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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기둥1970년대 진보교회 사회참여 ⑵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2.04.05 16:23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

▲ International Missionary Conference in Willingen, Germany ⓒWCC

다양한 신학적 배경과 담론들이 70년대 진보진영의 사회참여의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지만, 크게 보아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이 그 근저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선교’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2년 독일 빌링엔(Willingen)에서 개최된 국제선교협의회(IMC) 총회에서였다.(1) ‘십자가 아래에서의 선교’를 주제로 열린 국제선교대회에 참석했던 당시 바젤 선교회의 회장이었던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이 독일어 보고서에서 ‘하느님의 선교’라고 표현한 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2) 그 후 ‘하느님의 선교’는 IMC의 핵심적인 신학개념이 되었고 사회참여적 진보진영의 선교신학적 담론이 되었다.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는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서구교회를 지배했던 식민지 선교에 대한 반성과 제3세계 교회의 정치적 독립과 함께 등장했다. ‘하느님의 선교’는 선교의 방법이 서구화를, 선교의 목적은 비그리스도인의 회개와 세례, 그리고 보이는 교회의 확장을 의미했던 서구교회의 지나치게 유럽 중심적이고 백인 중심적인 사고의 틀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생긴 것이다.

‘하느님의 선교’ 신학은 선교의 주체를 하느님 자신으로 이해하고, 선교의 목적을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배권을 수립하는데, 곧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두었다. 이로써 선교 영역의 경계와 선교활동의 한계가 동시에 철폐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온 세계, 나아가 온 우주가 하느님의 선교, 곧 하느님의 구원사의 장이 되었고, 하느님의 약속의 빛에서 조명되었다.(3)

‘하느님의 선교’가 구체적으로 실현된 1960년대는 세계적으로는 냉전체제가 가속화되고, 라틴 아메리카의 군부독재와 경제적 예속이 심화되었으며, 아시아는 구조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박정희 군부의 쿠데타와 개발독재가 시작되고 있었다.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사회발전과 경제문제, 국제문제에서의 정의와 평화, 세속화와 ‘책임사회론’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빌링엔 세계선교대회가 끝난 2년 후,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2차 총회는 ‘예수 그리스도 - 세상의 희망’을 주제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교회의 선교’, 냉전체제, 인종 및 민족분쟁으로 분열된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책임을 강조하였다.(4) 그 후 진행된 세계교회협의회 역대 총회들과 1958년 가나, 1972년 방콕, 1980년 멜버른, 1989년 산 안토니오, 1996년 살바도르 브라질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들을 추적하면 이슈들이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하느님의 선교 이념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5)

‘하느님의 선교’ 신학이 한국 교회적 차원에서 최초로 논의된 것은 한국기독교연합회가 1969년 1월 27일 주최한 ‘제2회 전국 교회 지도자 협의회’에서였다. ‘오늘의 한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선교’를 주제로 열린 이 협의회는 ‘근대화에 수반되는 상황의 변화와 선교대상의 변모에 따라 교회의 구조도 변형되어야 하며, 교회의 이념적 개방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결의했다.(6)

1968년 5월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로 취임한 김관석 목사는 자신의 선교신학적 기치를 분명하게 ‘하느님의 선교’로 정했고, 이는 70년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활동의 신학적 기반이기도 했다. 한국교회 진보진영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파생하는 도시화와 농촌의 붕괴에 대응하기 위해, ‘하느님의 선교’ 신학을 근거로, 개발독재가 추진한 근대화의 그늘에서 고난받는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을 중심으로 농촌개발과 도시산업선교를 전개했던 것이다.(7)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을 지향하는 ‘하느님의 선교’ 신학은 선교의 지평을 무한으로 확대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의식과 역사참여를 고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적 관심을 충족시키는 데는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복음은 인간과 세계를 총체적이고 통전적으로 구원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해방에 대한 앞선 관심이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구조와 체제의 변혁이 인간성의 변화에 우선한다는 생각은 세계의 구원은 구원받은 인간에 의해 가능하다는 생각과 통합될 수 없었다. 이런 신학적, 사회참여의 급진성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오히려 당시 군부정권의 탄압이 우리 교회의 성장을 위축시켰다고 할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선교’는 급변하는 기술과학 문명의 문제와 더욱 복잡해진 생태계의 파괴 현실, 빈곤의 문제, 다원종교 사회 안에서의 복음화 문제를 극복하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가졌다. 또 ‘하느님의 선교’ 신학은 교회 안에서 복음화냐 인간화냐, 영혼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양적 성장이냐 내적 성숙이냐 라는 양극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 시기 한국교회 보수진영의 대규모 복음화 대회들이 정부의 지원 하에 조직되었고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하느님의 선교’ 신학이 선교의 경계를 타파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경계를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곧 보수와 진보, 복음화와 인간화, 영혼구원과 사회구원 사이의 경계가 그것이다.

