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용복 선생은 민중신학자로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민중신학이 태동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중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공헌했고,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의 발전에 호흡을 맞추어 가며 민중신학의 지평을 끊임없이 확대했다. 그는 민중의 사회전기라는 관점과 방법을 가지고 성서의 이야기와 민중의 이야기를 독특하게 엮으며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민중과 더불어 느끼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길을 모색했다.

김용복 선생은 민중의 메시아적 실천에 근거한 경세사상을 펼쳤다. 그의 경세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정치경제’이다. 하나님의 정치경제는 사회경제적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로 표현되고 살림의 경제로 구현된다.

이 글에서 필자는 고 김용복 선생의 경제사상이 갖는 의의를 다각적인 측면에서 음미하면서 고인을 추모하고자 한다.

김용복 선생의 경세사상과 민중신학

김용복 선생의 경세사상은 그가 민중신학자로서 기왕에 제시하였던 여러 관점과 명제에 연결되어 있다. 민중의 사회전기, 메시아 정치, 민중 주체성, 종(從)의 도(道) 등은 김용복 선생의 민중신학을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모티프들이다.

메시아 정치

1990년 이전까지 김용복 선생의 신학에서 핵심적인 주제를 이루었던 것은 민중의 사회전기를 관통하는 ‘메시아 정치’였다. 그는 이 주제를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정치신학과 문화신학의 영역에서 다루었다. 민중의 사회전기의 신학적 입지점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계약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나는 역사적 틀이다. 따라서 성서의 이야기와 민중의 사회전기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 둘을 분리하면,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사는 초점을 잃는다. 성서의 이야기와 민중의 사회전기는 구체적인 상황과 그 안에서의 민중의 삶을 매개로 해서 서로 엮어져 구원사의 구체적인 핵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 핵이 곧 메시아 정치다.

김용복 선생은 메시아 정치와 메시아주의를 구별하고, 메시아주의의 권력정치적 성격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메시아 정치의 해방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메시아 정치가 해방적 성격을 갖는 것은 그것이 권력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왔고,(이사 53장) 자신을 비웠다.(빌립 2,5-11) 권력의 행사와 폭력을 포기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세상을 지배하는 죄의 권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 십자가상의 죽임에서 종말론적인 역전이 일어난다. 그는 죄의 가장 큰 권세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그것을 무력화시켰다.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죽임의 권세가 지배하는 현실을 넘어서서 만물을 새롭게 형성하고 갱신하는 메시아 정치의 현실성과 그 미래가 열린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김용복 선생은 역사 속에서 고난당하고 그 고난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갈망하는 민중의 모습을 본다. 역사적으로 보면 민중은 삶의 모든 영역과 틀에서 권력을 박탈당했다. 민중은 그들을 누르고 그들에게서 삶의 기회를 빼앗고 그들의 생각과 감정마저도 조작하려는 엄청난 폭력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그 폭력은 민중을 영원히 죽이지는 못한다. 민중은 모든 것이 왜곡되고 굴절된 현실 속에서 자신의 갈망과 희망을 잃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살아감으로써 폭력의 지배를 무력화한다. 폭력을 넘어서 있는 곳에 민중의 미래가 있기에 권력의 형성과 그 행사를 포기하고 종의 모습으로 서로 봉사하며 서로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가 민중이 지금 살아가고자 하는 현실이고 또 앞으로 살아가며 형성하여야 할 미래의 현실이다.

성서를 관통하는 메시아의 이야기와 역사 속에서 엮어져 가는 민중의 이야기를 이렇게 서로 연결하면서 김용복 선생은 민중신학의 형성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매우 중요한 통찰에 이른다. 그의 기본명제는 메시아는 민중적이고 민중은 메시아적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렇게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고 아무런 권력도 갖지 않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이다. 민중의 주체성은 민중의 메시아적 성격의 본질이다.

