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언더도그여, 갈릴리에서 예수를 뵈오리라!(출 7:1-7; 행 1:15-26; 마 28:1-10)부활절/장애인주일.4・19혁명주일(4월17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4.14 21:23

1. 부활절과 4・19혁명주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것은 죽임의 능력과 그 결과인 무덤이 예수님을 없애거나 가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온전한 의미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망의 권세란 무엇인가요? 오늘 복음서 말씀의 맥락에서는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럼 누가 누구를 무섭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사순절기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또 그들과 결탁한 로마 제국이 사망의 권세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 체제라는 종교 체제와 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로 혼합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이러한 종교・정치의 혼합체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곳, 이방의 땅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사망의 권세는, 본질을 잃어버린 형식적인 종교와 권력을 사유화하는 정치의 결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고 하고 있고, 또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부활의 열매이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기에, 오늘 우리도 예수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걷고, 비록 그 길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지만! 부활의 참 소망으로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4・19혁명 당시 초등학생들

특별히 오늘은 4・19혁명 주일입니다. 이것은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의 부활이죠? 상황은 이렇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부가 6・25전쟁 이후, 피해 복구에 힘썼지만, 1950년대 후반이 되면서 위기가 불어닥칩니다. 왜냐하면 독재 체제를 강화하여 국민의 불만과 민주주의 욕구가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은 부정 관권 선거를 감행합니다. 잘 아시는 1954년 사사오입 개헌 사건입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 3선 제한’을 철폐하는 헌법 개정안을 반올림(사사오입)으로 처리한 사건입니다. 이로써 이승만은 3번째 대통령이 됩니다. 종신 대통령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범국민적인 독재 정권 타도 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4년 후인 1960년, 이승만은 또 대통령 선거에 나섭니다. 그리고 이때도 부정을 저지릅니다. 이것이 3・15부정선거입니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무원과 경찰 등을 동원한 다양한 부정선거 방법을 노골적으로 자행하였습니다. 선거관리부서인 내무부(현재 행정안전부)를 통해 유권자 4할의 사전투표를 실시하였으며, 투표 방법은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를 진행하게 합니다. 그리고 야당 참관인을 투표장소에서 내쫓아 버립니다. 이렇게 공권력과 관료조직을 총동원하여 부정선거를 자행하였습니다. 이때 돈으로 유권자를 매수했으며 조직폭력배들을 동원한 폭력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선거 결과를 집계하자,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육박할 정도로 높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 정권은 득표율을 하향 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3,376표(85%), 이기붕 833만 7,059표(73%)를 득표한 것으로 발표했으나, 이미 부정선거의 양상은 전 국민에게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1960년 경남 마산에서 시작된 3·15 의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독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전 국민적인 저항과 이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탄압은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4월 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불러왔고, 국민 주권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독재와 민주주의 학살이라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한 것입니다.

이러한 4월 혁명의 정신은 196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으로 지속해서 그 정신을 이어왔습니다. 79년 부산과 마산의 부마항쟁, 80년 광주의 민주화 운동, 87년 6・10 민주항쟁과 2016~17년의 미완의 촛불혁명이 바로 4월 혁명 정신의 부활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시대의 부활, 역사의 부활, 민족의 부활, 민중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2. 평안하냐?, 죽음이 끝이 아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마 28:1-4)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다고 합니다. 사실 천사는 신비의 영역이죠? 가톨릭 전통에서는 스콜라 철학의 대부인 아퀴나스를 따라, 천사는 “사람에 비하면 무형이고 비물질적이지만, 하느님과 비교했을 때는 물질적이고 형체이다.”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곧,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중간단계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톨릭 신학에서는 성경 말씀에 근거해, 몇몇 경우 신체를 지니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신체가 없이 지능과 의지와 같은 영혼의 힘만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 무덤 위 천사와 승리의 니케 여신

개신교에서는, 먼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천사와 악마를 실제적인 존재로 보았고, 그들이 인간의 삶과 사건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도 무수히 많은 선한 천사들과 악마들이 인간을 위해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하나님은 이렇게 천사를 이용해 사탄의 분노를 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개혁교회 전통에서 장 칼뱅은 이러한 천사와 악마에 대한 미신적 해석을 철저히 경계하면서도 그 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긍정합니다. 물론 칼뱅은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철저히 성경에서만 그 근거를 찾았습니다. 칼뱅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도구로 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천사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칼뱅은 천사들의 명칭, 계급과 수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천사에 관해 지나치게 탐구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으로 천사를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칼뱅의 입장은, 종말의 때에 완전히 알게 될 신비의 영역으로 천사 이해를 남겨두자는 것입니다. 이 말이 가장 신학적이고 건전한 신앙입니다.