1970년대, 유신정권의 장기집권 기획으로 양심적 지식인들이 박해를 받고, 민중이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진보진영은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참여했다. 수많은 청년 학생, 교역자들이 구속되었고, 지식인들은 해직 당했다. 민중과 더불어 고난 받으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며 함께 희망을 나눈 경험으로부터 ‘민중신학’이 탄생했다. 민중신학은 세계 에큐메니칼 진영의 주목을 받았으며, 하느님의 선교신학이 한국에서 신학화된 최초의 한국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

▲ 1936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공연된 봉산탈춤의 양반놀이. ⓒ한국문화재재단

민중신학은 박정희 정권(1961년부터 1979년까지 집권)이 추구했던 한국사회의 개발독재에 의해 희생당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의 고난과 투쟁을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거기에 참여했던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탄생한 한국적 해방신학, 혹은 한국적 사회참여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남동, 김용복, 현영학과는 달리 안병무는 민중신학을 해방신학이나 사회참여 신학의 큰 틀에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했고, 의식적으로 해방신학을 읽지 않았다. 그가 ‘민중신학’이라는 말을 굳이 고집한 것은 에큐메니칼 신학지평에서 민중신학의 고유한 위치를 확보함으로써 한국신학의 세계화에 기여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민중의 현실, 고난경험과 그것의 신학화의 고유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70년대 한국 민중의 현실은 당시 이른바 제3 세계 민중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제3 세계 신학과의 대화의 단절은 결과적으로 민중신학의 더 풍요로운 발전을 늦춘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물론 서남동, 현영학, 김용복 등은 라틴 아메리카, 흑인 해방신학 등 제3 세계 신학과의 대화에 열린 자세를 보였다. 서남동은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 같은 독일 신학자는 물론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띠에레즈(G. Gutierrez), 흑인 해방신학자 제임스 콘(James Cone), 심지어는 일본 신학자 아라이 사사쿠를 읽고 자신의 민중신학을 형성하는데 영향 받았다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8)

민중신학 탄생의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은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전태일의 분신은 60년대의 ‘민중을 위한 선교’에서 ‘민중과 함께 하는 선교’로 전환하는 분수령이었다. 교회는 민중이 더 이상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교의 동역자이며 주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은 민중 사건 속에서 민중과 함께 고난 당하고 민중을 해방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었다. 기독 학생들은 도시빈민지역과 노동현장에 뛰어 들었고, 이들과 함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증언하고 투쟁했던 일부 신학자들과 교수들은 해직되고 투옥되었다. 1세대 민중신학자들로 불리는 이 시기의 신학자들은 안병무, 서남동, 현영학, 문동환, 김용복, 서광선 등이었다.

민중신학은 본래 민중신학자들이 스스로 이름 붙인 신학운동이 아니었다. 민중신학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김형효(당시 서강대 철학과 교수)와 서남동(1918-1984, 당시 연세대 신학과 교수)의 논쟁 때문이었다. 민중은 민중신학자들의 추상적인 허구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중신학의 투쟁적인 열광주의를 경고한 김형효의 글에 대하여 서남동이 ‘예수, 교회사, 한국교회’라는 논박문에서 ‘민중신학’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9)

그 후 서남동은 성서의 해방전통과 한국 민중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증언이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서로 합류하는 것을 밝히는데 자신의 민중신학적 관심의 무게를 두었다.(10) 이 과제를 위해 서남동은 ‘사회사적, 성령론적 통시적 방법론’을 활용했다. 사회사적 방법을 통해 서남동이 시도했던 것은 ‘계시의 하부구조’, 즉 민중의 구체적인 삶의 복판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행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계시가 역사적 사건으로 일어난다는 그의 성육신적 신앙고백과 다르지 않다. 성령론적 통시적 해석방법론은 예수 사건을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민중사건 속에서 다시 반복되는 사건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안병무는 이런 방법론을 역사의 ‘맥’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975년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민주인사들을 환영하는 예배에서 안병무는 ‘민족, 민중, 교회’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는데, 여기에서 안병무는 민족 개념이 지배계급에 의해 현상유지(status quo)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오용된 역사를 지적하면서 민중을 민족의 실체이며 민족사의 담지자로 파악하였다. 그 후 안병무는 마가복음의 ‘오클로스’(ochlos) 개념과 ‘갈릴래아’를 한국의 상황에서 재조명하는 신학적 작업을 전개하면서 민중사건을 예수 사건의 중심에 세웠다.

