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유신체제의 시작과 에큐메니칼 교회들의 저항1970년대 진보교회 사회참여 ⑴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2.03.29 16:41
▲ 유신헌법 공포식 장면

한국 현대사에서 1970년대를 어느 기간으로, 또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사학계의 일치된 의견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1970년대를 1970년 10월 13일, 청계천 동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사건에서 시작하여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에 이르는 기간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1970년대는 당시 22세였던 한 젊은 노동자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한 절대 권력자의 죽음에서 막을 내린 ‘죽음의 시대’였다.

유신체제와 에큐메니칼 운동

정치적으로는 이른바 ‘유신체제’의 시대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장기집권욕이 구체화된 시기였고, 경제적으로는 소수 재벌중심의 수출지향적인 고도성장정책과 노동탄압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1) 유신정권의 정보부 정치, 반공주의와 남북관계의 정략적 이용, 긴급조치와 계엄령, 국가보안법에 의한 언론통제, 노동과 인권탄압, 빈부의 양극화, 이에 대한 학생, 재야 세력의 민주화 투쟁과 인권운동이 70년대 사회적 상황을 포괄적으로 규정한다.(2)

한국 개신교 내부 상황도 양극화되었다. 이른바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이, 복음화와 인간화, 영혼구원과 사회구원 등의 신학적 담론을 중심으로만이 아니라,(3) 국가권력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양분되어 있었다. 보수적 복음주의 진영은 근대화 정책과 도시의 팽창, 농어촌의 붕괴에 따른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불안정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수용하면서, 대규모 복음화 대회 등을 통해 급성장할 수 있었다.(4) 1973년 5월의 빌리 그래함 한국 전도대회, 1974년 대학생선교회가 주관한 ‘엑스플로 74’ 등은 한편으로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 잠재력과 보수진영의 세력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진보진영을 용공으로 매도하면서 탄압했던 유신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했다.(5)

1970년대 한국교회의 이른바 진보진영을 교파나 교단별, 혹은 교회별로 분류하기보다는 오히려 ‘에큐메니칼 운동권’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교파나 교단 안에서도 서로 다른 성향의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에는 도시산업선교, 도시빈민선교, 기독학생운동, 인권운동, 재야 민주화운동 등을 중심으로 개신교 진보진영이 초교파적으로 연대했고 또 조직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운동의 배경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6)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있었기 때문에 진보진영 운동이 에큐메니칼 운동과, 진보진영이 곧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동일시될 수 있었다. 70년대 한국 개신교 진보진영의 사회참여는 도시빈민, 노동자, 학생, 재야 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인권운동’과 유신체제에 대항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과 민주화’를 내용으로 하는 70년대 개신교 진보진영의 사회적 참여의 신학적 기반은 무엇이었을까?

개신교 진보진영의 사회참여와 신학적 기반(7)

한국교회의 사회참여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고 그 역사는 1925년으로 소급될 수 있다. 1925년 당시 국제선교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의 회장인 존 모트(John R. Mott)의 방한을 계기로, 장로교, 감리교, YMCA, YWCA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조선 기독교 대표자 회의’가 IMC 가입을 논의, 마침내 1926년에 IMC에 가입하게 된다. ‘조선 기독교 대표자 회의’는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에 5명의 대표단을 파송한다. 이 대회에 참석했던 신흥우(당시 한국 YMCA 총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회적 구속 사업에 있어서 사실 그대로 증인이 될 수 있다. … 만약 교회가 이에 실패하여 농민들이 그리스도에게 기대하는바 사회적 구원과 민족적 구원이 제거된다면 교회는 전적으로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8)

농촌사회에 대한 관심, 사회적 구원과 민족적 구원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선교 초기부터 한국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의 사회참여가 처음부터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1970년대 진보진영 사회참여 역시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점은 농촌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고, 개인구원적 전도, 시혜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디아코니아 형태로 전개되었던 초기의 사회참여 형태가 이 시기에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신학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한편에서는 ‘수입신학’과 ‘에큐메니칼 논의의 수평적 전이’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의 신학적 갈등과 교회의 분열을 ‘서구 신학의 대리전’으로 볼 수 있는 근거도 물론 있다.(9) ‘하느님의 선교 신학’, ‘세속화 신학’, ‘토착화 신학’, ‘정치신학’, ‘해방신학’ 등 서구 진보신학운동의 중심이었던 세계교회협의회와 정교분리와 영혼구원, 복음전도를 초점으로 한 복음주의 진영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한국에서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혐의를 받을만하다.

