그 자체가 영리를 목적으로 움직이는 금융기관이면서 금융의 공공성에 충실하여야 하기에 사익과 공익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현장이다. 그러한 이익 충돌이 상업은행이 구실을 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요인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서 상업은행이 창출한 신용화폐가 자기자본 계정을 통해 자산시장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상업은행은 법인을 상대로 하는 금융 도매시장에 엄청난 신용화폐를 투입하여 다양한 회사채 거래와 어음 할인 등을 위시해서 현란한 재테크 게임에 참가한다. 그 규모는 매우 크고, 거기서 얻는 은행의 이익은 엄청나다. 상업은행의 신용화폐가 금융 소매시장(개인을 상대로 하는 금융시장)이나 금융 도매시장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주식시장과 파생금융상품시장에 투입되는 규모를 정확하게 집계할 수 없지만, 그 규모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상업은행이 창출한 신용화폐가 재테크의 수단이 되는 것을 내버려 둔다면, 상업은행은 자칫 카지노 자본주의의 한 축이 되고 말 것이다. 상업은행의 신용화폐가 부동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주택 가격에 거품을 불러일으켜 주택의 투기적 수요를 부추기는 효과를 내는 것도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다. 상업은행이 일상적으로 해 왔던 업무가 은행의 사익과 금융의 공익이 충돌하고 시나브로 은행이 실패하는 지점이 된다.

상업은행의 실패는 상업은행이 엄청난 규모로 창출하는 신용이 누구에게나 제공되지 않는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은행의 신용 할당은 선택적이고 배타적이다. 은행의 신용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은행의 문턱은 너무 높다. 안정된 일자리와 소득이 없는 사람들은 담보 없이 대출받기 어렵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설사 LTV를 높인다고 하더라도, 고소득자가 아니라면 DSR 규정 때문에 주택담보대출을 많이 받을 수도 없다.

상업은행의 실패는 사회적 가치나 공익을 추구하는 데 인색한 태도를 보이는 데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상업은행은 자본의 회임 기간이 길거나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사업에 출자하거나 대출하는 인내 자본의 역할을 맡지 않는다. 상업은행은 사회적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고 사회적 고용을 도모하는 사회적 경제에 시장 이자보다 더 낮은 이율로 자금을 대주는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업 영역에서 상업은행은 반드시 실패한다. 그러한 상업은행의 실패를 목록으로 작성한다면, 그 목록은 한없이 길어질 것이다.

상업은행이 무주택자들에게 주거안정과 주거 복지를 보장하기 위한 사업에 참여하여 출자하거나 장기 저리의 대출 사업에 나설 수 있을까?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시행된 민간 혹은 민관 택지 개발 및 주택 공급 사업처럼 천문학적 지대 수익을 추구할 수 있는 경우라면, 상업은행은 당연히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조성 원가로 택지와 주택을 분양하는 사업이나 토지임대부 주택을 분양하는 사업, 혹은 영구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는 사업에서는 어떨까? 지대수익 추구나 대출금의 복리 이자에 바탕을 두고 이익을 계산하는 데 익숙한 상업은행은 그러한 사업에 참여할 리 만무하다. 그런 경우를 놓고 은행의 실패를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은행의 실패라고 하겠는가?

