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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닥치는 위기절망해 돌아서지 마세요(요한복음서 2:7-9)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3.13 18:38
▲ Jan Cornelisz Vermeyen, 「The calling of Apostle John at the Marriage at Cana」 (1530) ⓒWikipedia

1.

지난 주 나누었던 말씀 기억하시나요? 우리는 모두가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된 것도 아니고, 우리 능력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주시는 자녀된 권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기뻐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이 세상의 삶이 만사형통 술술 풀려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20년, 30년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도 세상풍파에 시달립니다. 되는 일마다 망하고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뭐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믿는다더니 하나님도 별 수 없나 보네. 은혜 받는다고 난리치더니, 저게 은혜야?”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녀된 은혜를 받았는데, 도대체 그 은혜의 정체가 뭔지 아직 우리는 잘 모릅니다. 누려야 하는 권리와 권세가 뭔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의 어설픈 비판과 조롱에 휘둘립니다. 그리스도가 오셨는데, 그 그리스도가 구원하셨는데, 그래서 구원받았는데, 그리스도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교제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어도, 사는 것은 여전히 세상의 아들딸로 살아갑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2.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모습을 복음서가 그리고 있는데, 흔히 공관복음서라고 말하는 세 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그 처음의 모습이 사뭇 다릅니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해라. 복음을 믿어라!” 당당한 선포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그런 선포가 없습니다. 1장에 복음서의 해설자가 등장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설명해주기는 합니다만, 예수님은 스스로 선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빙긋이 웃으시면서 ‘글쎄 한 번 와서 봐(1:39)’ 하십니다.

세상을 향한 당당한 선포도 필요하지만,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고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5:30)’고 말씀하시고는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할 뿐입니다(5:19).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1장 10절의 말씀에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 것처럼, 세상이 그를 알아보기를 기다리는 듯합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 깨닫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합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형님은 왜 드러내지를 않습니까? 막 세상에 외쳐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직 내 때가 오지 않았다.’ 이 말씀은 이렇게 들립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외쳐봐야 소용없다.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고, 내 삶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그 역사하심이 만들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렇게 그들이 깨달았을 때, 그 때가 나의 때다. 그 때가 오면 비로소 내가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3.

바로 그 말씀, ‘아직 내 때가 오지 않았다’는 말씀이 오늘 이야기에도 등장합니다.

갈릴리 가나에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이스라엘의 결혼식은 우리와 달라서, 한 시간 만에 끝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2-3일이고 길면 일주일까지도 이어집니다. 수많은 손님들이 와서 축하하며 먹고 마시는, 말그대로 잔치입니다. 이런 잔치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뭘까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우리 속담도 지적하듯이, 잔치에는 음식이 제일 중요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 잔치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의 잔치에는 특별히 포도주가 중요합니다.

어쩐 일인지 이 잔치에 그 중요한 포도주가 딱 떨어져 버렸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법이 어디 있냐’고 사람들이 난리를 칠겁니다. 그래서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

이 말은 단순히 정보전달이 아닙니다. 뉴스거리를 알려주는 게 아닙니다. ‘글쎄, 잔치자리에 포도주가 떨어졌대’ 하고서 입방아를 찧는 게 아닙니다. 아들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가, 그에게 요청하는 겁니다. 아들에게 하는 요청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고하는 간청입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2:1-2)”는 말로 보아, 예수의 어머니는 아마도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이 혼인잔치의 관계자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말을 굳이 비약시키면 기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들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고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기도라고 생각하고 마리아의 말을 다시 보면, 이 기도야말로 참된 기도입니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지금의 나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내 뜻대로 강요하지 않는 겁니다. 그저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하고 내 상황을 말하는 겁니다. ‘포도주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하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준비한다고 했는데, 이럴 줄 몰랐습니다’ 하고 변명하지 않습니다.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하겠지만, ‘이렇게 해 주시오, 저렇게 해 주시오’ 내 생각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습니다. 그저 내 상황을 아뢴 후 잠잠히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가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합니까? 각자 자신의 기도를 떠올려 봅시다. 내 기도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떠올려 봅시다. 혹시 내 생각대로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강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생각한 해결책, 내가 생각한 은혜, 내가 생각한 구원, 딱 그렇게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내심 아쉬운 맘이 있지 않습니까? 내 기도가 부족한가보다 더 열심히 기도해야지 하면서, 그 목적은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지는 않습니까?

기도가 내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으면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내 생각으로만 내 삶이 가득차 있으면 예수님은 나에게 그리스도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직 너와 내가 상관이 없구나. 너는 나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아직도 네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다. 나를 그리스도로서 영접하지 못하고 있다. 네 삶의 주도권을 그리스도께 넘겨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서 주님은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4.

