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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인 근심과 세상적인 근심은 나눠지지 않는다하나님 안에서의 근심(고린도후서 7:8-10)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3.05 23:26
▲ 신앙적인 근심과 세상적인 근심을 나뉠 수 없다. 그 방향성이 다를 뿐이다. ⓒGetty Image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이번 주일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성회수요일’을 시작으로 40일간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그 삶에 동참하기를 다짐하고 노력하는 기간입니다.

이번 주간 성서일과에 따른 본문은 이사야 58장 1-9절, 시편 25:1-10절, 마태복음 6장 16-18절, 고린도후서 7장 2-13절입니다. 이사야와 마태복음의 말씀은 참된 금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선 금식을 강조하고 이사야는 금식이라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라고 말합니다.

시편의 말씀은 이사야와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며 그 길을 걷는 자를 이야기합니다. 이사야와 마태복음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금식은 회개와는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괴롭고 처참한 모습을 내보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금식 행위 뒤에 가려진 잘못된 행실을 지적하며, 이를 뉘우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행위야 말로 참된 금식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금식과 회개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세상의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이야기하며, 회개와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사순절 첫날은 ‘재의 수요일’이라고도 불립니다. 금식할 때와 마찬가지로 재를 뒤집어쓰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째 주일 본문은 금식에 관련된 본문이 선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 행위, 종교 예식보다 참된 회개와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번 주일 저희는 금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습니다. 네 본문을 함께 보았을 때 그 말씀들이 회개라는 주제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회개를 다루고 있는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의 작성 배경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이나 새번역 성경은 우리에게 익숙한 전후서로 구분하고 있지만 공동번역 성경이나 영어 성경은 첫 번째 편지와 두 번째 편지로 구분합니다. 표기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는 크지 않지만, 두 표기 방식 모두 사도 바울이 두 차례에 걸쳐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는 인상을 남깁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린도전서에는 이전에 보낸 편지에 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고전5:9). 고린도후서의 경우도 이 편지가 작성되기 전에 어떤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전달했다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고후2:1-4). 또 각각의 서신이 처음부터 하나의 서신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관하는 과정이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선포하는 과정에서 편지가 섞였을 수도 있고, 교회 공동체가 의미에 맞게 편지를 엮어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작업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다른 교회들과 사도 바울의 신앙을 나누는 과정에서 이런 작업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가 작성된 배경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어떤 문제로 인해 디도에게 서신을 들려 고린도로 보냈고, 디도가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상황이 있습니다. 간혹 디도가 가져간 편지가 고린도전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한 고린도후서의 이야기를 보면 그 편지가 고린도전서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 편에 보낸 편지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을 근심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또 이는 자기 자신에게도 근심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도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까지 근심이 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부쳐진 편지가 완성된 두 통의 편지라고 본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편지 두 통이 각 서신에 앞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는 ‘불의를 행한 자’와 ‘그 불의를 당한 자’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6장 13절과 7장 2절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언급이 나타납니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해보았을 때,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에 반대하는 사람이 존재했고, 그로 인해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사이가 멀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직접 고린도 교회를 찾아가지 못했고, 자신의 동역자인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 자신을 위한 변론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과거 바울 서신에 나타난 디도(Τίτος)와 사도행전 18장 7절에 나타난 고린도 지역에 살던 디도 유스도(Τίτιος Ἰοῦστος)를 동일 인물로 보려는 시도가 있긴 했지만,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도 이름의 철자가 다릅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면 고린도 출신의 디도를 그 지역으로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디도를 향한 바울의 근심은 조금 과하게 느껴집니다. 이 둘을 굳이 동일 인물로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리해보자면, 고린도전서가 발송된 이후 어떤 시점, 사도행전에 빗대어 보자면 사도행전 15장에서 16장으로 넘어가는 시점 정도에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는 교회 내부의 문제라기보다 사도 바울 자신을 배척하려는 어떤 움직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소식을 듣고 동역자인 디도를 통해 자신의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전합니다. 그리고 이제 디도가 가져온 소식을 전해들은 뒤에 다시금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적습니다. 그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근심의 방향