예수와 12제자의 주변부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오클로스’, 곧 민중을 그는 예수 사건 이해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서구 신학이 안고 있던 역사적 예수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안병무에게 민중은 예수 사건의 조역이 아니라 주역이며, 예수 사건의 담지자이며 전승자였다. 민중사건은 하느님이 벌이는 선교인 것이다. 그리고 전승의 형식은 ‘이야기’ 혹은 ‘유언비어’였다.

그래서 현영학은 민중의 몸의 언어(탈춤)에, 김용복은 민중의 ‘사회전기’에, 문동환은 ‘민중교육론’에 그리고 서광선은 ‘정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11)에 관심을 기울였다.

민중신학 형성 초기에 있어던 가톨릭 신학자들의 참여도 간과될 수 없다. 서인석은 구약성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이스라엘의 법정신을 조명하였다. 또 가톨릭 시인이었던 김지하는 서남동의 민중신학적 상상력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김지하의 담시, ‘소리의 내력’(1972년)과 그의 옥중작품 메모인 ‘장일담’은 서남동으로 하여금 신학의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이야기 신학’을 발전시키고 ‘한’(恨) 개념을 신학적으로 성찰하게 하였다.

미주

(미주 1) 한국교회는 전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대표를 파송할 수 있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유호준 목사와 김인영 목사가 참석하여 고난을 겪고 있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난민촌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보고했고, 참가자들은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회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빌링엔 선교대회 참가결과가 어떻게 얼마만큼 한국교회에 알려지고 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Martin Poerklen, Der neue Auftrag: Persoenliche Eindruecke von der Weltmissionskonferenz Willingen 1952, Stuttgart 1952, 30-31; Walter Freitag, Missions zwischen Gestern und Morgen, Stuttgart 1952, 18-25 특히 25쪽 이하 참고.

(미주 2) 데이비드 보쉬, 『변화하고 있는 선교』, 김병길·장훈태 공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576-581 참고.

(미주 3) Georg F. Vicedom, Missio Dei, neu hrsg. von Klaus W. Mueller, Nuernberg 2002, 38; 테오 순더마이어는 ‘하느님의 선교’ 개념이 빌링엔 대회 직후부터 이미 비체돔의 ‘구원사적 모델’과 호켄다이크의 ‘약속사적 모델’로 분리되어 발전된 것을 지적한다. 테오 순더마이어, 『선교신학의 유형과 과제』, 채수일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18-27 참고.

(미주 4) 말린 벤엘데렌, 『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 이형기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63-83 참고.

(미주 5) 세계교회협의회 엮음, 『세계교회협의회 역대총회 종합보고서』, 이형기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Michael Kinnamon and Brian E. Cope(ed.), The Ecumenical Movement - An Anthology of Key Texts and Voices, WCC 1997 참고.

(미주 6)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 운동 I』 (서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52-53.

(미주 7) 이 시기에 ‘하느님의 선교’에 대한 보다 깊은 신학적 이해작업과 ‘하느님의 선교’를 구체적인 선교현장에 적용하는 노력이 구체화되었다: 현영학, “신의 역사창조 행위”(1975년 4월); 조화순, “산업선교를 위한 교회의 과제”(1976년 5월); 변선환, “오늘의 선교와 그리스도인의 자유”(1977년 2월); 박순경, “선교의 신학”(1977년 10월); 이장식,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검토”(1977년 6월); 문동환, “하나님의 선교와 농민선교”(1979년 1월). 기독교사상 편집부 편, “한국역사와 기독교”, 「기독교사상」 300호 기념논문집, 2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3) 참고.

(미주 8) 한국의 신학자들이 일본 신학자의 글을 인용하는 것이 기피되던 상황에서 서남동 교수는 아라이 사사쿠의 『예수의 행태』(대한기독교서회)를 번역하였고, 이 책은 성서의 사회경제사적 해석 논의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했다.

(미주 9) 「기독교사상」, 1975년 2월호.

(미주 10)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서울: 다산글방, 2000), 313 참고.

(미주 11) 서광선, “정치신학으로서의 한국 민중신학”, 서광선, 『한국기독교 정치신학의 전개』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 77-103.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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