‘마니토(manito)’라고 들어보셨죠? ‘비밀 친구’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말인데, ‘수호천사’ 개념으로 쓰입니다. 칼뱅은 이런 마니토처럼 천사가 개개인 한 명을 지켜준다는 개념은 철저히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천군 천사들이 한마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수호천사에게만 국한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칼뱅은 성경을 근거로 해서, 페르시아인들의 천사나 그리스인들의 천사 등 특수한 천사들이 국가나 민족의 수호천사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유명한 그리스 신화의 승리의 여신, 니케가 바로 이방인들의 천사 유형입니다. 날개 달린 승리의 수호자 니케는 영어로 나이키, 곧 승리입니다. 따라서 천사는 승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천사는 이렇게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승리를 전하러 온, 승리의 상징입니다. 아무튼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5-6)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때 하신 말씀 그대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 번의 수난 예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천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 28:7-10)

여인들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나오죠? ‘평안’입니다. 그리고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망 권세는 죽이는 것으로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평안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무서움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망 권세를 깨뜨린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평안하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우리는 바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제국의 군병들이 아니라, 바로 갈릴리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안녕의 시작, 곧 부활의 새 역사는 다시 갈릴리라는 말씀입니다. 갈릴리는 많은 사람이 살고 싶어 하고 동경하는 성문 안이 아니라, 사람들이 꺼리는 성문 밖 땅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삶의 터전이자 고향이었고 제자들이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입니다. 결국 갈릴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이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고난을 받는 자리이며 성문 안이 아니라, 성문 밖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문 안 예루살렘과 성문 밖 갈릴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때는 물론, 부활 사건에서도 이렇게 서로 대조적입니다. 아니, 적대적입니다.

3. 언더도그마 현상

언더도그마(under dogma) 현상이 있습니다. ‘언더도그(약자)가 이기길 바라는 심리’입니다. 미국 보수단체 티파티 패이트리어츠의 전략가인 마이클 프렐이 쓴 책 제목이 바로 『언더도그마: 강자가 말하는 약자의 본심』(지식갤러리, 2012)입니다. 티파티는 잘 아시는바와 같이, 미국의 조세 저항 운동으로, 특정 정당이 없는 무정형 형태로 정치적으로는 보수 성향을 띱니다. 간단하게 ‘극우 반정부 운동’을 뜻하죠. 아무튼 이 책은 힘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강자(오버도그)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고, 강자가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믿음에 대한 분석입니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 마이클 프렐이 책 『언더도그마』와 그 의미

