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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hypostasis와 Enhypostasis칼 바르트의 빛의 론 ⑵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2.04.09 17:02
▲ 초대교회의 가장 격렬한 논쟁 중에 하나는 예수가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 즉 예수는 참 인간이자 참 신이라는 논제였다. ⓒGetty Image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 여러 곳에서 고대 교회의 Anhypostasis와 Enhypostasis의 교리를 논하고 있는데, 특히 그가 그리스도론 전체를 포함하는 요약적인 용어라고 말한바 있는 ‘성육신’의 교리에서 독창적으로 해명된다.(1) 따라서 우리는 우선 그의 성육신의 교리를 살펴보고, 여기서 Anhypostasis와 Enhypostasis 교리가 어떻게 해명되고 있고, 또한 그의 전체적인 그리스도론의 맥락에서 어떠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성육신

바르트에 의하면 성육신은 사람들이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열려져 있는 사건이 아니다. 성육신은, 말하자면, “계시의 신비”(CDⅠ/2, 122)이다. 그것은 “그 곁에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어떤 것이 있을 수 없는 위대한 기독교의 신비와 성례전”(CDⅣ/2, 40)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신학에서 성육신의 기초는 하나님 자신 안에, 즉 인간이 되시어 그렇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된 인간을 그 자신과 화해시키려는 그의 영원하고 은혜로우신 목적에 있기 때문이다(CDⅠ/2, 122이하).(2)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나님과 참 인간”(Vere Deus Vere Homo)으로 존재하는지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이렇게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고, 단지 우리에게 자신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사건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르트는 현대 그리스도론의 문제가 이 계시의 신비를 해소하려한데 있다고 지적하고, 어떤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고대 교회의 그리스도론, 특히 칼케돈의 신앙고백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3)

바르트는 고대 교회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하여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라고 대답한다(CDⅠ/2, 132). 그런데 이것은 “언제나 동등하지 않은 것의 등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CDⅠ/1, 136). 즉 성육신은 말씀의 신적인 자유 가운데서 일어났다(CDⅠ/2, 135-137). 말씀은 그 사건에서 행동하는 주체이지 행동을 강요당하는 자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인간의 협동도, 상호작용도, 어떤 상호성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성육신은 인간의 가능성도, 인간 안에 내재하는 어떤 결정도(CDⅣ/2, 45) 아니다. 세계의 과정이나 어떠한 우주의 법칙도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요하지 못한다. 성육신은 “피조된 우주에 내재하는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의 실현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역사 내에서 일어나고 그것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적 존엄의 행위”, “절대적으로 새로운 사건”, “하나님의 한 새로운 행위”(CDⅣ/2, 37)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이 ‘등식’은 결코 뒤바꿀 수 없다. 로고스는 주어가 하나님이 아닌 명제에서 술어나 목적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 육신이 말씀이 된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신성모독적인 진술일 뿐이다. 말씀은 성육신 이전에 그리고 성육신 없이도 여전히 그러한 분이시지만, 육신은 “전적으로 말씀에 의존하고, 말씀 없이는 육신이 될 수 없다”(CDⅠ/2, 136).

바르트는 이렇게 성육신의 사건의 주체를 명확히 하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씀의 인간성의 의미를 논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그가 참되고 현실적인 인간, 하나님의 행위들의 대상과 무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CDⅠ/2, 147). 하나님의 아들이 취한 것은 통일성과 전체성 안에 있는 현실적인 인간 본성이다. 그는 그의 보이지 않는 영광 가운데서나 혹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낯선 존재로서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 가운데 하나로서 오셨다. 다시 말하면 그는 완전한 신성 안에서 우리를 만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심판과 파멸 아래 있는, 우리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의 형제로서 오셨다(CDⅠ/2, 36-37).

말씀은 이렇게 참된 육체, 즉 육신과 정신을 지닌 우리 자신들과 같은 한 인간이 되었다. 그는 우리의 ‘인간성’(humanitas),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본질과 존재, 인간적 종류와 본성, 즉 한 인간을 하나님, 천사 혹은 동물과 대립시키는 것으로 만드는 인간성”을 떠맡았다(CDⅠ/2 , 149). 그런데 한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가 아니라면 이것은 현실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동시에 그는 한 인간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양자론적인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한 인간이 존재했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맞서 있던 것은 단순히 “육신 안에서의 존재의 잠재가능성”(Ibid.)이었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말씀이 인간 예수가 될 때, 그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고 구체적인 현실과 존재를 취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 존재의 이 특수한 가능성을 현실이 되게 했기 때문에, 이 인간이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은 이 인간이 되셨다”(CDⅠ/2, 150).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이 사람이라는 한에서 존재할 뿐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서 그의 특별한 가능성을 전유하고 현실화했기 때문에 존재한다.

