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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와 데마, 거짓된 제사장은 되지 말자!(말 3:7-12; 골 4:7-18; 마 10:1-15)주현절 여덟째 주일/3・1절 기념주일(2월27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2.25 16:41

1. 3·1절 기념주일과 민족의 미래

오늘은 주현절기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일곱 번의 주현절기를 통해 이 땅에 현현하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이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다음, 요한이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특히 이 기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많은 이들을 고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전도 사역지로 파송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약한 것을 고쳐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열두 제자에는 들지 않지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죠?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제자입니다. 따라서 서신서 말씀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명을 감당한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들에게 안부를 묻는 말씀이지만, 이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데 앞장선 이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바울을 버리고 떠난 데마와 같은 이도 있습니다. 구약 말라기 말씀에는 잘못된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거짓된 제사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는 이들도 있지만, 가룟 유다와 데마, 그리고 거짓된 제사장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말씀처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적어도 유다와 데마, 거짓된 제사장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3・1절 기념주일입니다. 3・1절은 5대 국경일의 하나로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일제의 압박에 항거, 전 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당시 3・1운동은 3월 1일 당일뿐만이 아니라, 3월과 4월 두 달에 걸쳐 200만 명이 시위에 가담하여 무려 7,500명 이상이 생명을 바친 하나의 혁명적인 사건이자 대학살 사건이었습니다. 7,500명씩이나 학살당한 대참사를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이 아닙니다.

아무튼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숭고한 자주독립 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여 이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습니다. 쉬는 날이 아니라, 당시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 왜곡, 나아가 주변 강대국의 탐욕으로부터 이 민족을 지키고자 다짐하는 날인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틈바구니에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외부적으로는 서쪽의 애굽과 헬라, 그리고 로마라는 거대 제국과 동쪽의 앗시리아, 바벨론 그리고 페르시아 사이에서 힘겨웠습니다. 그런데도 내적으로는 남북이 갈라져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그렇죠? 중국, 러시아와 일본, 미국이라는 4대 강국 틈바구니에서 남북이 갈라져 쉽지 않은 역사를 버티고 있습니다.

따라서 3・1절 기념주일을 맞아, 비폭력 평화시위를 통해, 온 세계에 우리 민족의 숭고한 정신을 보여주었듯이, 이제 우리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와는 달리, 에스겔의 환상대로 하나가 되고 지구촌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세 본문 말씀의 맥락에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바울과 그의 동역자가 되어 이 시대에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을 잘 세워야 합니다. 따라서 주현절 마지막 주일 말씀은, 사람을 세우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2.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복음 전파자의 임무와 자세를 말씀합니다. 적대자들과의 마찰은 피하고, 그들을 온유와 겸손으로 대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세상과 타협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먼저 열두 제자의 명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의 12제자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아람어, ‘열심당원’)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 10: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워 파송하시면서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5-8)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순서를 뜻합니다. 먼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부터 시작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복음은 이방 세계에까지 확장될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유대 땅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단기적인 전도 훈련을 통해 먼저 선민 이스라엘에 복음을 증거하고,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령의 은사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이들로 성장해가게 됩니다.

이때 바울 사도와 그의 동역자들이 등장하여 이방 세계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것은 서신서에 나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떠날 때 배낭이나 옷, 신발 등 준비물을 충분히 가져가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꾼이기에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방법은 바로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 10:9-13)

무슨 말씀인가요? 어떤 성이나 마을이든지 말씀 받기에 합당한 자가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죠?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0:14-15)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명하게 나눠집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은가! 선한 길을 사모하는가, 아니면 악한 길로 가는가! 따라서 서신서에서는 이러한 선한 길을 사모하고 달려온 동역자들에게 바울은 문안 인사를 합니다. 물론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와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 데마같은 이는 세상을 쫓아 딴 길로 가기도 합니다. 그럼 서신서 말씀을 볼까요?