오늘 본문 말씀의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도 오버도그(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제국)가 아니라, 언더도그(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의미에 관해, 역설적으로 답을 주는 책입니다. 사실 사람들 대부분은 누구나 힘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약자가 강자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고, 강자가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공감 능력 때문입니다. 프렐도 인간은 공감 능력이 있어서, 언더도그마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를 잘 보여주는 실험이 있습니다. 2007년 사우스 플로리다 대학의 조셉 반델로 교수가 한 언더도그에 대한 실험입니다. 먼저 대상자를 A, B그룹으로 나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을 양측의 시각으로 설명한 짧은 글을 읽게 했습니다. 그 뒤, A그룹에는 이스라엘이 커 보이는 지도를, B그룹에는 이스라엘이 작아 보이는 지도를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참석자들은 양측의 갈등에서 어느 쪽을 언더도그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커 보이는 지도를 본 A그룹은 70%가 팔레스타인을 언더도그로, 이스라엘이 작은 지도를 본 B그룹은 62.1%가 이스라엘을 언더도그로 판단했습니다. 같은 정보가 제공됐고 차이점 역시 지도상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상대적인 크기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강력한 오버도그가 있으면 그 대상의 정체와는 상관없이 언더도그 편에 서려는 반사적인 충동을 갖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렇게 언더도그마는 약자가 힘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강자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고, 강자가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믿음에 대한 비판입니다. 사실 누구나 언더도그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느끼고, 그들이 살아가는 데 뭔가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인지상정이죠, 공감 능력을 갖춘 사람은 모두 언더도그마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것은, 프렐에 의하면, 이러한 언더도그마가 이제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 개념을 대체해 ‘가지지 못한 자’와 ‘가진 자’와 사이에 놓인 새로운 힘의 축으로 변해 우리 사회의 이념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프렐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형 마트에 대한 비난(우리는 삼성이나 재벌 대기업에 대한 비난이겠죠?, 대형 교회에 대한 비난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자 첨가), 동료의 승진에 대한 분노, 남의 떡이 커 보이는 현상, 노동자와 경영자의 봉급 차이, 내 자식이 다른 사람의 자식보다 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심리.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은 꼭 특정한 사람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언더도그마는 우리 일상에서 그리고 전 세계인의 일상에서 생생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언더도그마 확산에 유엔이 역할을 했다고 프렐은 지적합니다. 유엔 전 사무총장 코피 아난이 당시, 우리 시대의 주요 도전 과제로 ‘국제적인 힘의 불균형’을 바로 잡겠다고 천명함으로써 유엔을 세계적인 힘의 평형추이자, 언더도그의 옹호자로서 입지를 굳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프렐은 이러한 언더도그마의 잘못된 예를 9・11테러 이후를 듭니다. 당시 프랑스 일간지는 전면에 “우리 모두 미국인이다!”라는 유명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순간 언더도그마가 고개를 쳐든 것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인 미국이 언더도그(약자)가 된 것입니다. 프렐의 말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고 힘센 국가에 있는, 가장 크고 부유하고 힘센 도시, 그것도 가장 크고 튼튼한 건물이 언더도그라는 외투를 영원히 입을 수는 없었다. 9・11테러가 벌어지고 몇 년이 지나가 ‘우리 모두가 미국인!’이라는 말은 ‘미국이 진짜 테러리스트다!’ 같은 구호에 자리를 내줬다. 전통적으로 언더도그마주의자들이 말하는 힘과 선의 기준에 따라 세상이 자연스럽게 재편된 걸까? 아니면 언더도그마나 언더도그마주의자가 이런 변화를 주도한 걸까?”

그러나 우파 이론가답게, 프렐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미국이 지구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건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이스라엘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 역시 잘못된 행동이다. 미군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도 잘못된 행동이다. 그러나 중국과 팔레스타인, 유엔 등이 미국이나 이스라엘보다 힘이 약하다고 해서 이들이 일으키는 오염 정도가 약해지거나, 이들이 죽인 사람들이 덜 죽거나, 이들에 의한 희생자가 감소하는 건 아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 우리는 단지 ‘옳고 그름의 끝없는 투쟁’이 지속되고, 언더도그마주의자에 의해 기존의 옳고 그름의 개념이 언더도그마로 대체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4. 전장연과 이준석 대표의 논쟁, “아픈 곳이 중심이란다!”

최근 전장연(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연대)과 이준석 대표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이 장애인주일이기도 한데, 이준석 대표의 의도는 전장연의 시위로 인해 불편을 겪는 직장인들의 편에 서서, 6・1 서울 시장 선거 및 지방선거에서 표를 챙기려는 정치적 의도로 보입니다. 이것은 전장연의 시위를 언더도그마, 곧 “약자는 무조건 옳다.”라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깨뜨려보자는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 전장연의 시위, 국힘당 이준석 대표와 박경석 전장연 대표의 토론회

사실 전장연은 시위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장애인 탈시설 예산 반영, 둘째 장애인 활동 지원 예산 편성, 셋째, 장애인 특별교통수단의 지역 격차 해소를 위한 예산 편성, 넷째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마련 등입니다. 대선 전에는 이러한 장애인 정책에 관해 정치권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데,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했던 이준석 대표가 선거 이후 이렇게 바뀐 것일까요? 아닙니다. 언더도그에 대한 오버도그의 입장이 선거 전에 표를 얻기 위해 잠시 바뀐 것이고, 이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갈라치기 하여 또 지방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것으로 전략적으로 바뀐 것입니다. 사실 이대표의 이대남 공략으로 젠더 갈라치기를 하여 이대남의 표를 가져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물론 ‘개딸’이라고 불리는 이대녀들의 지혜가 빛을 발했지만). 아무튼 이준석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출퇴근하는 서울 시민들을 볼모로 잡고 지하철 운행을 막아서고 있고, 다수의 불편을 끼쳐야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된다는 비문명적인 관점으로 불법시위를 하고 있다. 조건을 걸지 말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야 하니, 중단하라.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는 인식이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작동하고 있다. 경찰력을 동원해서 강경 대응해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왜 대중은 약자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할까?”, “왜 권력에 맞서 싸우려 할까?” 그리고 “이런 현상이 정치·경제에서는 어떤 의미로 작용할까?”를 질문하고 답하는 책입니다. 역사와 문화와 정치, 그리고 우리 주변에 나타나는 힘에 대한 애증 관계를 진단함으로써 사람들이 왜 언더도그를 좋아하는지 깊이 있게 파헤친 연구서입니다.

