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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피해 어디로 가야 할까“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디모데전서 6:11-14)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2.02.15 16:05
▲ 설령 불의와 맞선다고 할지라도 분노는 해결책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노를 피해 어디로 피해야 할까. ⓒGetty Image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평안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이 평안을 날마다 선택하고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말씀에 노아의 방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어떤 상징인가? 노아의 방주는 세상이 어둠에서 빛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정화’ 작업으로서의 상징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도 노아의 방주와 같은 상징으로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 들었습니다.

“내가 바로 이 세상의 어둠을 빛으로 정화하는 노아의 방주다. 나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인류의 ‘대표성’을 가졌다.” 하나님이 주신 이 삶에서 우리가 가진 중요한 역할입니다. 이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특히나 부정적인 경험을 하게 될 때,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맞고 있지 말고, 피해자로 고스란히 남지 말고, 경험하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 들을 그대로 하나님께 넘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넘길 때 어둠이 정화되어 빛으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는 두려움의 상황과 이 상황에 따라 느끼는 여러 부정적인 감정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겪고 느끼고 있을 상황과 감정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대표해서 ‘정화’하기 위해 나도 이 상황을 경험하고,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상황과 감정을 정화하기 위한 역할, 사랑의 감정으로 다시 되돌리기 위한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다시는 죄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과 같습니다. 결코 우리 삶의 무게가 가볍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18-20 말씀입니다.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우리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역할, 큰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이 권한을 사용하셔서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이런 중요한 역할,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는 맥락에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마케도니아로 떠나면서 에베소 교회를 위해 파송한 자신의 아들과 같은 제자 디모데를 위해 여러 가지 경고와 권면의 글을 쓴 편지 형식의 글입니다.

디모데가 사역하게 된 에베소라는 도시는 수리아의 안디옥,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로마 제국 3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최대의 상업 및 교통 중심지였고,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특히 에베소는 오늘날까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고대 근동 풍요의 여신을 섬기는 아데미 신전이 있어 아데미 숭배, 황제 숭배 등 우상 숭배가 극에 달한 지역이었습니다. 아데미 숭배 등 우상 숭배가 얼마나 극심했는지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18장의 내용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의 배경입니다.

사도행전 18:23-28 “23 그 무렵에 주님의 ‘도’ 때문에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 24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이가 은으로 아데미 여신의 모형 신전들을 만들어서,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돈벌이를 시켜주었다. 25 그가 직공들과 이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사업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26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바울이라는 이 사람이 에베소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에 걸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려놓았습니다. 27 그러니 우리의 이 사업이 명성을 잃을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아데미 여신의 신전도 무시당하고, 또 나아가서는 온 아시아와 온 세계가 숭배하는 이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28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바울은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에베소 도시에 대해 디모데에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1:3),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있는 곳(1:4),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곳(1:4)”

바울은 이런 인간의 욕망, 우상 숭배가 가득한 배경 속에서 디모데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가르쳤습니다. 우상 숭배와 다른 교리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성도를 지키고, 교회를 지켜서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1:5)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럼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상과 이단들에 맞서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가르쳤을까요? 고린도전서 4:7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십시오.”, 4:12 “아무도, 그대가 젊다고 해서,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도리어 그대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이들의 본이 되십시오.”

어떻게 대응하라고 하나요? 상대방을 굴복시키라고 이야기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맞대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네 마음을 어둠으로 물들이려고 하는 헛된 것들을 몰아내라고, 몸과 마음을 더욱 경건하게 하라고, 믿는 이들의 본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적이 있으면 사람이 되었건, 이론이 되었건 무엇이든지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이론이 상대방의 이론보다 우세하고, 상대방의 말은 틀렸고 내 말이 옳음을 끝없이 증명하려고 합니다. 우상과 이단들에 맞서는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성경 해석 방식은 옳지 않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할 때마다 법적으로 대응한다거나 미디어 등을 통해 비난하고 비판하기 바쁩니다. 일이 잘 해결이 되던가요?

가장 좋은 대응의 방법은 우리 스스로가 더욱 거룩한 모습으로, 믿음의 본이 되는 모습으로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쳐준 대응의 방식입니다. 디모데전서를 소개한 한 사전에 기록된 설명입니다.

