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부활 신앙의 완성, 갈릴리를 넘어 두로와 시돈에서!(느 9:27-38; 요일 2:1-6; 마 15:21-28)부활절 넷째 주일/어버이주일(5월8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5.06 15:31

1. 한자 효(孝)와 친(親)의 뜻풀이

오늘은 부활절 넷째주일이자 어버이주일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어버이날과 어버이주일 날짜가 겹치기도 하는데, 부모님의 사랑을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자로 어버이를 뜻하는 글자가 ‘친(親)’자입니다. 아버지를 지칭할 때는 부친(父親), 어머니는 모친(母親)입니다. 그런데 이 ‘친’자는 어버이의 마음이 담긴 뜻글자입니다. 의미는 이렇습니다.

▲ 어버이 ‘친’, 효도 ‘효’ 한자 뜻풀이

옛날 어느 시골에 홀어머니를 혼자 모시고 있는 나무꾼 노총각이 있었습니다. 시골에는 닷새 만에 장이 서게 되는데, 오일장입니다. 이렇게 장이 서면 아들은 그동안 모은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장터에 팔러 갑니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뜰 안의 여러 농사일과 집안일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은 장에 간 아들에게 있습니다. 오늘 갖고 간 물건을 팔았는지, 올해는 넘기지 말고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등등.

마침내 저녁이 되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도 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습니다. 저녁을 다 지어놓고 기다리다 못해 동구 밖까지 나가봅니다. 언덕에 올라보니 장터에 갔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습니다. 아들은 보일 듯 말 듯합니다. 마침 언덕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그 나무에 올라가서 멀리 장터를 향해 봅니다. 나무 목(木)자 위에 설 립(立)자가 있죠? 그 옆에는 볼 견(見)자가 있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아들이 언제 오는지 지켜본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 ‘친’자입니다.

여기에 버금가는 한자가 효도 ‘효(孝)’입니다. 이제 아들은 갖고 간 것을 저녁 늦게까지 다 팔고서 고등어 몇 마리와 어머니께 드릴 몇 가지 물건을 사 들고 오는데, 동구 밖에서 어머니를 만납니다. “어머니, 다리 아프실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제가 업어 드리겠습니다. 지게 위에 올라타십시오.” 그래서 아들이 지게 위에 어머니를 태워, 업고 있는 모습이 한자의 효도할 때의 ‘효’자입니다. 이러한 한자의 모습, 親자와 孝자가 가정에 있을 때, 그 가정은 행복하고 복 받은 가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어버이의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복음서 말씀은 귀신 들린 딸아이를 걱정하는 시로와 시돈 지방에 있는 이방 가나안 여인의 모성애를 보여줍니다. 특별히 이것은 부활 신앙의 완성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갈릴리를 넘어 이방 땅까지 부활 신앙은 흘러넘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구약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부활 신앙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어버이 같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느헤미야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모든 만물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자신을 불태우신 것을 소개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부활 신앙을 경험한 모든 이들, 곧 부모든 자녀든, 주안에 산다고 하는 모든 이들의 마땅히 행할 바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2.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마 15:21-23)

▲ 베니게(페니키아)의 두로와 시돈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전도하시다, 이제 이방 땅으로 가셨습니다. 베니게의 두 주요 항구 도시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이곳은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는 도시입니다. 이러한 이방 지역에서 또 이방 여인 가나안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은 딸이 귀신 들려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원수죠? 따라서 유대인인 예수님의 답은 당연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마 15:24)” 그런데도 여인은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5-28)

대화도 빠르고, 사건의 진행도 급속도로 흘러갑니다. 사실 이 말씀은 가버나움의 ‘백부장 하인 사건(마 8:5-13)’과 연결이 되어 예수님의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 21:33-41, 포도원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간 주인이 종과 아들을 보내 열매를 받으려고 했으나, 종을 때리고 아들을 죽인 자들을 진멸한 사건)’와 ‘건축자들이 버린 돌 비유(마 21:42-46)’와 관련 지어 생각해 보면, 왜 대화도 빠르고, 사건의 진행이 급속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같은 유대인들은,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 알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마 21:45-46). 결국 이어지는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마 22:1-9)에서 청한 손님은 하나도 오지 않아, 잔치에 합당하지 않아 네거리 길에서 아무나 초청한 것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인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말씀(마 28:18-20)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 다시 가나안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여인은 자신의 딸을 고치고자, 자신과 같은 이방인을 개로 취급하는 유대인들 앞에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민족의 구분이 없기에 그녀는 자신의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만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의 딸은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결국은 자신의 딸도 고치고, 이방인 구원 사건의 문도 활짝 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유다 백성의 70년 바벨론 포로 유배가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구약 말씀은 이러한 바벨론 포로 생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회상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3.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오늘 구약 말씀은 느헤미야 총독이 유대인을 데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온 이후의 상황입니다. 유대인들은 70년 바벨론 포로 유배 이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칙령으로 인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왕궁에서 왕의 술잔을 드는 자(심복)인 느헤미야 총독은 유대인 귀환을 이끌게 됩니다. 이것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귀환입니다.

당시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에스라와 함께 협력하여 백성을 영적, 도덕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유대 땅의 회복을 꿈꾸었습니다. 먼저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완공하고 모든 백성을 모아놓고 에스라에게 율법 책을 가져와 백성 앞에서 낭독하고 온 유대 백성이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습니다(느 8:18).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은 이렇게 율법을 듣고 참회하였던 유다 백성들의 본격적인 회개와 참회 운동의 시작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금식하며 거국적인 회개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새기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은혜 가운데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회상하며 참회의 기도를 올립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건만, 목이 굳어 주 앞에서 악을 행한 유다 백성들의 모습을 참회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의 참회기도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느 9:29)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 조상들이 당한 고통을 기억하시어 구원을 베풀어 주실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느 9:30-33)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구원해 주시면, 다시금 하나님과 견고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께서 그들에게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그 나라와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 곧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그것의 열매를 먹고 그것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왕들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그들이 우리의 몸과 가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란이 심하오며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 하나이다 하였느니라.”(느 9:34-38)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느헤미야의 참회 기도는 끝이 납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부활 신앙을 경험한 이들은 이러한 사랑을 행하며 살라고 권면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4.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5)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온 세상의 죄를 사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일한 계명입니다. 거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구별이 없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기 때문(고전 8:6)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유일한 계명인 사랑을 지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3-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버이를 뜻하는 ‘친’자와 효도를 뜻하는 ‘효’자가 이제 나의 자녀만 바라보는 ‘친’, 나의 부모만 업는 ‘효’가 아니라, 이웃과 지구촌 모든 만물을 향할 때, 부활 신앙의 완성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계명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