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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삶십자가와 부활(전도서 11,9-12,2; 고린도전서 2,1-5)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4.21 00:20
▲ Matthias Grünewald, 「The Crucifixion」 (1515) ⓒWikipedia

전도서 기자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탄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정말 그런 가를 묻고 탐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권력, 부, 지혜 등 모든 것을 살펴보았지만 궁극적으로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장벽 앞에서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죽음이라는 한계가 의미 있는 것을 탐구하면 할수록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이 이처럼 헛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소한 일상 속의 배려와 연대입니다. 전도서 4,9-12에서 그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따뜻하게 서로 일어서게 하는 배려와 연대를 말하며 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와 달리 헛되다는 평가를 덧붙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말합니까? 그렇다면 서로 배려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서로를 살리고 서로를 의미 있는 자로 인정하고 서로를 높이는 일입니다. 어쩌면 이를 발견했기 때문일 수 있는데, 전도서 기자는 살아있는 것 자체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의미를 발견합니다. 죽음으로 한계 지워진 생임에도 생에 대한 찬가를 부릅니다. 배려와 연대는 살아있음의 표현이고 살아있음을 희망으로 채워줍니다. 나눔으로 실현된 배려와 연대는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재앙에 대비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11,1-2).

삶을 밝게 하는 이것들이 과연 죽음의 한계 안에서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들이 오늘의 말씀이 뜻하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삶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의 한계 안에 갇힐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는 것, 아니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 형식은 말할 수 없었지만, 전도서 기자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삶, 그것은 그 하나님과 함께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며 책임적 삶 이외의 다른 삶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게 하는 것을 하나님 경외라고 하며 전도서 기자는 그것이 허망하다고 하는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 삶이 되기를 빕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적 삶을 사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힌 이 분만 알기로 결심했다고 한 까닭도 다른 무엇보다 그 때문일 것입니다(고전 2,2). 그는 고린도교인들 앞에서 지혜를 자랑하거나 그들을 아름다운 말로 설득하거나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미련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23-24).

책임적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양자는 어떤 관계일까요?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사실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는 일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십자가형의 잔혹함은 사람이 그 위에서 죽음을 맞기까지 긴 시간 동안 뚜렷한 의식으로 고통을 온 몸에 새기며 죽음에 이른다는 데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어느 순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날 버리십니까” 하며 하늘을 향해 절규하셨습니다. 절규는 희망과 기대에 기반합니다. 예수께서는 무슨 기대와 무슨 희망을 갖고 있었길래 십자가 위에서 그리 외치신 것일까요?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메고 온 길 저 너머의 화려한 예루살렘도, 거기서 사람들 사이에 뿌려진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삼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권력자들도, 예루살렘 위에 군림하는 로마총독과 그 군대도 모두 그대로입니다. 그가 제자들과 함께 오가며 희망의 빛을 던지고자 했던 저 예루살렘은 어떤 변화의 조짐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예수의 십자가형으로 오히려 안정의 계기를 찾은 듯합니다. 이런 세상의 모습이 십자가 위의 예수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날 버리십니까라고 외치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십자가에서 자기를 겁먹은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이름 없는 그의 제자들을 보았을 때 하늘이 야속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십자가 위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을 터이지만 예수의 눈에 그를 보고 있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들어왔습니다. 예수 때문에 아마 한순간도 마음 편할 날 없이 늘 긴장 속에 살아 왔을 마리아입니다. 그는 마리아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 없을지 모르나 마리아를 향한 마음은 늘 따뜻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마리아를 그가 사랑했던 제자에게 네 어머니로 모시라는 마지막 부탁을 하는 것으로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인지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 마리아의 아들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고 하는 것 아닐까요? 그는 만족감과 함께 자기의 영혼을 ‘넘기셨습니다(요 19,30).’ 다른 본문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내 영혼을 당신 (곧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아버지를 향한 탄식이 아버지에 대한 의지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이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그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그에게 그의 부활로 응답하셨습니다. 부활이란 말은 수동태로 나타납니다. 부활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이 실제 주어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침묵하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탄식을 들으신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맡겨진 예수의 영혼을 ‘손에 들고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그 앞에서 살았던 책임적 삶을 모른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의 부활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에 대한 부정이며 달라지지 않은 세상을 새세상으로 바꾸는 첫걸음입니다.

이처럼 전도서 기자의 깨달음은 예수에게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현실이 우리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은 부활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헛됨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배려와 연대와 나눔의 따뜻한 삶으로 여기서 새세상을 살며 생명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치게 합시다. 예수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 저 너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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