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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열정에 먹히지 마라참된 성전에서 예배하라(요한복음2:13-18)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3.20 21:41
▲ Scarsellino, 「Driving of the Merchants From the Temple」 (1580-1585) ⓒWikipedia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가지고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대전제를 통해서 우리는 신앙과 믿음, 구원이 어떤 교리적인 명제를 외우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느끼고 그와 함께하면서 궁극적인 기쁨을 누리는, 삶의 근본적인 변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근본적인 위기가 닥쳐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삶 속에서의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고서, 건조한 관계 무뚝뚝한 관계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라고 하는 건물, 장소, ‘예배’라고 하는 시간 혹은 행위 속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듯 하고, 실제적인 삶 속에서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가는 신앙, 그런 신앙에 위기가 닥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신앙 속으로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너 진짜 나 믿는 것 맞아?’ 하고 물으셔야 합니다. ‘나는 너 모른다!’ 하는 매정한 선언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진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맞는가?’ 하는 근본적인 고민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안일한 신앙에 위기가 닥쳐야 합니다. 그래서 그 위기를 극복해내고 참된 신앙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지난 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매정하게도 ‘나는 너와 관계가 없다’ 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그 관계없음의 이유를 보여주십니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큰 명절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해방의 절기이고, 구원의 절기입니다.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그 언제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높이 고취되어 있는 때입니다. 바로 그 때 성전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마주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의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허락하신 새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민하는 참된 신앙인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마주합니다. 그들은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있습니다. 성전세를 낼 수 있도록 돈을 바꿔주고 있습니다.

사실 성전 앞에 장사꾼들이 있으면 참 편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아무거나 내맘대로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정하는 대로 소와 양과 비둘기를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우리집 바로 옆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몇날 며칠 넘게 걸어와야 합니다. 그 먼 길을 소를 끌고 양을 끌고 와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 앞에 장사꾼들이 있으면, 돈만 가지고 와서 성전 바로 앞에서 제물을 사서 들어가면 되니 얼마나 편리하고 좋습니까?

환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성인 남성은 모두 성전세라고 해서 세금을 내야 하는데, 일인당 반세겔입니다. 은6g정도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제사장들이 반드시 두로에서 생산된 세겔 동전으로만 성전세를 내도록 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헌금할 때 어떻게 합니까? 물론 그 돈 자체에 마음을 담기도 해서, 때로는 깨끗한 새 돈이 생기면 헌금을 위해 따로 챙겨놓기도 하고, 예전에는 어르신들이 헌금할 돈을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리기도 하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성의 표현을 떠나서, 돈 자체를 어떤 돈을 내는지는 문제 삼지 않습니다. 만원짜리면 어떻고 천원짜리면 어떻습니까? 천원짜리 열장으로 냈다고 해서 꾸짖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성을 다하고 신앙을 가지고 감사한 마음으로 할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갑자기 교회법이 새로 생겨서, ‘앞으로 헌금은 무조건 달러로만 내야 한다. 그것도 무조건 100달러짜리로만 내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난리가 날겁니다. 달러를 어디서 구합니까? 또 신앙의 계획과 살림살이 형편에 맞게 드리던 헌금이 일괄적으로 액수가 정해지니까 일대 혼란이 올 겁니다. 그러면 아마 교회 입구에 달러 바꿔주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을까요?

성전 앞에서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세로 내야만 하는 두로 세겔을 바꿔주는 사람들이죠.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동전을 바꿔주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단순히 장사꾼들로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좋게 생각하자면 성전의 귀한 일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도움을 뒤집어 엎어버립니다.

좋은 뜻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본질을 침해하고 있다면 둘러엎어야 합니다. 없애 버려야 합니다.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해도, 예배를 돕고 원활하게 도와주는 일이라고 해도, 오히려 예배를 뒷전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부차적으로 만든다면, 과감하게 내 삶에서 내쫓고, 쏟아버리고, 엎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당신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 중요합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내 마음이 중요합니까? 그 마음의 표시인 세금이 중요합니까? 당신의 신앙생활은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18절에서 제자들은 시편의 말씀을 기억해냅니다. 그 말씀을 역설적으로 이해해냅니다.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시편 69편 9절입니다.

