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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희망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미래사회의 변화와 교회의 선교적 대응 (2)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2.05.03 02:17
▲ 현재의 교회는 누구에게도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다. 다시 교회가 희망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Getty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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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고 독일의 맑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는 말했다.(1) 그런데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종교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종교인들이 오히려 구원의 대상이 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종교가 다시 인류에게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종교의 가르침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러나 결코 낡은 것이 아니고 여전히 인류가 그 곳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지혜의 보고라는 점에서 ‘오래된 새 길’, ‘새로운 옛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종교가 주장하는 근본가치, 곧 ‘오래된 새 길’을 스스로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교적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근본가치들 가운데 우리 시대에 더욱 요청되는 것은 ‘생태적 삶’, ‘평화와 정의와 공영의 삶’, 그리고 ‘대화적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공신력과 발언권을 회복하고 민족과 인류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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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크리스천 실존을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규정한바 있다. 신앙인은 세상 밖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인도 세상 안에 산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상처받고, 슬퍼하며, 좌절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분노하고, 병들어 아프고,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세상 안에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새로운 가치란 우리 시대의 ‘주류가치’, ‘더 많이, 더 크게, 더 빨리, 더 높이’에 대한 ‘대항가치’이면서, ‘대안가치’여야 한다. ‘더 적게’, ‘더 작게’, ‘더 늦게’, 더 낮게‘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적대감에서가 아니라 사랑에서부터 비롯된, 종교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기쁘고 자발적으로 실천되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가치를 의미한다.

바울은 또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말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이미 실현된 현실처럼 생각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미 보이는 것처럼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가능의 가능성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혁명적 본질이다.

‘혁명’(革命)은 본래 ‘가죽에 쓴 신의 명령’을 의미했다고 한다. 서양 전통에서도 ‘혁명’이라는 단어는 천문학과 관계되어 코페르니쿠스(Kopernikus, 1473-1543)의 작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1543)에서 최초로 등장하며, 혁명은 ‘규칙적이고 순환적으로 움직이는 천구운동으로서,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저항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고, 그래서 새로움이나 폭력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다.(2) 점차 혁명이 정치권력의 폭력적 이동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지만 본래 혁명은 하늘의 뜻과 관계되었던 것이다.

하늘의 질서를 이 땅 위에 실현하려는 시도야말로 유토피아 운동이고, 종교적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종교는 불가능한 새로운 가치를 이 낡은 세계 안에서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새로운 가치’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나는 ‘믿음’이야말로 새로운 가치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석 유영모는 ‘믿음’을 ‘밑바닥 소리’라고 했다. 우리 존재의 깊은 바닥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신앙이라는 말이다. 모든 피조물의 신음소리, 우리 존재, 우주의 깊은 밑바닥 소리를 듣는 사람이 희망의 담지자이다. 나는 교회가 이런 ‘희망의 담지자’(Traeger der Hoffnung), ‘정신의 귀족’이 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선교적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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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신학은 전통적으로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전통 위에서 형성되었다.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개신교의 신학적 정체성은, 특히 마틴 루터(M. Luther)의 신학사상에 근거한 정체성은 ‘오직 믿음’, ‘오직 성서’, ‘오직 은혜’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개신교의 신학적 정체성은 개인의 발견과 신앙의 자유를 확립함으로써 서구 근대의 문을 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전통 위에 서있는 개신교의 정체성은 오늘 ‘신앙의 사유화’에로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신앙은 삶에서 하나의 별개 영역이고 도덕과 죽음의 문제를 다룰 뿐, 경제적 혹은 공적 삶의 부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후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신앙을 공적 삶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켰다.(3)

신이 사람의 정신적 영역으로, 기독교가 세계의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 것은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되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서 명확하게 되었고, 20세기 실존주의 신학에서 극치에 이르렀다. 기독교의 자리도 우주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세계에로 축소되었다고 생태여성주의신학자 샐리 맥페이그도 주장한다.(4) 예외가 있다면 과정신학과 해방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사사화’는 감성에 근거한 부흥운동과 교회성장에 기여한 바가 있다. 최근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슐라이어마허 신학의 부활, 라틴 아메리카에서 빠르게 퍼져가는 ‘신은사운동’ 등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사화(Privatisierung)를 더욱 강화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공공성, 세상을 위한 교회의 책임적 참여를 신학화하는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까지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정치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책임사회론’, ‘정의, 평화, 창조’(JPIC), ‘희년신학’ 등이 신학적 담론으로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교’신학에서부터 ‘희년 신학’에 이르기까지의 진보신학적 담론들은 모든 담론들이 그렇듯이 시대적 소임을 다했고, 급변하는 시대의 도전에 응전할 수 있는 신학적 상상력에서도 한계를 보여주었다.