상업은행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상업은행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그동안 여러 가지 대안들이 거론되었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대안은 정부의 금융 감독 권한을 강화하고 금융 경찰권 행사를 촘촘하게 하도록 법제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한 방안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정부 규제의 은행 친화적 성격을 간과하는 흠이 있다. 상업은행을 통해서 국채를 발행하는 정부는 상업은행에 대해 초월적인 지위에 서서 엄격한 금융 규제에 나서지 못한다. 그러한 규제는 은행가 협회의 자율 규제라고 쓰고 정부의 금융 규제라고 읽는 격이다. 예를 들면, 상업은행이 투자은행을 겸하면서 파생상품거래에 천문학적인 신용화폐를 공급하다가 2008년 지구적 차원의 금융공황을 불러일으킨 미국에서 금융 규제를 위해 제정된 프랭크-도드 법은 상업은행의 자기자본 계정 거래를 통한 금융 투자 업무를 봉쇄했다. 그러나 그 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의견을 수렴하여 만든 은행 친화적인 규제법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프랭크-도드 법은 상업은행이 도매 금융시장을 통해 투자은행에 화폐를 공급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또 하나의 방안은 정부가 상업은행에 인가한 신용 창조와 파괴 업무를 회수하고, 정부가 화폐를 공급하는 전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권화폐 이론의 핵심 주장이다. 정부가 조세권에 바탕을 두고 화폐 발행권을 확립하면, 정부는 직접 화폐를 발행하여 공공정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 시장경제의 운영에 필요한 통화를 공급한다. 정부의 화폐 발행권은 정부가 상업은행에 대해 초월적인 위상을 확보할 수 있는 발판이다. 따라서 정부는 상업은행이 100% 지급준비율 혹은 매우 높은 수준의 지급준비율을 준수하면서 전통적인 예·대출 업무와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과 유통에 필요한 지급 결제 업무를 맡도록 엄격하게 규제할 수 있다. 그러한 정부 규제 아래서는 상업은행이 카지노 자본주의 근처에 얼씬거릴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대안은 정부의 공공정책을 뒷받침하는 여러 종류의 공공은행을 창설해서 상업은행의 실패를 보완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권화폐론의 급진성을 회피하면서도 그 이론의 합리적 핵심을 살리는 방안이다. 공공은행은 우리나라에서 낯설지 않은 은행 제도이다. 정부 주도적인 경제개발이 오랫동안 시행되는 과정에서 정부는 총자본가로서 화폐자본을 조달하고 할당하는 결정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따라서 정부는 화폐자본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은행 창구가 필요했고, 그 역할을 맡을 은행들을 창설해야 했다. 그 은행들이 ‘국책은행’이다. 국책은행은 특별법에 근거하여 정부가 출연하여 설립한 은행이고, 수출 지향적 경제개발 및 기업 육성 정책에 따라 장기간 저금리로 산업 부문과 기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구)산업은행, 수출입은행, 중소기업은행 등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책은행들이다. 2000년 국민은행에 합병되기 전까지 한국주택은행도 국책은행으로서 택지 조성과 주택 공급, 주택 할부 금융 등의 업무를 맡았다.

공공은행의 역할

공공은행은 상업은행과 마찬가지로 신용을 창조하여 할당한다. 화폐발행자인 중앙정부가 설립한 공공은행이든, 화폐사용자에 불과한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한 공공은행이든, 모든 공공은행은 신용을 창조하고 할당할 수 있다. 공공은행의 지급준비 역시 중앙은행에 의해 보장된다.

공공은행은 공공의 필요에 따라 대출과 지급 결제를 수행하기에 시장의 규율을 거의 받지 않는다. 상업은행의 신용 창조와 할당이 시장의 요구와 청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바로 여기서 공공은행과 상업은행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공공은행이 상업은행과 다른 점은 그밖에도 많다. 상업은행은 민간자본을 모아서 설립된 민간 기업이고, 수익을 최대화하려는 목표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그러한 사익 추구가 은행의 실패를 조장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에 반해 공공은행은 주로 공익을 위해 신용을 창조하여 할당하는 역할을 하고, 중앙은행의 지원을 받아 적은 비용으로 화폐를 창조할 수 있기에 대출금리를 낮게 책정할 수 있다.