민중신학의 관점과 방법

만일 민중신학이 민중의 주체성에 충실하려면, 그 관점과 방법은 민중의 주체성을 손상하지 않아야 한다. 민중신학은 어떤 고정된 사고의 틀을 고집함으로써 민중의 삶의 총체성을 가리거나 민중이 역사를 통해 표현하는 삶의 구체적 성격을 놓쳐서는 안 된다. 민중의 삶에서 경험과 느낌과 생각과 기대는 서로 분절되어 있지 않다. 이를 서로 떼어 놓고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서구의 지성주의 신학은 끊임없이 그러한 잘못을 범해 왔다. 거기에는 신학적 명제들이 이성을 통하여 체계 있게 조직되지만,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이 생생하게 전달되지도 않고 구체적인 인간의 느낌이나 기대는 너무 서투르게 다루어지고 있다. 서구의 지성주의 신학은 감성과 이성의 이원론과 감성에 대한 이성의 지배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데올로기는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든, 현상을 혁명적으로 타파하려고 하든, 민중의 삶의 포괄성과 구체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닫힌 사고의 체계이다. 따라서 민중과 더불어 있으려면 이데올로기에 매이지 않는 시각이 필요하다. 김용복 선생이 민중의 사회전기에 주목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민중의 사회전기는 민중의 삶의 이야기이다. 민중의 삶이 구체적인 현실관계들 속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그들의 고난과 갈망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물론 역사적 맥락에 대한 분석과 관계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적이고 사회과학적인 분석은 민중의 사회전기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것이 목적일 수 없다. 역사적이고 사회과학적인 분석을 수행할 때에도 그 분석에 전제되어 있는 관점이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지 않은가를 늘 비판적으로 자기반성적으로 살펴야 한다. 민중의 사회전기를 통해 민중의 삶에 접근하고자 할 때, 그들이 표현하고 있는 언어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된 언어인가를 판별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심리학적이고 이데올로기비판적인 언어분석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민중의 고난과 갈망을 표현하는 언어는 이데올로기적 조작의 언어와는 판이한 성격을 갖는다. 왜냐하면 민중의 언어는 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몸의 언어를 담고 있는 틀이 이야기다. 이야기를 꾸려 나가는 일은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야기는 삶과 불가분의 통일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민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민중의 경험과 느낌과 생각과 기대를 유기적 연관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신학은 성서와 역사 속의 민중의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사가 펼쳐지는 구체적인 통로를 꿰뚫어 보게 된다.

민중 주체성 선언의 정치적 의미와 실천론적 의의

민중의 주체성에 대한 통찰은 신학적 관점과 방법의 변화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민중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은 정치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고, 실천론의 구성과 관련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정치적으로는 민중의 주체성이 현실의 전 영역에서 민중의 정치적 배제가 강요되었던 시대에 선언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독재 권력이 너무나도 강해서 민중의 자리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때에 민중 주체성이 선언된 것이다. 그 선언은 독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했고, 현실의 전 영역에 민중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새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밝혔다. 참여는 민중의 주체성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한 형식이다. 참여는 그것을 가로막는 배제의 논리와 그 논리를 구현한 구조적인 틀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구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중을 배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득권 세력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온갖 논리를 동원하여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이를 폭력으로 지켜내려고 한다. 거기서는 폭력 자체가 질서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정상화된다.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논리의 핵심인 소유권도 사실은 정당화된 폭력의 또 다른 표현이다. 왜냐하면, 소유권은 소유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주장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소유권 행사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의 참여는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논리의 타당성 요구를 거부하고, 그 논리의 실천적 기반인 폭력을 지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종(從)의 도(道)

김용복 선생의 실천론 구상에서 핵심을 이루는 종의 도(Doularchie)는 바로 이 대목에서 깊이 음미될 필요가 있다. 종의 도는 폭력과 그 행사에 대한 굴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권력 현상 그 자체의 극복이다. 권력 현상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권력을 행사하는 세력과 권력의 지배를 받는 세력이 서로 갈라진다. 권력은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관철하는 기회이고, 그 의지에 맞서는 타인의 의지를 꺾는 힘이다. 권력은 자기주장과 폭력을 같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한다. 권력은 한정된 사회적 재화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을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배제되고 차별당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러한 배제와 차별과 억압을 심지어 정당화하고 정상화한다. 그것이 권력을 매개로 해서 관철되는 자기주장의 정치적 형식과 사회적 형식과 문화적 형식이다.

종의 도는 이러한 자기주장의 근본적인 부정이다. 그것은 자기를 주장하기에 앞서서 남을 일으켜 세워 주인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데 관심이 있다. 남을 섬기고 남과 더불어 나누고 사귀고자 하는 데 지배와 권력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지배와 권력이 지양되는 곳에서는 사귐의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사귐은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종의 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것이 참여공동체의 내용과 형식이다. 참여공동체는 섬김의 공동체요, 나눔의 공동체요, 사귐의 공동체다.

이러한 민중신학적 발상이 경제를 매개로 하여 전개될 때 어떤 경제사상으로 나타날까? (계속)

강원돈(길마루글방지기/민중신학과 사회윤리)  kwdth5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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