참 야속하지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야속한 시간이 닥칩니다. 반드시 닥칩니다. 그 야속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도 하고, 주변 그리스도인에게서 오기도 하고, 외부로부터 세상에게서 소위 ‘사탄 마귀’에게서 오기도 합니다. 외부에서 오는 야속함은 이겨내기 쉽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고 집중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매달리고 집중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 나를 야속하게 하시면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머니 마리아는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을 겁니다. 정색하고 나에게 ‘여자여’ 하면서 거절하다니, 당혹스럽고 창피스럽고 수치스럽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분노했을지도 모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기억해 보세요. 가나안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예수님께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넌 이방인이잖아. 자녀들의 빵을 개에게 던져줄 수 없다(마15:26).’ 개 취급을 하십니다. 얼마나 모욕적인 말입니까?

예수님의 이 냉정함. 그 야속함.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간절히 매달리고 매달렸는데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던 기도들. 그렇게도 냉정하게 나를 외면하셨던 순간들,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시는 것만 같았던 날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상 아래 개만도 못한가?’ 속으로 눈물짓던 날들...

하지만 그 야속함에 가로막혀 돌아서 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을 기억해 봅시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잘 믿어왔고, 그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며 살아온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칭찬받고 싶었던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실망하여 돌아가 버립니다만, 말씀을 찬찬히 읽어보면, 예수님은 절대 야속한 분이 아닙니다. 부자청년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셨습니다. 그의 신앙이 반갑고 기특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에게 더 성장할 힘이 있다고 생각하셨고, 그가 한 발짝 더 나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야속한 행동을 하실 때에는, 그 중심에 우리를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중심의 사랑을 보아야지 겉으로 느껴지는 우리의 느낌에 매달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짐짓 야속한 모습으로, 우리가 신앙의 껍질을 하나 더 돌파해내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다른 누구보다 우리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만큼 성장했고 무르익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신앙 없는 자에게는 이런 은혜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가차 없이 ‘회개하라’ 하실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부자청년은 돌파해내지 못합니다. 신앙의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지 못하고, 현실의 지평만 바라보고 좌절해 버립니다. 반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돌파해냅니다. 겉으로 드러난 주님의 야속한 표현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곁에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면, 개라면 어떻습니까?” 주님은 그 믿음의 돌파를 보시고 어떻게 하십니까? 여전히 개 취급을 하셨나요? 웬걸요.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시고 충만한 은혜를 내리셨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야속함은, 내 신앙이 한층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염원인지 모릅니다.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에게 주시는 또 다른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고,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은혜로 성장해야 할 때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5.

오늘 말씀의 제목을 ‘언제나 닥치는 위기’라고 적었습니다. 이 잔치에 닥친 위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닥친 진짜 위기가 뭘까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위기일까요? 아닙니다. 그건 삶에게 겪을 수 있는 수많은 해프닝들일 뿐입니다. 포도주야 없어도 그만입니다. 잔치 그냥 끝내면 됩니다. 잔치 한 번 망쳤다고 인생에 큰일 나는 것 아닙니다. 그런 위기는 수없이 닥쳐와도 괜찮습니다. 나의 삶의 겉모습이 변할 뿐이지, 내 존재 자체를 흔들어놓지 못합니다.

진짜 위기는 신앙의 위기입니다. 예수의 어머니는 지금 신앙의 위기를 맞닥뜨렸습니다. 아들을 아들로써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위대한 신앙의 여인이었는데, 그에게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기도로 엎드릴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여인이었는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냉정하고 야속한 외면이었고, 무시와 모욕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뜻밖의 선택을 합니다. 일꾼들에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대로 하세요.’ 위기에 무너져서 신앙을 내던지고, 하나님께 등돌리고, 예수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낮아져서, 나에게 무엇이 허락될지, 나에게 임할 하나님의 손길이 무엇인지, 순종으로 기다립니다.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6.

우리는 삶에 위기가 닥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생활의 위기는 될 수 있으면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위기는 매번 만나고 싶습니다. 그 위기가 내 신앙을 돌아보게 하고, 신앙이 한군데 고여서 정체되지 않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새로운 지평으로 돌파해 나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위기야 말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위기를 통해 신앙인으로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신앙의 위기가 매번 닥쳐오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 위기를 이겨낼 은혜를 이미 충만하게 채워주셨을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위기를 돌파해내고, 부자청년은 경험하지 못한,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이 경험했고, 어머니 마리아가 누렸던, 신앙의 새로운 행복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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