나는 주님의 집을 생각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열정의 방향이 어디입니까? 무엇을 향한 열정입니까? 앞에 예수님이라고 써 붙이고 교회라고 써 붙이면 어떤 열정이라도 문제없습니까? 뉴스에서 인터넷에서 요즘도 매일매일 보지 않습니까? 무슨 무슨 교회라고 써 붙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성경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말도 안 되는 짓들이 연일 보도되지 않습니까? 오늘도 당장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수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열정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지만 그 열정이, 어리석은 열정이, 그들을 삼켜버릴 것입니다. 땅이 거대한 입을 열어서 고라와 그 일당들을 삼켜버린 것처럼 그들을 삼켜버릴 것입니다. 열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열정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마태·마가·누가복음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열정, 하나님의 집을 생각한다고 하는 그런 열정의 표현 말고, 보이지 않는 기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간구, 그 뜻을 이루고 싶어 하는 순수한 바람,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무너져있다면 어떤 열정이라도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소와 양과 비둘기를 쉽게 조달할까? 궁리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성전세 바치는 일을 쉽게 할까? 궁리하지 말고, 그런 일에 열정을 쏟지 말고, 힘들고 귀찮고 어렵고 무의미하게 느껴질지라도, 묵묵히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하나님의 뜻만 붙들고 기도하는 그런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닫기 위한,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성전일랑 싹 다 허물어 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흘은, 부활의 신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침내 부활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끝까지 참고 견디며 마침내 십자가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그 삶의 기도,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 몸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고전6:19)’이라고 말합니다. 로마교회에게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성전과 제물이, 오늘 예수님이 지적하고 있는 성전과 제물의 본래 모습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뭡니까? 제물이 뭡니까? 그럴듯하게 건물 짓고, 살진 송아지 잡아 바치면 그것이 성전이고 그것이 제물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그 뜻을 내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성전이고 제물이고 존재하는 이유 아닙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성전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각오와 의지를 다지라고 제물이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바울은 ‘하나님을 성전에 유폐시키고, 나는 그 성전에서 도망쳐서 내 멋대로 살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쳤으니 할 일 다 했다’ 하고서 내 맘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이 거룩한 산제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는 참된 열정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나에게 있는 열정은 무엇을 향한 열정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덧입힌 나의 욕망에 열정을 쏟는 참담한 일이야 우리에게 없겠지만, 혹여라도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일에 열정을 쏟느라 찬양받으실 하나님을 소홀히 하지는 않습니까?

내 안에서 모든 열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든 열심을 그쳐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무력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성전은 바로 그런 장소입니다.

성전은 맘 편하게 들렀다가, 죄사함 받고 은혜 받고 돌아가면 되는 그런 장소가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나를 제물로 내려놓는 곳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는 곳입니다. 내가 죽었으나 내가 다시 살아나는 신비의 공간입니다. 그런 신비가 바로 내 몸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성전 삼아주신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만난 뒤에야, 다시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내가 무슨 열정을 쏟을까요? 어디에 열심을 낼까요?’ 그 물음과 함께 빌립보서의 말씀처럼,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어 밀면서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그 달음박질이 제대로 방향을 찾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는데, 나그네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뒤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아가야 할 앞과 나갈 힘이 되어주는 뒤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시편의 고백을 뒤이어 마저 읽어가다 보면,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조롱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지만, 그래도 주님의 칭찬만을 기뻐하며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눈이 빠지도록 하나님만을 기다리며, 하나님만을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그 찬양이 소를 바치고 황소를 바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아, 그대들의 심장에 생명이 고동칠 것이다.”

참된 열정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조롱당하고 모욕당하게 합니다. 그러나 참된 열정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그 기뻐하심으로 우리의 심장이 비로소 고동치게 될 것입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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