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예수가 드러나다그리스도인의 삶(고린도후서 4:7-10)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5.08 14:42
▲ Rembrandt, 「St. Paul in Prison」 (1627) ⓒWikimediaCommons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번 주일 성서일과에 따른 본문은 이사야 25장 1-9절, 시편 23편, 요한복음 5장 19-29절, 고린도후서 4장 7-18절 말씀입니다. 이번 주일에는 네 본문 모두를 관통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드리진 않을 생각입니다.

요한복음과 고린도후서의 말씀은 부활절 절기에 맞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참 생명을 이야기하는 본문이기에 선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와 시편의 본문은 오늘 저희가 살펴본 말씀인 고린도후서의 본문과 연결되어 선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네 본문 전체를 다루면서 말씀을 전해드리게 된다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참 생명,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순간에도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시편 23편의 고백과 같이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라는 말씀을 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전해드리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절반도 안 되는 이야기만 전하게 되는 듯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구절에만 치우친 말씀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사도 바울의 의도를 퇴색시킬 수 있는 설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다른 본문들을 선택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말씀이 무엇인지,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어떻게 전했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번 주일이 어버이 주일이자 어버이날 당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어버이의 모습도 잠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의미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배경에는 박해라는 상황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신이 여러 차례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다고 말합니다.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태장 세 번, 한 번은 돌로 맞았다고 말합니다.

또 세 번은 파선했다고 말하는데, 파선의 경우는 박해의 정황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가운데 발생한 생명의 위협이라는 측면에서 함께 나열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박해를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박해와 별개로 선교 과정에서 죽을 위험을 넘겼습니다.

물론 이런 박해와 위협의 상황이 당시 그리스도인 전체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박해의 상황이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 ‘너희’를 구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적극적인 선교에 동참한 이들, 사도와 같이 직분을 가진 이들을 지칭한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박해나 여러 위협으로 인해 사망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이런 위협의 길을 걷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보았을 때, 사도 바울은 박해라는 특수한 상황을 전제한 상태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그가 박해받는 이들만을 위해서 이 글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박해라는 상황을 삶의 어려움, 또는 어떤 형태로든 받게 되는 생명의 위협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박해를 받은 것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삶의 순간에 어떠한 위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사도 바울이 “우리는 언제나 박해를 이겨낼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분명 사도 바울은 앞에서 열거한 박해를 받아왔고, 그 순간에 죽음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과 다르게 박해를 통해 순교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박해가 아니더라도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죽음의 위협을 넘기지 못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은 실패자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이겨낸다’, ‘버틴다’, ‘극복한다’ 등의 표현은 사용되지 않습니다.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박해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 보여지는 사도 바울 말투는, 실제적인 죽음이 언제라도 우리 앞에 놓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추상적 의미의 죽음이나 먼 미래에 있을 죽음이 아니라 당장에라도 닥쳐올 수 있는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죽음이 있더라도 우리 안에 숨 쉬고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허락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주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가진 이들은 지금 육신으로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금 살아나게 됩니다.

이는 종말론적인 의미에서의 부활로 보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도래했을 때,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종말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금 의미를 바꿔 이야기하자면, 천국에서 다시금 살아나게 됨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이 본문의 말씀을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금 시대에 우리가 죽음을 감내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일부 지역에서는 복음 전파하는 일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선교 사명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목숨을 걸 정도로 복음 전파에 힘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일, 내 재산과 건강까지 버려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옳다고 말하기에도 어려움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죽음 이후에 맞이하게 될 천국에 관한 이야기 밖에는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곁에서 부활하여 천국의 삶을 누릴 것이다.”라는 말 밖에는 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전하는 이야기를 보면,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16절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전의 잘못된 모습을 버린 순간, 옛 모습의 죽음을 경험한 순간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생명이 싹트게 됩니다.

그것이 꽃 피우는 순간은 실제적인 죽음 이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 생명을 이미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현재의 육신은 보잘 것 없고 불필요하다는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닙니다.

10절에서 우리가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겨짐은 그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육신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또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순간들이 됩니다.

7절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의 육신을 ‘질그릇’으로 표현한 이유는, 질그릇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돋보이게 만드는 용기이기 때문입니다.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그릇은 내용물보다 용기를 돋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신은 우리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돋보이게 만들 용기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겸손한 삶 혹은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는 우리가 겸손해지려고 노력하거나 자신을 낮추려는 노력이 포함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우리의 노력을 강조하기보다는, 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라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은 현실에서의 우리의 육신과 삶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만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은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낙담하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안에 품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품고 있기에 어떤 순간에도 낙담하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낙담하지 않고 어떤 일이라도 담대하게 맞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

최근 인터넷에서 ‘어머니께 첫 월급을 드린 딸’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봤습니다. 어머니가 빚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는 걸 본 딸이 처음 받은 월급 전액을 어머니께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게시물 내용에는 어머니와 딸이 나눈 문자메시지가 있었는데, 조작된 내용인건지 실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용은 이렇습니다. 딸이 보낸 돈을 받은 어머니가 너무 기뻐하면서 딸에게 보낸 메시지인데,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러운데 이 돈을 빚 갚는데 쓰기는 아까워서 하나님께 모두 바쳤다는 내용입니다.

어머니가 보낸 메시지에 딸은 당혹스러워하면서 뭐 하는 거냐고 말하지만, 어머니는 이게 좋은 거라며 딸을 다그칩니다. 최근에는 많이 뜸해졌지만, 인터넷에는 개신교를 비하하는 글들도 많이 올라오고, 메시지 캡처 같은 게시물들은 워낙 조작된 것들이 많아서 실제 상황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이라면 이 글을 보시면서 왠지 있을법한 일이라고 생각하시기도 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여쭙고 싶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능력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십니까?

빚으로 인해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한 딸의 돈을 하나님께 모두 바친다면, 이후에 하나님께서 빚을 해결해 주실까요? 오히려 딸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된 일, 자신도 쓰고 싶은 곳이 많았겠지만, 어머니에게 모두 드린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제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면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만, 언제나 현실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렵고 힘들어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분명 도우십니다. 우리를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 중요합니다. 해야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실제적으로 내게 도움을 준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글에 나타난 어머니가 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딸의 성의를 저렇게 모두 헌금으로 바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가 자녀에게 보일 모습은 내가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출석하는지, 헌금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가 아닙니다.

삶에서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있다면 감사할 줄 아는 모습, 어려운 이들이 있다면 도울 수 있는 모습, 내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희망을 품고 이겨내려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신앙을 가진 부모가 자녀에게 전할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도 은혜도 능력도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 현실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품은 사람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모습을 보며 자란 자녀들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품고 함께 자라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보이며 살아가는 이들이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