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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생각한다“장애인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탈시설 권리 투쟁” 2022 NCCK신학위 <사건과 신학> 4월호 ⑴
홍인식(새길교회/새길기독사회문화원) | 승인 2022.05.04 00:49
▲ 지난 4월20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국회 앞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 행사를 시작하고 있다. ⓒ홍인식

지난 4월 17일 주일은 부활주일이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과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를 통하여 시작된 하나님의 혁명이 실패로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이루어진다는 확신과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그들의 자녀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분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어떤 고난도, 아니 죽음까지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이처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부활의 경험은 오합지졸과 같았던 제자들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부활이었다. 예수는 유대 땅에서 한 이름 없는 유대인으로 살다 죽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는 그렇게 살다가 이름 없이 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예수를 ‘예수’가 되게 한 것은 바로 이름 없음을 깨뜨린 부활을 통해서이다. 예수는 부활을 통하여 한 이름 없는 유대인에서 이름을 회복한 주님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은 지금까지 권력을 잡은 자들에 의하여 무시되고 억압받아왔던 그래서 사람 취급을 받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한 작은 스승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일시에 반전시켜 놓았다. 이제 예수의 부활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임을 우리 모두에게 천명하였다.

권력을 잡은 자들, 힘이 있는 자들이 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다. 우리의 거의 모든 역사 기록들은 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한 자들만의 역사이다. 남을 누른 자들만의 역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그것도 떠돌이 ‘하삐루’(떠돌이라는 뜻으로서 히브리라는 말의 어원이라고 추정된다.)들인 히브리 민족을 선택하여 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드셨다. 이집트에서 힘 있는 자들에 의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기고 노예 생활을 하던 ‘하삐루’를 선택하신 이유는 이름 없는 자들, 힘없는 자들이 이루는 역사야말로 하나님의 선택된 역사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같은 사실은 이름 없는 조그마한 유대인이었던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피해자들, 상처받은 자들, 천대받던 자들, 억눌린 자들이 부활을 통하여 회복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부활을 믿을 수 있는 동기는 바로 불의한 가해자들이 더 이상 정당성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고 피해자들의 권리가 회복되는 데에 있다.”라고 말한다.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모든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다.

지난 4월 13일 ‘전국장애인차별쳘폐연대’(전장연) 박경석 공동대표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간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거기서 이제 집권당이 될 당의 대표가 장애인들의 이동권 주장을 위한 시위 행동에 대하여 비장애인들의 이동권을 방해한다는 의미의 말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이것을 비문명적 행위라고 규정했다. 과연 우리나라는 비문명적 사회인가 아니면 문명적 사회인가? 장애인들의 이동권 주장을 위한 절규가 지하철 운행을 조금 지연시키기 때문에 그 행위를 비문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문명사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 결코, 장애인이 비장애인 속도에 맞출 수가 없다. 함께 살아가는 것, 비장애인이 장애인 속도에 맞추는 것이 진정한 문명사회이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21년, 아니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장애인들의 외침을 통하여 우리는 이제 비로소 진정한 문명이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다. 이름 없는 장애인들이 그들의 권리를 꾸준히 외침으로써(부활함으로써) 우리가 문명사회를 향한 희망을 보게 된 것이다. 부활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름 없는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우리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게 되고 오직 물질로 인격을 판단하는 이 시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힘차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20일 개최된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 맞이 ‘장애인권리민생 4법 재개정’ 투쟁결의대회에서 전장연 권달주 상임대표는 “우리는 4월 20일을 동정과 시혜의 장애인의 날을 당당히 거부하고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로 맞이하고 있다.”고 말했고 연대 발언에 나섰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미류 활동가 또한 “차별받아온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입니다. 우리의 이름으로 평등의 역사를 쓰자. 누구도 배제 되지 않는 세상에 가장 앞장서 열어왔던 장애인 동지와 함께 이번 4월에는 차별금지법 있는 봄을 기필코 맞자”고 강하게 말했던 바 있다.

이름 없는 사람들, 아니 이름은 있었지만 잊히고 외면당했던 사람들이 이름을 되찾고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가 들려지는 사회는 진정 부활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결의 대회 하루 전날인 4월 19일에는 발달 장애인 부모들의 삭발식이 청와대 근처 효자동 치안센터 앞에서 진행되었다. 555명이 참여한 삭발식을 보면서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외침을 외면하고 있을 것인가?” 그들이 꼭 삭발을 하면서까지 소리를 외칠 수밖에 없도록 놔두고 있는 우리 사회가 문명사회일까? 언제나 우리는 비문명 사회를 벗어나 조그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섬세함과 배려가 있는 문명사회로 나갈 수 있을까?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이게 대한민국 장애인들의 현주소입니다. 특히 목소리가 있지만, 그 목소리를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이 대한민국 사회에 있다면 바로 그것이 비문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비록 저희가 같이 싸워서 이기지는 못할지라도 잊히지는 맙시다!”

박경석 전장연 공동대표의 외침이다.

이름 없는 예수는 죽음으로 외쳤고 결국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람됨의 의미를 돌려주었다. 오늘 장애인들의 이동권과 교육권을 비롯한 그들에게 거부되었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이 회복되는 날, 그날은 우리 모두의 부활의 날이 될 것이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정한 의미가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는 날일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장애인과 비장애인, 인간이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 투쟁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향해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 15:55)라는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는 일이 될 것이다.

홍인식(새길교회/새길기독사회문화원)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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