Anhypostasis와 Enhypostasis

사실, 이 모든 논의는 고대 교회의 anhypostasis와 enhypostasis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다. T. F. 토랜스는 이 용어들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의했다:

“anhypostasis라는 말로써 고전적 그리스도론은 수육(assumptio carnis)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성육신의 사건, 즉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에서부터 분리된 그 자체로 독립적인 실재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enhypostasis라는 말로써 고전적 그리스도론은 수육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위격적 연합 안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재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 anhypostasis와 enhypostasis는 불가분리적이다. 성육신에서 영원한 아들은 그 자신과의 하나됨에로 인간성을 취했으나, 그 수육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현실적인 인간일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이다.”(4)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에 대하여 진술하는 바르트의 입장과 동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통일성은 예수가 단지 하나님으로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의 존재 방식 안에서 존재하는데 따라 인간성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고대의 모든 신학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anhypostasis와 enhypostasis라는 이름으로 만장일치로 가르쳤던 교리이다. anhypostasis는 두 본성들의 통일성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그의 존재를 하나님의 존재에서, 그리고 특히 말씀의 존재 방식(hypostasis, “person”)에서 얻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을 그 자체로 독단적으로, 추상적으로 소유하지 않는다... enhypostasis는 긍정적 측면을 주장한다. …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그리고 특히 말씀의 존재방식(hypostasis, “person”)으로부터 그의 존재(실재)를 얻는다”(CDⅠ/2, 163).

부정적인 용어인 anhypostasis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무관하게 예수는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단언하지만, 긍정적인 용어인 enhypostasis는 성육신과 함께 예수는 태어나고 하나님의 성육한 아들의 충만한 본질적인 현실성 안에서 완전히 인간적인 인격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단언한다. 그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인 위격과의 연합 속에 받아들여지는 독자적인 위격을 갖지 못하지만, 그러나 순수한 하나님의 은총의 행동 덕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적인 위격을 갖고 태어나면서, 아들의 신적인 위격 안에서 그리고 그것과 완벽한 하나됨 속에 있다는 것을 단언한다.

이 anhypostasis와 enhypostasis는 본질적으로 상호보완적이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격의 연합(hypostatic union)의 교리를 좀더 적극적으로 담아내려고 고안되었던 ‘신학적인 대귀’이다. 바르트는 이 교리를 통해서 양자론에 빠지지 않고서 성육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의 현실성, 온전성과 완전성에 대하여 말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단성론에 빠지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신적인 본성과 그것의 완전한 통일성에 대해 기술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미주 5) 이 신학적인 대귀가 어떤 식으로든 파괴될 때,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모두가 위태롭게 된다.

바르트의 anhypostasis (Impersonalitas)의 교리는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부정하는 감춰진 가현설의 한 형식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참고 CDⅠ/2, 164-65). 그러나 바르트는 고대교회 저자들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나 아들로부터 분리된 채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가졌다는 것을 부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취해졌던 ‘humanitas’(인간성)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수육이나 연합의 대상이 되는 인간성이라 불리는 어떤 ‘추상적’ 혹은 ‘비인격적’인 실재에 대하여 생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생각한 것은 위격의 연합에서 말씀에 의해 참되고 현실적인 인간성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인간성이다.

이 신학적 진술에 대한 가장 논쟁적인 현대의 재해석은 마르크바르트에게서 나타났다. 그의 주장을 간략히 소개하면 바르트의 사회주의자적인 견해가 그의 신학에 깊게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An-Enhypostasis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인간성을 취하면서 단지 한 개별적인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유적 인간’(the species man)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바르트는, 마르크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론적’ anhypostasis를 집단적인 ‘인류’(genus man)의 ‘인간학적’ enhypostasis로 확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바르트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  Ⅳ/2권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간성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동일하게 강조한다.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전적인 “비동일성”이 있다(CDⅣ/2, 29). 이와 관련하여 보스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사역을 연구하려고 할 때, 곧바로 그의 인격의 이 비밀에 이르지 않고서는 이 왕이 누구이고, 그가 어떻게 왕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6)

마르크바르트가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바르트의 포괄적인 그리스도론에서 성육신의 보편적인 의미이다. 바르트의 입장은 이런 식으로 진술될 수 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그와 관련되어 있고 그래서 사실상 그리고 잠재적으로 그의 사람들이고 반면에 신자들은 현실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CDⅣ/2, 59이하).

그러나 마르크바르트는 성육신에서 그 진리들을 연역하기보다는 이 결과(진리)들을 성육신에 갖다 부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다음의 이의들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An-Enhypostasis는 관계의 용어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확장도 이것을 파괴하고, 결국 둘 다 위험에 빠트리고 그렇게 성육신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둘째, 바르트와 전통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취해진 인간성humanum은 “단순히 육신 안에서의 존재의 잠재가능성”(CDⅠ/2, 149)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던 것은 한 개별 인간이었다. 따라서 마르크바르트는 인간 예수의 이 개체성을 집단적인 유적 인간으로 바꾸고 그렇게 그리스도론을 인간학으로 대체하는 오류를 범했다.(7)

바르트가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존재를 그의 성육신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또한 그의 신학에서 자연신학이 배제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1955년에 출판된 화해론 제2권에서 이렇게 말한다.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면, 그것은 “그가 영원 전에 오로지 하나님으로만 계시기를 원하지 않고, 역시 영원 전에 인간의 본성을 취하고 지니고 간직하고자 하신 것”(CDⅣ/2, 100)을 말한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이 연합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다(Ibid., 100이하).