그러나 프렐도 지적하듯이, 언더도그마 현상은 이성을 바탕을 둔 합리적인 철학이 아니고, 교육이나 교류를 통해 전파되는 것도 아닌, 세계 도처에 나타나는 현상 그 자체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책이 우리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친 언더도그마주의자가 어떻게 사람들을 속이고, 국제문제를 왜곡하며 권력을 얻으려 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동의하기가 어렵지만, 수용한다고 한다면 어쩌면 우리가 왜곡된 사회적 통념과 편견으로 사회 현상을 바라보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약간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이미 니체의 르상티망(ressentiment)에서 잘 나와 있습니다. 르상티망은 말 그대로, “약자가 강자에게 품는 질투, 원한, 증오, 열등감 등이 뒤섞인 감정”을 뜻하는데, 쉽게 말해, 강자에게 갖는 ‘시기심’입니다. 물론 니체는 시기심이라고 여기지 않는 감정과 행동까지도 포함한 조금 더 폭넓은 개념입니다. 따라서 약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를 왜 다시 생각해야 하는지를 이 책은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대남의 ‘공정’에 관한 관점은 바로 여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약육강식, 승자독식, 강자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약자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사는 세상에 불편한 존재, 없어져야 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이런 생각에 관해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준석 대표와 지금 젊은 이대남들의 일정부분 공유하는 생각입니다. 곧 젊음과 재산이 힘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언더도그마를 제대로 가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픈 곳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회의 건강함은 그 공동체 안에 있는 언더도그를 주변으로 밀어내지 않고 중심에 세울 때 완성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약자의 편에 서라!”, “갈릴리에서 만나자!”라고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언더도그마야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언더도그의 입장에서 오버도그의 불의를 막고, 그들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끌어내며, 함께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시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버도그를 회개시켜 언더도그와 함께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이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죠? 그 어려운 일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합니다. 또한 초대 교회가 그 힘든 일을 하도록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이 그렇죠? 말씀을 볼까요?

5. 부활의 증언자인 언더도그!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행 1:15-19)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120명 정도입니다. 제자들은 먼저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뽑습니다. 언더도그가 아니라, 오버도그의 편으로 간 사람을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시편을 인용하여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행 1:20-22)

예수 부활의 증언자를 세우는 것이죠?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행 1:23-26)

이렇게 해서 유다 대신 맛디아를 사도로 세우고, 초대교회는 사도들과 함께 부활의 증언자로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이가 언더도그를 보호해야 할 사명을 잃어버리고 자기 곳으로, 혹은 오버도그의 곳으로 갑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갈수록 세상은 강퍅해집니다. 오버도그 편에 서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그 길의 마지막은 아겔다마, 곧 피밭입니다. 이 피밭이 이미 구약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영원한 오버도그인 하나님께서는 오버도그의 땅 애굽에서 고통받는 언더도그인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애굽을 그들의 집에서, 그리고 홍해에서 피밭으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구약 본문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6. 회개하지 않는 오버도그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지니라.”(출 7:1-2)

오버도그인 바로에게 언더도그인 모세를 신같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언더도그가 오버도그의 땅에서 나오도록 이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버도그는 완악합니다. 물론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 7:3-4)

그렇습니다. 오버도그는 끝까지 마음이 완악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을 봐도 그렇지 않나요? ‘사망의 권세’에 취한 이들은 그 광기의 춤을 멈추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출 7:5-7)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손으로 오버도그를 멸하시고 언더도그를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비록 나이도 많고, 힘없는 언더도그인 모세와 아론이지만,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붙잡힐 때 언더도그의 새역사, 곧 출애굽을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 예수 부활에 관한 구약에 먼저 제시된 하나의 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언더도그의 얼굴에서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이겠지만, 그래서 가룟 유다와 같이 오버도그의 곳으로 가고 싶겠지만, 마침내 부활과 생명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런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