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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성서 밖의 참된 말들이 존재할까칼 바르트의 빛의 론 ⑷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2.05.07 16:06
▲ 바르트의 모차르트 사랑은 유명하다.

성서와 교회 밖에 있는 참된 말들의 가능성과 근거

그러나 어떻게 성서와 교회 밖에(extra muros ecclesia) 참된 말들이 있을 수 있는가? 바르트는 여기서 어떠한 자연신학에도 복귀하지 않는 사려 깊고 유효한 대답을 하였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세상을 화해시키셨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와 가능성을 갖는 그런 참된 말들이 있다. 성서에 증언된 그의 부활은 이 우주적 업적에 대한 계시이다. 그는 죄와 어둠과 악의 세력과의 전투에서 이미 승리하셨고, 지금 모든 것에 대해 승리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교회의 울타리에 제한되지 않고, 온 세상은 말씀의 지배 아래 있다. 이 진리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선언된 성서의 증거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고 알려졌다. 따라서 우리는 “정당하게(de jure) 그의 십자가로부터, 그의 안에서 성취된 화해로부터 모든 사람들과 온 창조 세계가 그의 영광의 무대, 그러므로 그의 말씀의 수령자들과 담지자로 정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CDⅣ/3-1, 117).

세상에 있는 참된 말들의 근거와 가능성은 이와 같이 성서가 증언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에 있다. 이 위대하고 강력한 진리에서 철회되거나 변경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부활하신 분으로서 그는 세상의 주님이고, 그 자신을 위한 증인들을 성서와 교회 밖에서조차 불러낼 수 있다. 주님은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마 3:9). 이런 이유에서 바르트는 교회의 영역 밖에 있는 자들조차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영역(교회) 밖에서조차 그리스도는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바라지도 않는 자들을 … 그의 증인으로 삼기 위해 그의 능력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CDⅣ/3-1, 118).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은 성서와 교회의 영역을 넘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지식이나 요구하는 바와 달리, 심지어 그들 자신의 지식이나 요구하는 바에 대립하여 진지하게 진리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을 말하는 자가 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발람의 입에서조차 선한 목자의 잘 알려진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그것의 불길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CDⅣ/3-1, 119).(1)

성서와 교회의 선포와 그 말들의 관계

성서와 교회 밖에 참된 말들이 있다는 바르트의 이러한 표현은, 그가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새롭게 그것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그러나 고려되는 참된 말들은 “성서와 객관적으로 일치하면서 뚜렷한 시대와 상황 속에 있는 성서의 증거를 조명하고, 강조하며, 설명하는 것들이고, 그러므로 심오한 의미에서 그것을 확증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분명하고 확실하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들이다”(CDⅣ/3-1, 115). 그러니까 바르트가 고려하는 말들은, 그가 “하늘나라의 비유들”이라고 생각했던 성서와 교회의 말들처럼, “비록 다른 자료와 다른 말로써 말하더라도, 이 유일한 말씀이 말하는 바로 그것을 진술하는 것들이다”(CDⅣ/3-1, 114, 115).

물론, 성서와 교회 밖에 있는 이런 참된 말들은 그 자체로는 궁극적인 힘과 의미가 없다. 단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과의 관련 속에서만 그것들은 참된 말들로 불려질 수 있을 뿐이다(CDⅣ/3-1, 11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단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과도 화해하셨고, 또한 하나님이 교회의 울타리 밖에서도 활동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자신 있게 교회 밖에서 말해진 그런 참된 말들을 고려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교회가 “그 말들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는다면, 어리석고 은혜를 모르는 일”이라고도 말한다(CDⅣ/3-1, 115, 116).

그러나 교회는 이 말들이 유일한 참된 말씀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그리고 이 말들이 유일한 말씀을 증언하는가 아닌가를 면밀히 검사해야 한다. 바르트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성서와 그것의 일치를 찾아야 한다. 만약 그것이 참된 말이라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되고 특징이 되는 성서적 메시지의 맥락에 통합될 수밖에 없다. 둘째, 교회의 교리(어떤 제한과 함께)와 그것이 일치하는지 어떤지를 검사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참된 것이라면, 그것은 교리와 신앙고백 그 이상의 새로운 어떤 것을 전해줄 수 있다.

셋째, 교회 밖에 있는 이런 말들의 열매가 선하고 그것들이 교회 내에서 긍정적인 결과들을 낳는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이다(CDⅣ/3-1, 126-128). 교회는 그 말들이 참된 말들인 한에서, 다시 말하면 성서와 교회의 교리에 일치하고, 교회 안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따라서 교회의 개혁을 위한 자극제 역할을 할 때, 그 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전언들”(free communications)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CDⅣ/3-1, 130).