고린도후서에는 ‘근심’이라는 말이 많이 나타납니다. ‘근심하다’라는 동사 ‘뤼페오(λυπέω)’는 12번 사용되었고, 명사형인 ‘뤼페(λύπη)’도 6번 사용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7장에도 계속해서 근심, 슬픔, 낙심, 두려움을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근심은 자신의 동역자 디도에 관한 근심과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자체에 대한 근심, 자신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배척당함에 따른 근심이었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근심은 사도 바울이 쓴 편지로 인해 발생한 근심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눈물로 썼다’고 말한 그 편지는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 근심과 슬픔을 일으킬 정도의 내용이 적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편지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은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을 구분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 근심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교회 걱정, 성도님들 걱정, 자신의 죄에 대한 걱정이고 세상 근심은 돈에 대한 걱정, 자기 유익만을 따르는 걱정으로 구분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근심의 요인은 똑같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도 바울에게 근심을 안겨주었고, 사도 바울이 쓴 편지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모두 똑같은 원인에서 발생한 근심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근심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방향성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구분됩니다. 하나의 원인을 두고 어떤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가’를 고민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지를 근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이것이 나에게 어떤 유익을 줄지’를 고민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을 취해야 나에게 이익이 될까, 어느 쪽이 더 세력이 강하고 나의 보신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이 근심의 중심에는 ‘나’만이 있습니다. 조금 더 넓게 보자면, ‘나’와 ‘내 가족’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세상 근심입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근심은 자연스레 갈등과 분열을 낳게 됩니다. 서로가 생각하는 이익은 당연히 다를 것이며, 내가 이익을 얻으려면 남이 손해를 봐야 한다는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모두 함께 잘 되는 길을 생각하지 않기에 이런 근심은 결국 모두가 망하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또 요즘 시대에는 이런 모습도 보게 됩니다. 개인주의적인 근심이 아니라, ‘근심에 의한 근심’이 쌓여가는 모습입니다. 너무도 막막한 현재의 삶과 앞날에 대해 근심하다보니 그 근심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또 근심이 쌓이는 것입니다. 근심이 근심을 낳고 그 근심은 또 근심을 낳습니다. 무수히 쌓여가는 근심은 결국 우리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결국 죽음과 마찬가지의 상태로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근심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야 함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함을 근심합니다. 그렇기에 11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간절함, 변증, 분함, 두려움, 사모함, 열심의 마음을 이끌어 냅니다. 마지막에 나타난 응징은 이런 열심 있는 감정과 뜨거운 논쟁 속에서 불의를 행한 이에게 처한 벌을 의미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 전체를 죄인이었다고 질책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이때의 회개는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반성하고 고쳐서 바른길로 돌아섰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는 사람은 그 뜻을 펼치기 위한 열정이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으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유익만을 탐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않습니다.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따라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더 좋은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세상 근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근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편지로 인해 잠시 근심했지만, 그 근심은 구원과 기쁨으로 이어졌듯이 우리의 근심도 날마다 기쁨이라는 결과를 이끌어 낼 줄 믿습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이번 주 수요일에는 20대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이미 사전투표를 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금 우리는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 이 나라가 바로 서게 될까 고민합니다. 이 고민 역시도 하나님 안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만, 내가 속한 집단에만 이익을 줄 수 있는 후보가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 전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고민하시고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내 집단이 아닌 집단을 배척하는 마음이 아니라 모두를 포용하는 마음으로 고민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각자 원하는 정책이나 바라는 방향은 다를 수 있지만, 내가 외면하고 살아왔던 이들,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이들까지도 함께 생각하시며 그들까지도 함께 잘 살 수 있게 만들 후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며 선택하셨으면 합니다.

누가 더 좋은 후보인가를 논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떤 이를 선택하시건 그 고민의 방향은 ‘나’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향하고 있었으면 합니다. 세상 근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민하며 선거에 참여한다면 이 나라에 좋은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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