3. 바울의 동역자들과 데마

▲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골 4:7-8)

오늘 서신서 골로새서 말씀은 바울이 동역자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축도로 서신을 끝맺는 말씀입니다. 가장 먼저 두기고(‘행운’이라는 뜻)가 나옵니다. 두기고는 아시아 사람으로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말씀을 강론할 때 제자가 되고 훗날 동역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의 수족과 같은 역할을 하여 바울의 편지를 여러 교회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두 번째 인물은 오네시모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골 4:9).” 오네시모(‘유익하다’는 뜻)는 빌레몬서의 주인공이죠? 빌레몬의 노예로서 재물을 훔쳐 달아났다가 로마에서 붙잡혀 감옥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투옥 중에 복음으로 난 아들이라 불렀습니다(몬 1:10). 나중에 오네시모는 에베소교회의 감독이 되어 평생 주님의 노예로 헌신하였습니다. 특히 오네시모가 에베소교회 감독으로 있을 때 바울의 서신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오늘날 우리가 바울 서신을 읽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 4:10).” 먼저 아리스다고(‘선한 정치, 최고의 통치자’라는 뜻)는 사도도 지도자도 아닌, 이름 없는 평신도였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자, 아리스다고(빌 4:10)”라는 바울의 말을 통해,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울보다 먼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순교하기 전, “나의 신앙의 아버지, 바울을 끝까지 보살피지 못하고 먼저 갑니다.”라고 편지를 남겼는데,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바울의 참다운 동역자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바나바의 누이의 아들인 마가(‘큰 망치, 의젓하다’라는 뜻)는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지중해 구브로 섬 출신이며 예루살렘에서 성장한 레위 족속으로 마가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었고 그리스도인의 집회 장소였습니다. 그의 집에는 넓은 다락방이 있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열두 제자를 데리고 이곳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눅 22:12-13).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는 120명의 성도와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던 중 성령께서 임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행 1:13-15, 행 2:1, 행 12:12). 마가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시중드는 수종자로도 동행했으며, 바울이 죽은 후에는 베드로와 동행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통해 얻은 증언과 진리를 모아서 책을 펴낼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나고 섬세한 인물입니다.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골 4:11).” 유스도(‘의로운’이라는 뜻)는 할례파,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보통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문제로 바울과 사이가 좋지 않고 바울의 적대자입니다. 그런데 유스도(는 물론, 아리스다고, 마가까지)는 유대인이면서도 바울을 이해하고 도와주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골 4:12-13)

에바브라(‘매력적인, 호감이 가는’)는 이름처럼 주를 위해 매력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고 빌레몬의 집에서 빌레몬과 함께 골로새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라오디게아 교회와 히에라볼리 교회도 섬겼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에바브라는 로마 감옥까지 찾아가서 교회설립의 기쁜 소식과 교회의 기도 제목을 전했습니다.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 4:14-16)

누가(‘총명하다, 빛을 주는 자’라는 뜻)는 바울의 동역자이자 전도 여행의 동료입니다. 의사이자 역사가입니다. 바울과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사람입니다. 누가는 헬라인이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입니다.

데마(‘다스리는 자’)는 한때 사도 바울의 제자이자 선교사역의 동역자였는데, 바울이 두 번째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자, 옥에서 고생하는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바울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록한 디모데후서에 보면, 데마가 바울을 떠났다고 합니다(딤후 4:10). 이렇게 모든 바울의 동역자가 바울과 함께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남지만, 데마만이 바울을 배반하고 그릇된 길로 가게 됩니다. 또 눔바는 라오디게아 여인으로 자신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골 4:17).” 아킵보는 빌레몬과 압비아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아킵보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몬 1:2)”라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 아킵보는 골로새 교회에서 젊은 사역자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표현대로 ‘이대남’입니다. 믿음의 부모님과 자신의 집에서 예배 모임이 있었다는 것 등으로 보아 생활환경이 신앙을 받아들이기 쉬운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혈기가 그를 그릇된 길로 이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아킵보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직분)을 끝까지 감당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마지막 결론입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골 4:18).”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매인 것을 이야기하며 동역자들에 인사합니다.

매우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말씀에서 기억할 것은 가룟 유다와 데마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도 이렇게 배신하며 떠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사람을 제대로 잘 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뜻대로 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4. 바벨론 포로기 이후, 거짓된 제사장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은 바로 가룟 유다와 데마와 같은 거짓된 제사장과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아오라!”라고 권면합니다.