그러나 세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전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와 달리 통일성과 조화, 항구성과 보편성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모든 곳에서 모두를 위해 타당한 지식의 원천과 규범으로써 선포될 수 없다!”(CDⅣ/3-1, 131, 133). 말하자면 “자유로운 전언들”은 제2의 성서와 같은 보편타당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 교회 앞에 제시될 수 없다. 단지 제한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자유로운 전언들”에 개방성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계시의 다른 원천으로 만드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단과 분열, 그리고 종파들과 모든 분파들의 형성, 모든 유혹과 미혹들, 복음의 위조들과 기독교인의 삶의 모든 탈선”이 있을 뿐이다(CDⅣ/3-1, 134).

그래서 바르트는 “자유로운 전언들”을 인식할 수 있는 자들이 단지 그것들을 “계시”나 어떤 법으로 제시하지 않고, 그 자체로 말하게 하면서 참된 말들을 듣고 그것에 철저하게 반해버린 사람으로서 행동할 때만,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뿐이고, 단지 그러할 때, 전체 교회에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한다(CDⅣ/3-1, 134-135).

그렇다면 어떤 말들이 성서와 교회의 영역 밖에 있는 참된 말인가? 바르트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성서와 교회 밖에 있는 참된 말들에 대해 단 하나의 구체적인 예도 제시하지 않았다.(2) 그것은 바르트의 관심이 그런 참된 말들을 독자적으로 다루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런 말들을 불러일으키고 그것들을 통하여 그 자신을 증명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드러내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관심은 세속 영역에 있는 이런 종류의 참된 말들을 고려에 넣어야 하는지 아닌지, 그리고 어느 정도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 그 자체로부터 우리의 주위를 딴 곳으로 돌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검토의 기본적인 성격에 속한다. 여기서 고려되는 구체적인 현상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있는 그대로는 고려되어야 하는 문제가 되지 못한다. 그러한 모든 현상들은 의심스럽고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의심스럽지 않고 논박할 수 없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고 그의 권능은 교회 밖에서조차 그러한 참된 말들을 불러일으키고 그것들을 통하여 그 자신을 증거할 수 있다. 그의 예언, 단지 그것만이 다루어져야 했던 주제이다”(CDⅣ/3-1, 135).

하지만 바르트는 성서와 교회 밖에 있는 말들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거짓된 것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다음과 같은 질문 속에서 제시했다. “그 말들은 사람들을 보다 자유롭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더욱 예속되게 만들었는가? 그것들은 그들을 얼마간 향상시켜 주었는가, 아니면 그들을 심연 속으로 더 깊이 밀어 넣었는가? 그것들은 그들을 하나가 되게 했는가, 아니면 분리시켰는가? 그것들은 그들을 세웠는가 파괴했는가, 모았는가 흩어지게 했는가, 살게 했는가 죽게 했는가?”(CDⅣ/3-1, 128).

미주

(미주 1) 바르트는 여기서 두 가지 종류의 세속주의를 말한다. 성서와 교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무신론(순수하고 절대적인 형식의 세속주의)도, 서구사회의 혼합되고 상대적인 세속주의도 온 세상을 통치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넘지 못할 장벽이 아니다. 여기서 바르트는 첫째 형식의 세속주의와 관련하여 본회퍼와 대결한다. 바르트는 본회퍼와 같이 “성숙한 세계”를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고, 교회의 전통적인 언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을 더 신뢰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부할지라도, 화해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한 반역은 성공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제 밖에 있는 그 어떤 세속의 영역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는 본회퍼의 ‘자율’의 주제를 프로메테우스적 무신론으로 이해한다.

(미주 2) 그러나 바르트는 여러 곳에서 모차르트(Mozart)의 음악을 하나님의 은총의 비유라고 했고, 산드로 보티첼리(Sandra Botticelli)의 그림과 특히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 Grünewald)의 그림을 모범적인 문화의 사례로 생각하기도 했다. K. Barth, 「바르트 사상의 변화」, 12-14, 107. 또한 E. Busch, Karl Barth, 116, 408. 또한 정치적인 분야에서 참된 문화는 형제애, 정의, 책임과 자유를 증진시켜 주는 것이고, 경제적인 분야에서는 사회 정의를 촉진하고, 물질의 궁핍을 해소하고, 자기 본위의 이익추구를 없애는 것이라고 했다. R. J. Palma, Karl Barth's Theology of Culture, 42-58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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