그러나 서구에서 일어난 신학적 논쟁과 갈등의 대리전에 어느 진영이 더 충실했는지는 이미 드러난 결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70년대 진보운동의 신학적 전거로서 ‘민중신학’이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한국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면, 한국교회 진보진영이 단순한 서구 진보신학의 대리전을 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당시 한국사회가 이른바 제3 세계 국가들이 일반적으로 직면하고 있었던 문제점들을 넓은 의미에서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예속적 근대화의 과정에 함께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운동, 특히 제3 세계의 문제와 대화했던 에큐메니칼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신학적 대화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 아니 오히려 서구 신학이 제3세계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에큐메니칼 대화가 얼마나 신학을 풍요롭게 하는지를, 가장 콘택스츄얼한 신학이 가장 보편적인 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시기가 바로 70년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70년대 한국 개신교 진보진영이 세계 에큐메니칼 신학운동을 수동적으로만 수용한 것이 아닌 것은 1972년 12월 29일부터 1973년 1월 12일까지 태국의 방콕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CWME)가 ‘오늘의 구원’을 주제로 개최한 국제협의회 이후, 같은 주제의 협의회를 한국에서 다시 열어(1973년 4월) 대회에 대한 보고와 함께 한국적 상황에서 ‘오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검토한데서 드러난다.(10)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가르고, 구원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사이의 긴장관계를 해소하려는 것을 비판하면서 구원을 통전적으로 이해하는데 기여한 ‘오늘의 구원’ 대회는 결과적으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과의 긴장을 가져왔지만, 구원을 사회적, 정치적 정의 속에서 드러나는 과정으로 이해한 진보진영의 사회참여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했던 것이다.(11)

70년대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적 전거를 검토하기 위해서 우리는 60년대의 상황과 신학운동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는 4,19 학생혁명과 5,16 박정희 군사 구테타, 한일협정,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월남전 파병 등 국내적으로는 근대화와 개발독재, 수출지향적 경제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결과적으로 농어촌의 이농과 농가부채의 증가, 도시빈민형성, 인권과 언론자유의 제약 등이 뒤따랐다. 세계적으로는 큐바 혁명, 중국의 문화혁명, 베트남 전쟁, 가톨릭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냉전체제의 강화, 맑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기술문명의 급진적 발전 등 제3세계의 종속적 발전과 구조적 빈곤, 인종주의, 혁명 등이 신학적 담론으로 등장했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교회 진보진영의 사회참여를 위한 신학적 담론은 거의 동시적으로 등장했다고 보여진다. YMCA의 ‘책임사회론’,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인간화와 중간집단 교육’,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론’, 도시산업선교 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들 운동들은 대부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세속화 신학’, ‘혁명의 신학’, ‘해방신학’ 등이 대표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독일 고백교회의 ‘바르멘 신학선언’, 디트리히 본회퍼(D. Bonhoeffer) 신학(12) 등이 소개되었고, 브라이덴슈타인(Breidenstein),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 1975년 방한), 구스타포 구띠에레츠(G. Gutierrez), 제임스 콘(James Cone, 1979년 5월 방한), 대만 출신 신학자 송(C. S. Song, 1972년 4월 방한) 등의 신학자들이 한국교회 진보진영의 사회참여의 신학화에 자극을 주었다.(13)

특히 브라이덴슈타인은 당시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의 도시선교위원회를 중심으로 기독학생운동(KSCF)에 큰 신학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하비 콕스의 ‘세속화 신학’, 리처드 쇼울의 ‘혁명의 신학’,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본회퍼의 신학 등을 소개하는 동시에 산업사회의 근로자, 도시 빈민을 돕기 위한 구체적인 접근방법 및 전략 등을 지도하였다.(14) 그의 책, ‘학생운동과 사회정의’는 판금되었고 그도 결국 정부로부터 추방당한다.(15) 대만 신학자 송(C.S.Song)의 방한과 그의 아시아 해방신학은 민중의 삶을 이야기 신학으로 형상화하고 한국 민중의 고난을 아시아의 틀에서 해석할 수 있는 상상력을 주었다.

