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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평화그가 평화를 전할 것이요(스가랴 9:9-10)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4.10 15:33
▲ Giotto, 「Entry into Jerusalem」 (1303) ⓒWikipedia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번 주일은 종려주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간 성서 일과에 따른 본문들은 모두 종려주일과 관계가 있는 본문들입니다. 스가랴 9장 9-12절, 시편 118편 19-29절, 요한복음 12장 12-19절, 빌립보서 2장 1-11절 말씀입니다.

먼저 요한복음 12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4복음서에 모두 나타나는데, 요한복음은 자신만의 해석을 이 이야기에 덧붙입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었다는 점은 요한복음의 첨가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나뭇가지를 길에 폈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나뭇가지도 호산나라는 외침도 생략합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시편 118편 25절에 나타난 ‘호시야 나(הושׁיעה נא)’, ‘구하옵나니 구원하소서’가 축약되어 만들어진 말입니다. 시편 118편은 유대인들이 초막절을 지킬 때에 낭독되었는데, 그때 절기를 지키는 사람들은 레위기 23장 40절에 따라 종려나무 가지를 묶어서 들고 있었고, 낭독자가 25절의 ‘호시야 나’를 외칠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합니다.

시편 118편 25절의 ‘호시야 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간구이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호산나’라는 외침과 환호성을 지르는 예식의 형태로 변화되어 갔다고 합니다. 또 개신교에서 외경으로 부르는 마카베오상 13장 51절을 보면, 하스몬 왕조를 수립한 시몬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들을 구원한 왕을 맞이하며 환호했던 것입니다.

마카베오하 10장을 보면, 성전을 수복한 날을 초막절과 마찬가지로 즐겼으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하나님께 찬미했다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만약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성전 수복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다면, 공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입성 이후 성전 정화 장면을 넣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성전 정화 사건은 2장에 미리 나타난다는 점을 보았을 때, 요한복음은 성전 수복의 개념보다는 구세주의 입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합니다. 반면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성전 수복의 의미까지도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은 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모습이 스가랴의 예언과 같다고 말하며 스가랴 본문을 인용합니다. 그 본문이 이번 주간 성서일과에 지정된 스가랴 본문이고, 오늘 저희가 읽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그와 같은 행동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비록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스가랴의 본문을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도 스가랴의 말씀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행동에서 스가랴의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가랴의 예언에 따라 구원을 이루실 왕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은 스가랴 본문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서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는 점과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이 땅에 구원을 이루셨다는 점에 따라 선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빌립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겸손을 우리가 본받아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스가랴 예언의 배경

실제 역사에서 예수님께서 스가랴의 말씀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를 보이시기 위해 나귀를 타셨는지, 그저 이동을 위한 수단으로 나귀를 택하셨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대해 요한복음 12장 16절의 설명과 같이, 제자들이 스가랴의 예언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도 아무 의미 없이 이런 행동을 보이시지는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자들이나 복음서 저자들의 판단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가랴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이런 행동을 보이셨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예언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셨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의 예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스가랴는 포로 귀환 때에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스가랴 1장 1절은 그가 다리오 왕 2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다리오 왕이 왕위에 오른 때가 기원전 522년이기 때문에 스가랴의 활동 시기는 기원전 521년경이 됩니다.

부수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스가랴 1장 1절은 그가 잇도의 손자이며 베레갸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지만, 에스라 5장 1절과 6장 14절은 그가 잇도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아들로 표기되어 있는데, 우리 성경에는 스가랴 본문과 맞추기 위해서 손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가 잇도의 아들인지 손지인지는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스가랴는 포로 귀환 이후 학개와 마찬가지로 성전 건축에 관한 예언을 남깁니다. 그리고 9장부터 14장까지는 이방 국가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의 구원에 관한 예언이 나타납니다. 학자들은 스가랴 9장 이후의 예언을 포로 귀환 시기가 아니라 훨씬 후대의 예언으로 판단합니다.