우리 시대에 공공은행이 맡아야 할 역할은 많이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세 가지만 강조하고 싶다. 하나는 인내 자본을 형성하는 역할이다. 상업은행이 인내 자본을 형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인내 자본은 그 자본의 투입에 대한 성공이 보장되지 않고. 설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의 회수에 오랜 기간이 걸리는 특성이 있다. 상품 생산과 유통의 속도를 높여서 이익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화폐자본은 인내 자본의 성질을 띠기 어렵다. 벤처 캐피털은 기술과 지식의 독점을 허용하는 제도를 활용하여 지대를 추구하는 자본이고, 성공에 따르는 지대수익이 엄청나기에 성공 확률이 지극히 낮아도 이를 감수하는 위험 자본이다. 인내 자본은 벤처 캐피털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지대를 추구하는 투기자본은 아니다. 인내 자본은 벤처 캐피털보다 그 규모가 훨씬 크고, 기술의 상업화보다는 원천 기술의 개발과 기술 융합의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 때문에 형성되는 자본이다. 이러한 인내 자본을 형성할 수 있는 주체는 기업이라기보다는 정부일 것이다. 기업은 자본 투입과 회수의 단기주의적 성향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정부는 장기적인 전망 아래서 국가의 기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내 자본을 투입한다. 만일 정부가 기술 투자에 최적화된 공공투자개발은행을 설립하여 그 은행에 인내 자본의 투입 업무를 맡긴다면, 인내 자본의 형성 효과는 매우 클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공공은행이 상업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사회적 경제 부문의 여러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다. 정부가 사회적 경제를 육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공공은행은 사회적 경제의 재원을 공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사회적 경제가 발달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회적 금융이 형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를 이루는 생산 단체나 유통 단체에 신용을 공급하는 사회적 금융은 소규모인 데다가 자금 조달 비용이 크기에 상업은행보다 낮은 금리로 사회적 경제가 필요로 하는 자금을 제공할 수 없다. 사회적 금융에 싼 자금을 충분히 공급할 능력을 갖춘 기구는 공공은행뿐이다. 사회적 공공은행의 창설은 지역 경제 차원에서 사회적 경제를 살려 나가는 유력한 방안이다.

마지막 하나는 공공 주택 공급처럼 방대한 자본이 필요한 공익사업에 자본을 공급하는 것이다. 만일 지방자치단체가 공공은행을 통해 충분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면, 지방자치단체는 지대 추구 경향이 있는 상업은행의 압력을 전혀 받지 않고 택지를 조성하고 주택을 공급하는 사업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화폐자본의 지대 추구를 배제하는 경우, 택지와 주택은 조성 원가에 가깝게 공급될 수 있을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택지 조성 사업을 펼칠 토지를 선정할 수 있다면, 지방자치단체는 공공은행으로부터 조달한 자금을 갖고 조성한 택지를 활용하여 토지임대부 분양 주택, 영구 공공임대 주택 등을 대량으로 공급하여 무주택자들의 주거안정과 주거 복지를 획기적으로 향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택지 조성과 주택 공급이 장기적으로 부동산시장 안정과 주택 가격 안정에 이바지하리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공공토지주택은행의 창설은 더 미룰 수 없는 큰 과제가 되었다.

당장 공공은행을 늘려나가자

상업은행은 인내 자본의 형성, 사회적 경제 지원, 지방자치단체의 공공 택지 및 공공 주택 공급 등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일은 상업은행에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러한 일을 맡을 수 있는 공공은행을 창설하는 것이 마땅하다.

놀랍게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들 가운데 공공은행 설립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는 하나도 없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청년들이 주택을 매입할 수 있도록 LTV를 높이겠다고 공약한 후보들은 그것이 무수한 청년들을 부채의 함정에 빠뜨리는 일임을 애써 외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느 후보도 공공토지주택은행을 창설해서 값싼 공공 택지와 공공 주택을 적시에 충분히 공급해서 주택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지 않는데, 그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공공투자개발은행, 사회적 공공은행, 공공토지주택은행 등의 설립은 금융의 공공성을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성취해야 할 큰 과제이다. 대통령 선거 국면을 떠나서 금융이 공익에 이바지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들은 공공은행 설립을 우리 사회의 의제로 설정하고 사회적 토론과 정치적 토론을 촉진해야 한다. 당장 다양한 목적의 공공은행을 설립하고, 사회적 목적과 공익을 위해 화폐를 충분히 공급하게 만들자!

강원돈(길마루글방지기/민중신학과 사회윤리)  kwdth5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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