그러므로 영원한 “육신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Logos Asarkos)에 대한 모든 진술은, 바르트에 의하면, 허용될 수 없는 신학적인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그래서, 바르트는 주장하기를, 성육신의 사건 이면에서 Logos Asarkos의 진상을 살피려고 한다면, 그때 우리는 그를 위하여 모든 내용을 조작하게 되고, 이 “로고스 그 자체”의 계시와 행동이 실제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만 제한되는 것인지를 질문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CDⅣ/1, 52-53).

물론, 바르트는 매우 제한적으로 Logos Asarkos가 신학적 반성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CDⅢ/1, 54).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의 사상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주된 관심은 그 결함을 지적하는데 있었다. 로고스 아싸르코스는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은 형식과 내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간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선행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고려할 때조차, 로고스 아싸르코스를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허용될 수 없다”고 한다. 로고스는 인간이 되었다. 로고스는 바로 이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성육한 말씀과 다른 하나님의 말씀, 즉 로고스 아싸르코스를 찾고자 한다면, 이것은 언제나 로고스 아싸르코스가 인간 예수가 아닌 다른 매개물들을 통하여 그 자신을 계시하지 않을까 하는 사변에 이르게 된다(CDⅣ/1, 52-53).(8)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성육신한 로고스”(Logos Ensarkos)만이 신학의 대상이 될 수 있고, Logos Asarkos가 생각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자연신학의 가능성이 생길 뿐이라고 주장한다.(9)

바르트가 그의 그리스도론에서 고대 교회의 anhypostasis-enhypostasis와 hypostatic union의 교리를 사용한 것은 성육신과 화해의 교리들, 그리고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은 완전히 통합되는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아들의 수태와 동정녀 탄생에서부터 그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전체적인 성육신의 운동은 그것의 본질적인 성격과 목적에서 구속적이다. 화해는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모습을 취하고 우리의 구속의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했던 그의 수태와 탄생의 순간부터 시작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단지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 우리를 위한 하나님(Deus pro nobis)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반역하고 타락한 인간성을 떠맡은 하나님, 그로써 우리의 죄의 징벌, 비극적인 운명과 저주와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처리하고, 그 대신에 그의 의와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것이 한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시며, 그러한 분으로서 그의 신성과 인간성의 위격의 연합 안에서 하나님을 인간과 화해시키고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이다.(10) 바르트는 이러한 완전한 그리스도론을 『교회 교의학』 제Ⅳ권, 화해론에서 진술한다. 이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1959년에 출판된 『교회 교의학』 ‘화해론’ 제3권에서 바르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미주

(미주 1) J. D. Godsey가 기록하고 편집한 Karl Barth’s Table Talk, 윤성범 옮김, 『칼 바르트와의 대화』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4), 119.

(미주 2) 바르트는 그의 선택론(CDⅡ/2)에서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시기로 결단하신 사실에 대해 진술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시는 하나님 자체 내에서 내려진 하나님의 구체적인 결단은 차후에 일어나는 계약사 및 하나님의 창조, 역사, 모든 인간관계들을 이해하는 데에 기본이 된다(CDⅡ/2, 7이하).

(미주 3) 바르트는 헤르더로부터 하르낙에 이르기까지 현대 그리스도론에서 빚어졌던 지성주의와 형이상학적 추상화를 비난하면서 고대 교회의 그리스도론과 특히 칼케돈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들에 관한 교리를 치밀하게 구상하면서도 계시의 신비를 해소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단언했다. 그것은 그 사실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말하려고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론적 표현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채려고 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고대 교회의 모든 공식구들은 인간적 성찰의 부족함을 나타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계시를 파악하는 일에 있어서 전적인 무능력을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CDⅠ/2, 126.

(미주 4) T. F. Torrance, “The Atonement and the Oneness of the Church”, SJT., vol. 7, no. 3, September 1954, 249-250.

(미주 5) T. F. Torrance, 『칼 바르트, 성서적 복음주의적인 신학자』, 최영 옮김 (서울: 한들출판사, 1997), 242.

(미주 6) J. Bosc, L'Office du Seigneur Jesus Christ, Geneve: Labor et Fides, 1957, 29.

(미주 7) J. Thompson, Christ in Perspective, 148 이하를 보라.

(미주 8) C. T. Waldrop, Karl Bartt's Christology., 46-47을 참고. 마르트바르트도 그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미주 9) Karl Barth’s Table Talk, 98. 여기서 바르트는 브룬너(E. Brunner)를 지적하면서, 그가 Logos Asarkos를 생각하는 것은 그의 자연신학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미주 10) T. F. Torrance, 『칼 바르트,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신학자』, 216 이하, 278-279.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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