9장 이후에 나타난 이방 지역들의 명칭과 국가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따져보았을 때, 포로 귀환 시점인 기원전 520년경이 아니라 그보다 200년 뒤인 330년경의 이야기로 봅니다. 기원전 330년경에는 그 유명한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두로의 점령을 볼 수 있습니다. 두로의 멸망에 대해서는 에스겔도 26-28장을 통해 선포한 바가 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두로가 멸망하리라고 보았지만, 실제로 그의 예언은 빗나갔습니다. 두로는 섬에 있던 국가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예언을 보면 두로를 배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두로는 섬이라는 천혜의 요새에 세워진 국가였기 때문에 방어가 수월했습니다. 대제국을 세웠던 느부갓네살도 두로를 점령하려고 했지만 이를 완수하지는 못했습니다. 천혜의 요새에서 몇 백 년을 이어가던 두로를 점령한 사람이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두로를 점령한 방식은 간단했습니다. 바다를 메워서 800m에 달하는 제방을 만든 것입니다. 두로가 점령당한 때가 기원전 330년경입니다.

스가랴 9장 1-8절에 나타난 도시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함께 점령당했습니다. 페르시아를 비롯해 아시아 전역과 이집트까지 점령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제외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스가랴 9장에 나타난 예언은 이런 시기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스가랴의 예언을 종말론적 선포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쉽게 생각하자면 그의 예언은 평화를 향한 강한 바람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자신들에게 허락되었던 평화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바람이었습니다.

또 앞으로는 창과 칼과 활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을 침략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왕의 모습을 선포합니다. 그 왕은 창과 칼로 무장한 채 전차를 끌고 입성하지 않습니다. 무기도 사라지고 전차도 없이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합니다.

무력으로 자신들을 점령하고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평화를 가지고 오는 왕을 꿈꿨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의 예언을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스가랴의 바람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160년경 마카베오 혁명에 의해 독립 국가를 이루긴 했지만, 결국 기원전 63년에 로마에 의해 또다시 점령당하게 됩니다. 예수님 이후, 기원후 70년경에는 또다시 로마와 전쟁을 하게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파괴됩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

끊임없는 대제국의 침략 속에서 평화를 갈망하고, 평화를 이룰 구원자를 간구하던 바람이 스가랴의 예언입니다. 또한 이 예언 속에서 자신들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끊이지 않는 폭력과 전쟁의 아픔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복음서들이 그리고 있는 바와 같이 왕이신 예수님을 높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종려주일을 보내면서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점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서들이 이미 그렇게 이해하였고 적어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를 왕이자 구원자로 높이라는 의도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지 않았습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평화를 향한 갈망을 제자들에게 보이시기 위해서 스가랴의 예언에 나타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복음서는 누가복음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타난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학자들은 누가복음 19장 41-44절에 관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목격한 후대 복음서 저자의 첨가라고 말하기도 하고, 본래 예수님의 말씀이 맞지만 다른 시점에 하신 말씀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인지 모호한 면도 없잖아 있지만, 적어도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입성 모습을 스가랴 예언에 맞게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루살렘 입성은 호산나도 없고 종려나무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복음서 중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찾아오지 않는 평화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온전한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그렇고,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콩에서 일어났던 시위에 대처하는 중국의 태도도 여전히 무력을 이용한 폭력이었습니다.

국제적인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는 여전히 폭력적입니다. 꽤나 오래전에 만들어진 말인데, 요즘도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인실좆’이라는 줄임말을 가끔 보게 됩니다.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의 줄인 말입니다. 비속어이기는 하지만, 워낙 유명한 표현이라 그대로 적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법정 다툼까지 이를 끌고 가서 상대방을 철저히 깔아뭉게버렸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물론 어떠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의 잘못도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에 대한 처벌을 받는 일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는 피해당사자들 간의 문제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구경꾼일 뿐입니다. 그런데 게시판에 달리는 수많은 댓글은 특정 사람이 철저하게 무너지길 바랍니다. 잘못을 범한 사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서 더 이상 삶을 살아가기도 어려워지길 바랍니다. 이런 마음을 담고 있는 표현이 ‘인실좆’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일이 전혀 없는 사람이 바닥까지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보며 왜 즐거워할까요? 우리 마음에 여전히 폭력이 차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을 향한 폭력은 무의식적으로 거부하지만, 대상이 악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향한 폭력은 정당하고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더 강한 폭력이 가해지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위해 이 땅에 오셨으나 여전히 평화가 전해지지 않는 세상을 보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스가랴의 예언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이번 종려주일에 교회에서 호산나 찬양만을 부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하셨던 평화를 한 번 더 되새기는 기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고난 주간에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겠다며 금식하기보다 여전히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에 작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를 통해 스가랴가 그토록 바라던 참된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로부터 시작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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