“이단 사설이 난무하던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답지 않게 본 서신에는 교리나 신학적 문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예배의 질서, 감독이나 남녀 집사 등 직분자의 자격 및 경건 생활, 올바른 목회를 위한 교훈, 교회 행정과 교인들의 예우에 관한 문제, 성도의 양육 지침 등 ‘교회 질서와 성도의 윤리적 문제’를 주로 다룬다. 바울은 거짓 교사나 거짓 교훈을 물리치는 힘은 신학적 사상이나 교리가 아니라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며, 교회 밖에서 성도답게 윤리적 삶을 사는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라이프성경사전)

그럼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대응해야 할 우상과 이단은 무엇이 있을까요? 신천지인가요? 타 종교인가요? 정치의 영역에서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인가요? 우리가 대응해야 할 우상과 이단은 ‘온전한 사랑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우리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분노’야말로 우리가 대응해야 할 악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앞서도 읽어드린 본문입니다.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1:5)

“우리 말씀이 진짜야! 너희들 이론은 가짜야!”라고 상대방에게 큰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화려한 언변과 이론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려움과 분노로부터 시작된 일들은 아무것도 선한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 한 마디의 말씀일지라도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 온전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고 설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온전한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요? 11절 말씀입니다. “11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 악한 것들을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맞서 싸우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악한 것은 피하는 것이 맞습니다.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피하는 것입니다. 피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악한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응하면 할수록 악한 것을 계속 끌어당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제 아내의 지인이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말이라도 ‘내가 복수해 줄게!’라며 상대방을 위로했습니다. 그날 밤 아내는 꿈속에서 지인을 괴롭힌 상대방에게 복수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잠에서 깨고 일어났는데 복수와 관련된 꿈을 꾸다보니 몸이 아팠다고 했습니다. 복수를 어떻게 했는지는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하시면 개인적으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위하는 일일지라도 심지어 행동으로 한 것이 아니라 농담으로 주고받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복수’라는 단어가 무의식과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물며 ‘악’, ‘분노’ 등과 관련된 생각들을 하고, 행동으로도 옮기게 된다면 얼마나 더 좋지 않은 영향을 스스로가 받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이런 악한 생각과 분노를 계속 자기 안에서 생산하면서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올라오는 이런 생각과 감정을 피해야 합니다. 그럼 어디로 피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로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악한 생각과 분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 악을 피해 선함을 쫓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다음 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생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안과 밖에서 다가오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피하고 또 더욱 경건한 모습으로 본이 되는 모습이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삶이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저는 주중에 크게 세 부류의 분노를 보았습니다. 한 가지는 동계올림픽 쇼트트렉 편파 판정이 불러온 분노였습니다. 한국 선수들에게 내려진 판정이 편파적이었다는 판단에 따라 분노가 일어났고 그래서 중국과 심판, 선수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정치의 영역이었습니다. 대선을 앞에 두고 자신이 응원하는 후보자를 위해 다른 후보자들에게 칼날을 세워 비난하고 비판하는 등의 말도 꺼내기 힘든 저열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우리 강원노회와 관련한 일입니다. 총회 게시판에서 누가 봐도 쌍방이 ‘분노’로 무장해서 서로를 굴복시키기 위해 글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노회 소속의 한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의 글에 서로 상처를 주는 가운데 더 상처를 받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경험한 일을 가지고 임시노회 안건으로 상정해 복수하고자 이번에 강원노회 임시노회가 열렸습니다. 강원노회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복수를 위한 말도 안 되는 안건으로 임시노회가 열려야 하는지 부끄럽고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위의 큰 일 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평상시에 ‘악’에 빠지게 되고, ‘분노’ 버튼이 눌리는 일들이 참 많이 겪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분노’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는 ‘분노’가 동력이 된다고도 합니다만 그건 100% 틀렸습니다. 분노가 동력이 되어서 세상 적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세상 적인 성공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분노’는 그 어떤 동력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분노를 사랑으로 정화할 때, 이 어두움을 빛으로 가지고 갈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냥 막 싸움이 아닙니다.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정화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사랑으로 가져가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래서 ‘선한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어려운 선한 싸움을 위해 디모데에게 다시 권면합니다. “13 나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훌륭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명령합니다. 14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저와 성도님들도 믿음의 싸움이 아닌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시기 바랍니다. 분노가 아니라 사랑을 바라봐야 합니다. 어둠이 아니라 빛을 바라봐야 합니다.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경건한 사람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을 택하면 온 인류가 사랑으로 가득하고, 내가 빛을 택하면 온 인류가 빛으로 물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인류를 대표한다는 ‘대표성’을 가지고 내가 겪는 상황과 느끼는 감정들을 정화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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