‘희망의 신학’으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위르겐 몰트만은 1975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 ‘민중의 투쟁 속에 있는 희망’이라는 제목의 강연 등을 통하여 당시 고난받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16) 민중의 운명과 자유와 통일을 위해 투쟁하면서 민중신학을 막 탄생시키고 있던 한국의 신학자들은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17) 1979년 5월에는 흑인 해방신학자 제임스 콘(J. Cone)이 방한, 흑인 체험과 흑인 영가의 해방신학적 가능성을 강연했고, 흑인 해방신학은 한국 민중문화의 신학적 가능성을 더욱 확인하게 했다.(18)

미주

(미주 1) 박찬식, “야만의 시대, 인간해방의 횃불 전태일”, 이병천·이광일 편, 『20세기 한국의 야만 2』 (서울: 일빛, 2001), 169-177; 이광일, “YH 노동조합투쟁과 유신체제의 붕괴”, 같은 책, 203-207 참고.
(미주 2) 이근성, “유신정권과 재야세력의 등장”, 한승헌 외, 『유신체제와 민주화 운동』 (서울: 춘추사, 1984), 21-42 참고.
(미주 3) 채수일, “한국교회의 선교신학”, 한국선교신학회 엮음, 『선교학 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283-284 참고.
(미주 4)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성장한 종교는 기독교만이 아니다. 당시의 한국상황, 예를 들면 사회구조적 불안정과 불안의식, 상대적 박탈감의 증대, 공동체의 붕괴, 정체성의 상실, 가치혼란과 같은 상황이 모든 종교의 성장을 조장했다. 이원규, 『한국교회 어디로 가고 있나』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75 참고.
(미주 5)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II』 (서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845-894 참고.
(미주 6) 당시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는 개신교 사회활동의 사령탑이었다는 김영일의 지적은 정당하다. 김영일,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 한승헌 외, 『유신체제와 민주화 운동』, 45.
(미주 7)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을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에서 정리하고 평가한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의 논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호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특히 77-83 참고.
(미주 8) 전택부,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사』 (서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9), 105-109 참고.
(미주 9) 이덕주, “한국 교회사 속에 나타난 진보와 보수: 그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 「기독교사상」, 2002년 1월호,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5 참고.
(미주 10)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I』 (서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234-239 참고.
(미주 11) 말린 벤엘데렌, 『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 이형기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119-120 참고.
(미주 12) 본회퍼의 ‘옥중서신’을 번역한 고범서 교수는 1970년 4월, “독재정권하의 종교자유”라는 글에서 독일 고백교회와 본회퍼의 국가권력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소개했다. 기독교사상 편집부 편, 「한국의 정치신학, 기독교사상 300호 기념논문집 4」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4), 290-299 참고.
(미주 1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 운동 I』, 40.
(미주 14) 김영일,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 위의 책, 55.
(미주 15)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I』, 99, 102.
(미주 16) 민중신학자 서남동이 격찬을 아끼지 않았던 몰트만의 강연, “민중의 투쟁 속에 있는 희망”은 「한국의 신학사상, 기독교사상 300호 기념논문집」 (기독교사상 편집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3]), 387-403에 실려 있다. 몰트만은 강연에서 신학과 신학자의 삶의 연관성을 강조했고, 세계의 재판관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한 사건(마태 25장)과 예수의 민중과의 식탁공동체를 부각하면서 민중을 자신의 역사의 주체로 해석함으로써 민중신학자에게는 물론 민중교회운동에도 자극을 주었다. 서남동, “예수, 교회사, 한국교회”, 기독교사상 편집부 편, 「한국의 신학사상」, 362-377.
(미주 17) 위르겐 몰트만,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채수일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5.
(미주 18) 민중문화의 신학화 작업은 현영학 교수의 탈춤에 대한 신학적 이해, 김용복 교수의 민중의 사회전기의 신학적 해석에서 돋보인다. 현영학, “한국탈춤의 신학적 이해”, 『민중과 한국신학』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2), 384 이하; 김용복, “민중의 사회전기와 신학”, 위의 책 참고.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관련기사 icon두 기둥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