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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첫 번째 위기어둠 속의 감사(요한복음 3:16-21)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3.27 23:39
▲ 니코데모가 예수와의 대화에서 맞이한 인식의 위기는 우리가 겪어야 할 신앙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Getty Image

1.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선포함으로써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복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선포합니다. 그 구원에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오히려 구원의 길을 미워하고 막아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놀라워서, 이제라도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그 구원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하기만 하면, 구원의 자녀가 되도록 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명제를 이해하고 외우고 되뇌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실로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신앙의 위기가 닥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는 처음 단계는 하나님을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현실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초보적인 단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에서 그것이 신앙의 전부인양 오해하고 그것으로만 만족하고 살면, 오히려 우리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구경하고 감탄하고 박수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으로 들어와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가신 십자가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우리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먼저 보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 그 과정을 밟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충분히 보았고, 이해했고, 공감했고, 어느 정도 결단도 있으니, 이제 그 삶을 네가 직접 살아라’ 하나님의 초청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초청은, 신앙의 일차원적인 단계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편으로는 야속하고 아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함께 나누었던 것처럼 오히려 신앙의 위기가 되기도 합니다. 부자청년이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선 것처럼, 우리도 돌아서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이 바로 그런 위기를 돌파하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어야 합니다. 신앙은 나의 종교적인 선택이고, 내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꺼내 쓰는 내 소유물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선택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성전이 저기 멀리 있어서,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성전에 들락날락하면서, 성전에 있을 때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밖으로 나와서는 내 맘대로 살고,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성전은 다 허물어 버리고, 그리스도가 다시 세우는 성전, 그리스도가 삶으로 보여주는 십자가의 삶, 그것을 참된 성전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바로 주님의 성전이어서 온종일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아야 하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가져와서 번제로 바치고는 ‘이제 다 됐다’ 하고서 탁탁 손 털고 제 갈 길 가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내가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이 되어서 죽으나 사나 오매불망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보며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입니다.

새롭게 세워진 ‘삶’이라는 성전, 그 성전을 통해 이루어갈 복음의 현실. 이제 예수님은 한 차례 삶으로서 설교하신 후에 구원이 뭔지 다시 한 번 정리해 주십니다.

2.

니고데모라는 바리새파 지도자가 찾아옵니다. 밤에 찾아옵니다. 밤에 왔다는 것을 두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몰래 찾아온 것이라고도 해석하는데, 오늘은 어둠이라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예수님의 한차례 삶의 설교 후에도 사람들은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심지어 지도자라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사람들의 현실 아닐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듣고 바로 깨달으면 참 좋겠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니고데모는 그런 어리석은 우리를 상징합니다.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으나 실은 밤중에 어둠 속에 거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역시나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하면서, 기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엎드릴 때,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순종하는 것인데, 니고데모는 우리 인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 뒤에 일어나는 기적에만 집중합니다. ‘와, 대단하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말을 교정해 줍니다. “다시 나는 것, 거듭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기적을 보지 말고, 그 기적을 일으키게 한 거듭난 신앙을 보십시오.”

니고데모의 어리석은 머리가 갑자기 깨달을 리 없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니요?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기라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면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그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새번역성경을 사용합니다만, 이 말씀만큼은 개역성경이 더 친숙합니다.

3.

오늘은 바로 이 3장 16절 말씀을 하려는 것인데, 여기까지 오는데 서론이 참 길었죠?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배경 이야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이 없이 단순히 3장 16절 말씀만 따로 생각하면 우리는 커다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이 말씀 이후에 21절까지 예수님은 ‘아들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 그 아들을 믿어라. 아들을 믿으면 심판받지 않는다.” 이어서 빛과 어둠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혹자들이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듯이, 우리도 ‘예수를 믿으면 된다. 그 이름을 믿으면 된다. ‘예수, 예수’만 붙들면 된다’ 합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말씀일까요? 앞서 예수님이 비판하신 어리석은 믿음이 오히려 그런 모습 아니었나요?

내 삶에 대한 성찰 없이 ‘예수, 예수’만 붙들고 있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비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그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그런 믿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십니다. 그 삶을 보고 깨닫고 어리석은 믿음을 벗어버리고 참된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매우 정교하게 단어를 선택하십니다. ‘아들’이라는 말과 ‘이름’이라는 말, 그리고 ‘빛’과 ‘어둠’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혈통으로 아들이 아니고, 신적 존재라서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받들어 행하기 때문에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신적으로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특별한 이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우 흔한 이름입니다. 군중들이 빌라도 앞에서 풀어주라고 했던 죄수 바라바도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구원이시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도 흔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말합니다. 입으로는 말로는 늘상 구원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구원이라고 말하면서, 삶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이라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삽니다. 하나님이 구원이라면서 하나님께 등 돌리고 삽니다. 예수님이 콕 찍어서 ‘그 이름’을 믿으라는 것은 ‘당신네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말, 그 흔한 이름, 하나님이 구원이라는 그 말, 그 말을 말로만 하지 말고 진짜로 믿어라. 그렇게 살아라’ 하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는 것, 그것을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남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오늘 말씀의 자리에서는 ‘빛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표현하십니다.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처럼, 어둠이라고 하는 무지의 세상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빛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세상으로 나오라는 겁니다. 새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겁니다. 거듭나라는 겁니다.

‘예수의 삶을 보고, 그 삶으로 깨닫고, 그 삶을 사랑하고, 그 삶을 살아내라. 어둠속에서, 여기 어둠이 좋다고, 빛 같은 거 나는 모른다고, 도리질을 하지 말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그 삶으로 밝히 비춰주는 그 빛을 보아라. 내가 보기 싫다고 눈을 질끈 감아도, 내 눈꺼풀을 뚫고 나에게 강렬히 도전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마주해라. 그리고는 솔직하게 고백해라. 예수의 삶이 구원이고, 예수의 삶이 진리이고, 예수의 삶이 나의 삶이라는 것을 고백해라. 그리고 예수를 따라 살아라. 그것이 영생이다.’

4.

지난주에 주보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드린 글이 있습니다. 읽어보셨나요? 구미정 목사님의 글(1)과 정진규 시인의 시를 보내드렸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어둠 속에 있습니다. 어둠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빛으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사람들과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어둠을 몰아내 주셔야만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으니까요.

과연 그런가요? 지금 우리가 어둠 속에 있는 것은, 우리의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닥친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어둠 속에 있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은혜요 기회입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10:12)’ 하신 말씀처럼, 내가 구원받았다고, 내 신앙이 확고하다고, 스스로를 자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시를 묵상하며, 지금 어둠 속에 있음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 감사를 딛고, 더 큰 감사, 영원하고 완전한 감사, 하나님이 주신 아들의 삶을 내 삶으로 살아내는 그 감사에 이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 정진규 「별」

미주

(미주 1) 『지구 정원사 가치사전』 (동연, 2021) 중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신앙’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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