▲ 말라기 선지자와 거짓 제사장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말 3:7)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기원전 440년에서 410년까지 활동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이 재건되었지만 오시리라 약속한 메시아가 오지 않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 중심적인 삶이 깊은 회의에 빠졌을 때입니다. 그 결과 자연적으로 예배에 소홀히 하기 시작했고 형식적인 종교 행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말라기(‘나의 사자’라는 뜻)가 나타나 하나님 중심 신앙을 회복하라고 설교하며 사회개혁을 외친 것입니다. 따라서 말라기는 말라기 선지자의 설교가 중요합니다. 총 6편의 설교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 말씀은 5편째 설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치며 십일조와 올바른 헌물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8-10)

여기서 ‘너희는’ 누구일까요? 한국교회 대부분은 너희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보고, 말라기서 본문을 하나님께 십일조를 받쳐야 복을 주신다는 말씀으로 기복신앙 식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여기 나오는 ‘너희는’은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제사장들을 의미합니다. 교인들의 헌금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 쓰는 자들, 나아가 국민의 세금을 자기 탐욕의 도구로 쓰는 자들을 향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말라기 선지자는 잘못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제사장들을 책망합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말 2:17), 더러운 떡을 하나님의 단에 드리고(말 1:7), 병든 것이나 흠 있고 훔친 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말 1:8, 13). 하나님은 이런 제사장들의 행태에 성전 문을 닫고 싶어 할 정도였습니다(말 1:10).

따라서 제사장들이 다시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고 백성들로부터 받은 십일조를 모두 하나님의 집에 들여놓으면, 하나님께서 그 제사장들이 지금껏 지은 죄를 용서하시고 죄 사함과 구속함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땅을 아름답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 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1-12) 

이렇게 일꾼과 지도자를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앞서 오늘이 3・1절 기념주일이라고 말씀드렸는데,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교묘하게 우리 민족을 통치합니다. 따라서 길고 긴 식민지 통치 기간 동안 올곧고 뜻있는 사람들이 나중에는 친일파로 변절합니다. 3・1운동 이후 곧 독립이 될 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나갈수록 사정은 나빠져 조선의 독립은 거짓말쟁이 소년의 거짓말처럼 조선 땅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많은 조선 사람들이 변절하고 친일파로 바뀝니다. 당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도 최린(1878~1958)과 박희도(1889~1952), 정춘수 등 세 사람도 친일파로 변절합니다. 이렇게 가룟 유다와 데마, 그리고 거짓 제사장과 같은 이들이 지금도 살아남아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떳떳하게 내세우며 호의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 2022년 3월 9일이면 20대 대통령 선거

이제 2022년 3월 9일이면 20대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 한 번으로 세상이 바뀌고 우리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도, 또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현재 세계적인 추세를 보면, 이념적으로 양극단으로 갈라져, 대결 구도가 점점 더 극심해져 갑니다. 우리나라도, 현재 여야가 팽팽히 맞서고 있어서, 어느 쪽이 이기든 그 반대쪽은 실망하고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5. ‘역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얻은 성찰과 교훈’과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제언’

