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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집을 등지고(누가복음 9:57-6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2.20 14:53
▲ 「From Elijah to Elisha」 ⓒGetty Image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번 주일은 주현절 일곱째 주일입니다. 주현절 기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기억하며, 그 삶을 통해 가르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 성서 일과에 따른 본문은 여호수아 1장 1-9절, 시편 41편, 누가복음 9장 57-62절, 고린도전서 10장 1-13절 말씀입니다.

이번 주간에 지정된 본문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기는 조금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도 굳이 하나의 흐름을 찾아보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으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희가 오늘 살펴볼 누가복음 9장의 말씀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본문은 다른 본문들과 조금은 다른 맥락에서 읽어야 하기는 하지만, 하나의 흐름 속에 넣는다면 이런 해석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저희가 계속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에 지정된 본문들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복음서에 선정된 말씀들이 조금 난해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쟁을 주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신 누가복음 12장의 본문도 그랬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도 우리가 단순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약간의 거부감이 드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은 누가복음 9장 57-62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 하셨으며, 지금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판단하며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8장 19-22절에도 거의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약간의 단어 차이와 상황의 차이는 있지만 말씀 자체는 유사합니다. 마태복음과의 가장 큰 차이는 61-62절의 유무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세 번째 사람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 자청한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이야기만을 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에 앞서 어떠한 행동을 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먼저 첫 번째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어디든 가겠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거처가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9장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누가복음 9장은 예수님의 권능, 기적 이야기 뒤에 수난 이야기가 붙어있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병이어와 베드로의 고백 뒤에 이어지는 수난 예고, 변화산 사건과 귀신 축출 기적 뒤에도 수난 예고가 이어집니다.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툰 이야기 뒤에는 사마리아 마을에서 거절당하신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지금 보기에는 영광스러운 길,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만 같은 길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거부당하고 모멸당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우와 새는 자연으로부터 자신의 보금자리를 허락받습니다. 자연은 그들에게 집을 제공하고 그들을 보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이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 자신이 속한 세상이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받을 수난에 대한 예고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사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받으실 수난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두 번째 사람의 이야기에서부터 제기됩니다. 두 번째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을 쫓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예수님께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오겠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장례 의식은 어떤 율법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합니다.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의식을 위해서는 일부 율법 조항을 어길 수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의식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율법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던 장례 의식조차도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우선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셨는지 한 가지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라고 하신 말씀은 장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에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상당히 거슬리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번역 문제나 말씀이 와전되었다는 방식으로 최대한 말씀을 부드럽게 만들려고 애쓰던 해석들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나라 전파의 긴급성과 중요성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봤을 때, 이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장례 의식이 누구를 위한 의식인가 하는 점입니다.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장례 의식은 죽은 이를 위해 살아있는 사람들이 지내는 의식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문화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를 치르러 가겠다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행위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 선포라는 사명의 중요성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고 있는 이들,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는 이들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기독교에서 장례 예식은 우리나라의 삼우제와는 다릅니다. 돌아가신 분의 혼이 떠돌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치르는 예식이 아닙니다. 기독교 장례 예식은 남아있는 유족들을 위한 예식입니다. 유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굳게 품기를 바라며 진행되는 예식입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전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세 번째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분명 열왕기상 19장에 등장하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을 때,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자신의 부모에게 인사하고 올 수 있기를 청하였고, 엘리야는 이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허락을 받은 엘리사는 집으로 돌아가 소를 잡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에 엘리야의 곁으로 돌아옵니다.

제자, 작별 인사, 쟁기라는 세 가지 소재는 확실하게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엘리사의 작별 인사를 허락해 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 역시도 하나님 나라 선포의 긴급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의 모티브를 사용하고 계신 점은 후에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사가 그를 떠나지 않고 곁에 머물고자 했던 점까지 연상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리야는 승천했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엘리사와 멀어지게 되었지만, 자신의 사명을 위해 때로는 비정해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 사람의 작별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점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두 번째 사람에게 요구된 것보다 간단하다고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은 장례 의식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에게 있어서 가족을 외면하고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한다는 말씀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씀입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상황 속에서 이런 말씀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사명의 긴급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기, 초대 교회가 성장하던 시기,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 보았을 때,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하는 일이 가족을 저버릴 정도로 긴급한 일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 맞지 않다고 해서 62절의 말씀을 다르게 해석할 이유는 없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를 재물을 탐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가족보다는 하나님 나라 전파의 사명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 의미가 분명합니다.

가정 예배가 중심이었던 초대 교회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힌트는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희는 저희의 상황 속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재해석 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길을 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또 그 길은 결코 평탄하고 높은 권세를 주는 길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과거 초대 교회 시절에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널리 퍼지도록 전파하는 일이 상당히 중요했고 긴급성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기독교는 이미 전 세계에 퍼져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많이 전파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소식을 전하는 일, 그 가르침을 전하는 일이라기보다 그 가르침을 행하는 일입니다. 이를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당연히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제 가정은 우리가 등지고 떠날 대상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할 장소입니다. 함께 회개와 구원의 길에 들어서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평안과 은혜를 누려야 하는 공간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먼저 이런 일을 해야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라는 공간은 이를 배우고 연습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배운 바를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하는 곳은 가정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부모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자녀들은 그 모습을 배우고 그와 같이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걱정과 근심 속에 마음에 안정을 얻지 못하고 살아가며, 세상과 똑같은 악을 행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의 삶을 살 것입니다. 어쩌면 부모의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 믿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파의 중요성과 긴급성을 말씀하시며 가정을 돌보는 일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은 지금 시대에는 분명히 다르게 전해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먼저 하나님 나라를 이룹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풍성한 가정을 먼저 만들어갑시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 안에서 바로 설 때에,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우리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조금씩 성장해 가게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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