기후변화, 경제세계화와 양극화, 종교간 갈등과 지역분쟁의 심화 등 상호밀접하게 연관된 세계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그 해결을 위한 대안의 제시와 실천을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탐욕에 기초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는 새로운 선교 신학적 담론으로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데 ‘공공성 신학’(Theologie der Oeffentlichkeit) 담론이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공성’ 개념에 대한 논란, 곧 그 개념의 역사적 발생과 발전 과정에 대한 논란이 다양한 영역에서, 그리고 매우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지만,(5) 나는 일단 ‘공공성’을 ‘자유롭고 평등한 인민(populus)이 공개적인 의사소통의 절차를 통하여(publizitaet) 공공복리(salus publica)를 추구하는 속성’으로 규정하는 조한상의 입장을 따른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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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공공성 신학’이란 무엇일까?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열정으로부터 생성하며, 이 열정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에서 생성’하며, ‘이 열정 속에서 신학은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세계에 대한 환상’(Phantasie)이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필연적으로 선교신학, ‘공적 신학’(Public Theology)이 된다고 에큐메니칼 신학자인 몰트만은 지적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공적 신학’은 “이 시대의 고난에 참여하며, 동시대인들이 실존하는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나타내고 … 비판적으로 또 예언자적으로 사회의 공적 문제에 개입”하는 과제를 가지는데, 하나님 나라의 신학으로서의 공적 신학은 그러므로 “근본주의적으로 자신의 신앙공동체 속으로 퇴각하지도 않고, 현대주의적으로 사회의 경향에 편승하지도 않으며, 저항적으로 또 생산적으로 땅 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의 미래에 관심을 가진다.”(7)

몰트만에게 ‘공적 신학’이란 ‘하나님 나라의 신학’에 다름 아니다. ‘공적 신학’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시대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는 신학’, ‘비판적이고 예언자적으로 사회의 공적 문제에 개입하게 하는 신학’,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미래에 관심을 가지는 신학’으로 규정될 수 있다.

미국에서 잘 알려진 대표적인 공공신학의 대변인은 프린스톤 신학대학원 은퇴교수인 맥스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인데, 그 역시 ‘Public Theology’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한국어로는 ‘공공신학’으로 번역되었다. 스택하우스는 ‘공공신학’이란 개념을 미국에서 최초로 사용한 신학자로 마틴 마티(Martin Marty)를 제시한다. 마틴 마티는 사적인 영역으로 퇴거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시민종교’로 규정하고, 그에 대립하기 위해 ‘공적 신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8)

