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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만들어야 할 다른 세상삶의 경이를 억누르는 지배의 욕망을 넘어(마가복음 10:35~45)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04.06 15:59

사순절 다섯째 주일 오늘 우리는 예수의 세 번째 수난예고에 이어지는 마가복음의 본문말씀을 함께 마주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정도가 무엇인지 아주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예고(10:32~34)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뒤바뀌는 예루살렘으로의 길, 곧 갈보리 언덕의 고난과 골고다의 죽음, 그러나 동시에 부활이 대비되는 긴장과 갈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죽음과 삶, 죽임과 살림의 대결 현장에서 삶의 길, 살림의 길이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묻습니다. 두 제자는 태연스럽게 말합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제자들의 그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오해한 데서 비롯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권력을 쥐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되리라는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그 때 자신들도 한 자리씩 보장해달라고 청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묻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이 말씀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자기들 방식대로 이해하고 자신 있게 답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확신에 찬 제자들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던 것일까요? 일단 공감을 표합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헛된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아신 예수께서는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 대화에 등장하는 잔과 세례에 대한 이해에서 제자들과 예수는 엇갈립니다. 여기서 잔은 고난의 쓴 잔을 뜻하며(이사 51:17; 예레 25:15; 마가 14:36), 세례는 그와 직결되는 것으로서 죽음에 잠기는 것, 곧 피에 잠기는 것을 뜻합니다(누가 12:50). 제자들이 그 의미를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그저 의례적인 행위, 통과의례 정도로 알았습니다. 그러니 머뭇거림 없이 자신 있게 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사건 현장에 동참할 수 있는지 묻고 있는데, 제자들은 의례를 통과하면 된다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엇갈리는 대화 말미의 이야기는 제자들이 기대하고 청탁한 대로 그 결과가 예정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참뜻에 따라 결정될 일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 대화에 이어 미묘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나머지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분개합니다. 왜 분노했을까요? 다른 제자들 역시 똑같은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탁하는 제자들이 자신들을 제치고 특권적 지위에 오르려 하는 것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서로를 경쟁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곁에 불러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이 말씀은 세상의 정치권력에 대한 예수의 이해를 보여 줍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정치권력의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비단 정치적 권력자들을 향한 말씀만은 아닙니다. 한 자리를 보장받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기대 또한 그 정치 권력자들의 지배의 욕망을 닮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역시 세상 통치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보신 것입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마가복음은 민중들의 시선에서 이른바 지도자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동기를 매우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제자들도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제자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인간의 마음 가운데 도사린 권력에의 욕망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라다니면서도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딱 꼬집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예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이 길이 과연 어떤 길인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일깨워 주십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일러 주십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영광의 메시아 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로마군대를 전쟁으로 물리치고 다윗의 후손이 세우는 새로운 나라를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대를 안고 있는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길을 향하고 있습니다.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빌라도가 말하지요. “당신 같은 사람이 더 위험하다.” 사랑의 삶은 권력의 위계관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길은 고난의 메시아, 섬김의 메시아의 길입니다.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한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입니다(이사 52:13~53:12). 우리가 대개 기억하고 있는 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이사 53:1~5)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지난달 18일 서울 혜화역 승강장에서 서울교통공사 규탄 및 장애인 권리예산 보장 등 촉구 선전전을 하고 있다. ⓒ뉴시스

성서의 세계를 다른 모든 사상과 구별 짓게 해주는 가장 위대한 통찰입니다. 성서의 세계는 위대한 많은 사상들과 그 정신을 공유하고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찾는다면 바로 이 통찰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눈길을 돌리지 못했지만 세상의 부조리 가운데 있는 고난의 현장, 그 고난을 몸소 겪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그 고난의 연대 가운데서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구원의 사건이 된다는 믿음은 그 진실에 대한 믿음의 극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진실을 몸소 보여주셨고, 바로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진정한 구원의 삶을 누리게 해주신다는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사야의 선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온전히 구현되었다고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오늘 고난 받는 사람들의 삶을 주목하고 그 의미를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또 다른 영광의 메시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진실에 우리를 내맡기고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의 삶의 현장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일회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사건은 마치 화산맥처럼 이어집니다(안병무). 놀랍고 장엄한 사건의 순간뿐만 아니라 아무 일 없는 듯한 순간마저도 면면히 흐르는 화산맥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전혀 눈길을 끌지 못했던 일상의 어떤 일을 통해서, 또 저마다 겪을 수 있는 어떤 경험을 통해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우리는 진정한 구원의 길에서 삶의 의미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제주4.3사건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그 사건은 불순분자의 책동으로 벌어진 비극이 아닙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의 원초적 조건인 냉전체제가 막 형성될 즈음 그 분단체제를 고착시킬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당연한 민중의 염원이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차마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그 비극의 사건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그렇게 처참한 비극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환기하고자 함이며, 그 비극적 사건을 불러일으킨 체제의 대결을 끝내고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염원을 다시 모으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불의에 저항하고 그렇게 저항하는 이들을 무참히 짓밟은 권력의 폭력성을 드러낸 것 자체로 그 사건은 구원의 의미를 지니지만, 그 진실을 새기는 우리 가운데 다시 살아나는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비극을 넘어서는 사건이 됩니다.

그 참극은 무시무시한 군사작전을 개시하는 순간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의 불을 지피고 편을 가르는 일이 벌어지는 곳에 그 참극은 잠재되어 있습니다. “장애인의 일상적인 생활을 위한 이동권 투쟁이 수백만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 부조리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얼마나 끔찍한 말입니까? 이른바 ‘언더도그마’, 곧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는 논리에 부합하는 사태인 것으로 진실을 호도하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사태가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그 불의를 바로잡는 것은 기왕에 불편함을 몰랐던 사람들에게도 더욱 편안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진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진실을 호도하여 ‘장애인’과 ‘시민’을 가르고, 약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현실이 그 사회 구성원에게 어떤 책임을 요청하고 있는지 외면하는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기에도 모자랄 판에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가 공당의 대표로서 공공연하게 행세한다면 상처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자(老子)는 승전을 상례 치르듯 하라고 했습니다. 상대의 손실과 아픔을 헤아리라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는 집권세력은 이미 글러먹었습니다. 승자독식의 사회를 노골적으로 천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의할 뿐만 아니라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세상의 권력자들을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고 계신 뜻을 잘 새겨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결코 허망한 이상이 아닙니다. 진실로 인간을 살리는 길입니다. 증오는 사랑에, 불의는 정의에, 지배는 섬김에, 독점은 나눔에, 경쟁은 협동에 자리를 내주는 길입니다. 그 때서야 인간의 삶은 평화로워지며 그 가운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삶은 그저 금욕이거나 고난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이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뒤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훨씬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에 대한 상상력을 가로막고 우리 삶을 옥죄는 체제에 맞서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지키고 향유하기 위해 나서야 합니다. 한 교우의 이야기처럼, 꽃 한 포기 가꾸며 느끼는 경이감을 안다면 그 풍요로운 삶은 가능합니다. 교회가 그 삶을 일깨우지 못하고 지배의 법칙을 따르는 세상의 가치를 그대로 용인하고 부추기고 있어 문제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섬김의 길로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구원의 세계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신실하게 따르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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