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칼럼
고흐로 불렸던, 예수날라리 기자의 [기자 수첩]
정리연 | 승인 2022.05.06 15:59

미술에 완전 무지하고 무식하다. 무슨 사조니, 시대니, 기법? 모른다. 문화인(?) 흉내 좀 내보려고 미술관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만지면 안 되는 사각 틀이 흐트러짐 없이 나열되어 있어서 숨 막힐 때도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미술관은 어찌나 하얗고 깨끗한지! 어떤 감동을 하기도 전에 공간이 주는 엄숙함과 근엄함 - 니가 미술을 알아?- 때문에 그나마 냈던 용기도 기죽곤 했다(자기 위안 변명…).

유명한 작품들을 봐도 큰 감흥이 별로 없었고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그림도 많았다. 혹시나 누가 “그림 어때요? 어떤 게 좋은가요?” 물어볼까 봐 조마조마했던 날들이었다. ‘난 정말 예술적이지 못한 인간이구나, 상상력이 없구나’라며 스스로 낙담한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그래, 나 ‘미·알·못’이다. 그래도 감동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그림을 마주했는데, 작가는 물론 모델의 영혼 그리고 그 아픔까지 느껴져서 울컥했다. 고흐의 <슬픔>이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서 그전에도 어딘가에서 종종 마주쳤었지만, 그날 유난히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감동은 이슬 내린 오솔길을 걷는 거라고.

‘어? 이해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거구나.’

▲ Vincent van Gogh, 「Sorrow」 (1882) ⓒhttps://www.vangoghmuseum.nl/ja/collection/p0002V1962

잘 알려진 대로 그림 속의 여인은 ‘시엔’이라는 매춘부이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기고 엮음, 위즈덤하우스).

“지난겨울, 임신한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남자한테서 버림받은 여자지. 겨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얻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겠지…. 처음 그 여자를 만났을 때는 병색이 짙어 보여서 눈길이 갔다. 목욕을 시키고 여러모로 보살펴주자 그녀는 훨씬 더 건강해졌다.”(53)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눠서 지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 아니겠니? 그녀의 이름은 시엔이다.”(59)

매끄러운 피부와 반짝이는 표정, 균형 잡힌 실루엣이 아니라 주름지고 생기 없는 육체는 생의 고단함을 오롯이 홀로 짊어지고 잔뜩 웅크리고 있다. 사랑받지 못했던 존재로서의 아픔, 가난과 불행의 상처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맨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는 걸까? 너무 힘겹다고,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 없었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여인의 모습은 평균적으로 익숙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그’ 아름답지 않은 아우라가 뿜어내는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동안 거친 삶을 살수 밖에 없었던 그녀는 조건 없는 지지와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으리라. 그걸 알아챈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고흐였다. 고흐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가족에게서, 사랑했던 여인에게서 외면받고 자신의 그림과 열정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고흐 역시 시엔이었다.

슬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감정

고흐의 <슬픔>에는 아름다운 풍경도, 화려한 색채도 없다. 강렬하거나 역동적인 포즈도 아니다. 하지만 찬란하게 부서지는 기존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이라는 틀 너머, 가슴에 묻어두고 싶은 ‘뭔가’가 있다. 무심하게 지나치곤 했던 이 그림을 새로이 받아들였던 때는 나 역시 매우 힘들었던 시기였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현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대며 울던 시간. 혼자서는 너무 버거운 생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를 터놓을 수 있는 곳은 주님 앞이었다. 아니,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희망을 잃고 얼굴을 파묻은 채 어떠한 의욕도 없이 숨죽여 있을 때, 다독여 주고 내 존재를 일깨워 준 손길은 주님 그리고 한 사람을 통해서였다. 마법처럼 뭔가가 당장 나타나거나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끝난 게 아니라 잠시 멈춘 것뿐임을, 다시 일어서서 남아 있는 인생에 발을 내디딜 수 있음을 깨달았고 천천히 걷다 보니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시엔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날 영혼의 교감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봐도 괜찮은 여성, 우월한 여성이 아니라, 고통 받고 고립된, 절망과 상처뿐인 여성(‘sex’로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을 볼 수 있고 손잡아 줄 수 있었던 고흐의 모습에서, 그 사람의 모습에서 예수님이 보인 것은 너무 지나친 걸까?

그분이 먼저 그렇게 사셨다. 언제나 가난한 마음으로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향하셨다. 소외당하고 약한 자들에게 손을 내미셨고 함께 먹고 웃고 대화하셨다. 그들을 온몸과 마음을 다해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다. 사람들에게 오해와 비난을 받고 빠듯하고 볼품없는 생활이었지만, 영혼과 생명을 바쳐 가녀린 영혼을 돌봐준 고흐의 진실된 마음이 예수님을 닮았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말했던, 목사의 길을 가려고 했을 정도로 신앙심이 매우 깊었던 고흐였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믿는 자들은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걸까?

▲ Vincent van Gogh, 「Sorrow」 (1882) ⓒhttps://www.vangoghmuseum.nl/ja/collection/p0002V1962

정리연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리연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