‘공공신학’이 미국이라는 특수한 콘텍스트에서 발전된 개념이라고 보는 스택하우스는 ‘공공신학’이 ‘거대한 근대화의 물결이 초래한 세속화의 관념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무기력해졌던 신학적 전통에 활력을 되찾아 주었다’고 말한다.(9)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공공적 지식인으로서 사회정의를 다루기 위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게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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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공공성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1987년 창립, 이하 기윤실)이 창립 20주년을 기해서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신학적 토대를 정립하려는’ 의도에서 2007년부터 전문가 집담회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기윤실은 한국개신교 복음주의 진영의 기독교시민운동의 하나로 출범했는데, 복음주의적 기독교 시민운동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손봉호 교수가 주창한 이른바 ‘선지자적 비관주의’로는 변화된 시대의 기독교시민운동을 끌고 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공공신학’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의 전문가 집담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종합하면, 기윤실이 이해하는 ‘공공신학’은 아프카니스탄 한국인 단기 선교팀 피랍사건 후 더욱 분명해진 한국 개신교의 게토화를 극복하고 세상과 소통하면서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신학적 담론으로 구상되는 것 같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담아내는 신학적 담론이 없었던 것이 아닌데, 굳이 새로운 담론을 모색하려는 것은 기독교 시민사회론과의 관계 때문인 것 같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교’나 ‘민중신학’ 보다는 ‘공공신학’이라는 담론이 시민사회 안에 있는 교회의 공공성을 이끌어내는데 덜 과격하게 받아드려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내부에서도 ‘공공신학’이 기독교 시민사회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비슷한 성격의 복음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새세대 교회윤리연구소’는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와 ‘공공신학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10)를 발간하였다. ‘새세대 교회윤리연구소’ 문시영 소장에 의하면, 이들의 공공신학 형성 배경에는 시민사회의 ‘교회비판’과 교회의 이른바 ‘은혜윤리’ 사이의 갈등이 있다. 시민사회가 교회를 비난하고 정죄하지만 말고, 교회 스스로 자신의 공공성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 외에 또 다른 길을 시민사회가 어떻게 제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그는 시민사회 측으로부터 제기되는 교회의 공공성 세우기의 내용을 몇 가지 제시하는데, ‘목회자 납세문제’, ‘교회와 지역사회의 주차갈등’, ‘저작권 문제’, ‘교회 재정투명성 문제’ 등이 그것이다.(11) 기고자들 가운데는 세계화 문제, 기독교경제윤리 등 거대담론에서 접근하는 학자도 있지만, 목회자 납세문제, 주차갈등 등 미시담론, 개인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학자도 보인다.

‘공적 신학’, ‘공공 신학’, 혹은 ‘공공성 신학’ 등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신학의 내용과 방향이 여전히 큰 틀에서 신학적 입장 차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복음주의권에서 주장하는 ‘공적 신학’, ‘공공 신학’은 복음주의 내부 진영 안에서 상대적 진보성을 담보하는 담론이라고 판단된다. 에큐메니칼 진영에게 ‘공공 신학’은 사회참여신학의 전통에서 다양한 담론으로 이미 구체화되었기 때문에, 복음주의진영의 공공신학이 크게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공공성의 신학’은 당대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담론으로서 지구 자원과 재화에 대한 접근의 인민성, 개방성, 공공 복리성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면서, 교회의 공공성과 공적 책임을 확립하는 신학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미주

(미주 1)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5』, 박설호 역 (서울: 열린책들, 2004), 2543.

(미주 2) Hannah Arendt, Ueber die Revolution, Piper, Muenchen, 1986, 50-51.

(미주 3) 샐리 맥페이그, 『풍성한 생명: 지구의 위기 앞에 다시 생각하는 신학과 경제』, 장윤재·장양미 역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8), 225 참조.

(미주 4) 샐리 맥페이그, 같은 책, 341 참조. 

(미주 5) 이승훈, “근대와 공공성 딜레마: 개념과 사상을 중심으로”, 김정현, 『동아시아 公 개념의 전통과 근대 공동체의식』; 홍성태, “시민적 공공성과 한국사회의 발전”, 민주사회정책연구원,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서울: 한울, 2008), 상반기(통권 13호); 이기호 외, 『공공성: 공공성에 대한 다양한 접근』 (서울: 미메시스, 2008);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 『공공신학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서울: 북코리아[선학사]), 2008;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 한승완 역 (서울: 나남, 2007); Wolfgang Huber, Kirche und Oeffentlichkeit, Klett, Stuttgart, 1973; Juergen Moltmann, God for a Secular Society: The Public Relevance of Theology, SCM Press, 1999; Cynthia Briggs Kittredge u.a(ed.), The Bible in the Public Square: Reading the Signs of the Times, Fortress Press, Minneapolis, 2008, 등 참조.

(미주 6) 조한상,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서울: 책세상, 2009), 34.

(미주 7) 위르겐 몰트만, 『신학의 방법과 형식: 나의 신학여정』, 김균진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17.

(미주 8)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 편, 『공공신학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16.

(미주 9) 같은 책, 21-22.

(미주 10) 새세대 교회윤리연구소 편, 『공공신학,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미주 11) 같은 책, 9 참조.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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