『기독교사상』 2022년 2월호, 「한 개신교인의 제언: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라는 글에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배덕만 교수는 대통령 선거를 앞둔 그리스도인들에게 몇 가지 제언을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역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얻은 성찰과 교훈’ 일곱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기존의 정치참여 방식을 재고하라. 특정 후보에 대한 선거운동, 성직자의 직접적인 정치활동, 기독교 정당 조직 등. 둘째, 선거에 적극 참여하라. 선거에 대한 냉소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쉽게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셋째,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라. 변동하는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대신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윤리 규범을 제시하라!. 넷째, 사회통합을 위해 힘쓰라. 모든 사회는 보수와 진보라는 두 바퀴를 통해 운영된다. 양자의 조화와 균형 없이 건전한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다섯째, 신자유주의 정권을 교체하라. 미국발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시대적 당위로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이런 현실에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무의미해졌다. 결국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한국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섯째, 예수를 정치에 함부로 끌어들이지 말라. 개신교는 신정정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모든 대선에서 기독교인 후보에게 특별한 애정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기준과 선택은 민주주의 발전과 교회의 건강한 성장 모두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무지에 근거한 배타성과 맹목적인 종파주의가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켰을 뿐이다. 일곱째, 새로운 역사참여 신학을 정립하라. 2000년대에 진입하면서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압도하고, 사회의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는 성서적 가치를 탐구하며 시대적 풍조에 저항하는 대신 오히려 이런 풍조를 부추기고 정당화하는 일에 앞장섰다. 새로운 역사참여 신학을 서둘러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제언’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첫째, 이제 과거와 결별하자! 둘째, 광장에서 골방으로 이동하자! 셋째, 이익집단에서 보편종교로 성숙하자! 넷째, 각자의 책임을 다하자!” 특히 첫째 과거와 결별은 개신교가 과거에 누려왔던 특권과의 결별을 말합니다. 배덕만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분단과 냉전을 배경으로 남한에서 재구성된 개신교는 ‘반공, 친미, 친자본’의 전위대로 맹활약을 해왔다. 그 덕택에 우파 정부가 부여한 특혜와 특권을 누리면서 우파 정부와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한 특권적 지위를 획득・유지하기 위해 개신교는 복음을 타협하고 예언자적 책임도 회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특혜와 특권을 부여했던 특정 정권 및 이념과의 밀월관계를 청산하고 철저하게 ‘백의종군’해야 한다. 이제야말로 개신교는 특혜와 특권을 내려놓고 복음의 정신에 충실하면서 제사장적 사명과 예언자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광장과 골방은 이렇습니다. 사실 군사독재 시대 때, 아부하며 성장과 꿀물을 받아먹었던 극우 개신교는 민주주의 시대가 되자, 광장에 모여 폭언과 망언의 말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광장에서 빈번히 막말을 쏟아낼수록 사회의 반응은 싸늘해지고 혐오감은 급상승했습니다. 동시에 개신교 내부의 모순과 오류가 만인의 상식이 되면서 어느새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조롱거리로 전락했습니다. 따라서 배덕만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히 개신교가 담대히 광장으로 나가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광야와 골방으로 물러날 때가 아닐까? 분명히 세상이 듣도록 함성을 외쳐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침묵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시간이 아닐까? 최소한 잠시 동안만이라도 말이다.” 

개신교의 이익집단과 같은 모습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대선에서 개신교가 보여준 모습은 과거에 향유하던 특권을 유지 혹은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정치집단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대선의 존재 이유라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 순간 개신교는 자신이 또 하나의 이익집단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신교 유권자, 시민단체들과 전문가,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책임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개신교 유권자들은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소신이 있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개신교 시민단체들과 전문가들은 대선후보들이 쟁점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해법을 발견・실행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교회가 특정 정당이나 후보의 운동원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이 시대에 적합한 ‘한국적 공공신학’을 수립하기 위한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 신학의 부재는 필연적으로 교회의 본질과 역할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룟 유다의 길은 걸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 데마와 같은 길을 걸어서도 안 됩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말라기 시대의 거짓 제사장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편적인 종교 품성으로 올바른 신앙적 가치관에 따라 골방에서 기도하며 신앙의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앞서 오늘은 3・1절 기념주일이라고 말씀드렸는데, 3・1운동 독립선언서는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위협을 없애고 억눌린 민족의 양심과 사라진 국가 정의를 일으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며, ‘원래부터 지닌 자유권을 지켜 풍요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 그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나라를 되찾아야 할 이유로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독립을 호소해도 모자라는 마당에 문화를 말하다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구절은 우리 선조들이 가진 문화적 자부심과 기개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 한국문화(K-Culture)

이제 2022년은 제2의 3・1독립 운동의 시작입니다. K-Pop과 K-Drama, K-Cinema 등 대중문화에서 시작된 한류가 한국문화(K-Culture), 한국스타일(K-Style)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계인들에게 ‘선망의 차원’을 넘어 ‘학습의 대상’으로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전자정부, 블룸버그(미국의 경제 미디어/데이터/소프트웨어 기업) 선정 ‘코로나 방역 모범 MVP 7개 국가’가 되기도 했으며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 등 한국형 발전모델이 지구촌에 소개되기까지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제 코로나의 위기를 잘 극복하고 문화강국으로서 문화적 자부심을 품고 지구촌을 선도하는 국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나 사회의 일꾼을 제대로 잘 세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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