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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이것이 제 삶입니다’정죄하지 않으시는 분(요한복음서8:1-11)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5.08 22:35
▲ Guercino, 「Christ with the Woman Taken in Adultery」 (1621) ⓒWikipedia

1.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읽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뜻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이거다! 하고 정리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성경을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 인간이 이해하고 파악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번 성경을 읽을 때마다 분명히 읽었던 말씀이지만 또 새로운 전혀 몰랐던 의미가 우리의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지요.

이번에 요한복음을 읽어가는 관점은 이런 겁니다. 예수라고 하는 믿음의 대상 앞에서, 무슨 주문을 외우듯이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그 삶 속에 담긴 의미가 뭔지를 들여다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내 삶을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내 삶이 보입니다. 지금의 모습이 보이고 과거의 모습도 보이고, 앞으로의 모습도 그려집니다.

여기에 새롭게 태어난다고 하는, 거듭난다고 하는 주제가 들어옵니다. 예수의 삶을 보고, 내 삶을 보고, 어떻게 살래? 그대로 살래? 아니면 새롭게 살래? 이 물음 앞에서 예수의 삶을 선택하고 새롭게 살아보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하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겁니다. 그런 관점으로 읽는 중입니다. 그래서 계속 ‘나의 모습을 돌아본다’고 하는 이야기가 강조됩니다.

나를 돌아본다는 것은 참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한 그런 어려움이 아니라, 불편한 어려움입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명확하게 인정해야 하니까 불편합니다. 내 부족함을, 내 못난 모습을, 나의 이기심을, 나의 욕심과 욕망을, 나의 구체적인 잘못들을, 혹은 죄악들을, 그런 것들을 마주대해야 하니까 힘듭니다. 굳이 들춰내지 않고서 뒤춤에 다 감춰놓고서 ‘하나님, 그냥 다 용서해 주세요. 다 깨끗하게 해주세요’ 하고 넘어가 버리려고 합니다. 아니요. 신앙은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그런 게 아닙니다. 대충 다 없던 일로 하고, 허허허 웃는 그런 게 아닙니다.

2.

하나님과의 만남은 사람들끼리 만나는 그런 사교적 만남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그럴듯하고 멋진 모습만 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애초에 그렇지가 않아요. 하나님을 만난다고 할 때, ‘일대일로 만난다, 있는 모습 그대로 만난다, 벌거벗은 모습으로 만난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가장 멋진 옷을 입고, 가장 그럴듯하게 꾸미고 만나는 그런 만남이 아니에요. 포장을, 위장을 다 걷어내고 정말 솔직하게 만나는 거에요.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는다고 하는 것은 더 철저하게 솔직해야 합니다. 쓰레기통을 들고 와서 굳이 그 앞에서 다 쏟아놓고 하나하나 들춰보는 것과 같습니다. 썩을 대로 썩어서 냄새도 나겠지요. ‘아이구 뭐 이런 게 다 나와’ 하고서 황급히 등 뒤로 감추고 싶은 것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런 거를 굳이 하나하나 다 늘어놓는 겁니다. ‘주님, 이게 접니다. 이게 제 모습입니다’ 하고서 적나라하게 펼쳐놓는 겁니다. 

주님의 용서의 장면은, 나는 뒷짐 지고 멀찌감치 돌아서 있고, 주님이 알아서 몰래 보시고서 ‘내가 다 용서했어, 괜찮아’ 하면서 어깨 투닥투닥 해주고, 그러면 나는 멋쩍게 ‘감사합니다’ 하면서 웃고, 그런 장면이 결코 아닙니다.

쓰레기통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내 모든 것을, 나와 주님이 함께 보는 겁니다. 그 때 나는 주님께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탈탈 털어놓고서 ‘그래도 용서해 주세요’ 할 수 있나요? 아니요. 하나하나 쓰레기통에서 내 본 모습이 하나하나 드러날 때, 폭로될 때, ‘아, 용서 못 받겠구나. 내가 이 모양이구나’ 하고서 인정하고 단념하고 있겠지요. 그런 나를, 눈물만 흘릴 뿐인 내 얼굴을 주님이 가만히 바라보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내가 너를 용서한다’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용서란 그런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용서는 ‘주님이 용서해 주셨다’는 그래서 ‘내가 지금 용서받은 사람이다’ 하는 결과적인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용서받기 위해서 나 스스로도 감추고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나의 적나라한 본 모습을 직면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과정이 있어야만 지금의 내가 용서받은 내가 새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과정이 없으면 결코 용서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종교를 이용할 뿐인 도돌이표 인생에 불과하겠죠.

3.

오늘 말씀을 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한 여인을 끌고 옵니다. 이들은 정의에 불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정의를 집행하려고 합니다. 간음하다 잡힌 사람은 현장에서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정의를 행사하는 일, 정당한 일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평소에 맨날 사랑을 말하고 용서를 말하는 예수님이 아니꼬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님도 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죄인을 끌고 온 겁니다. ‘자, 이번에는 우리가 맞지? 당신도 이번에는 용서하라고 할 수 없을 거야!’ 하고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잡아 온 이들과 정의논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아마 논쟁을 벌이셨더라면 예수님이 참패했을 겁니다. 논리로는 빠져나갈 구멍이 도무지 없는 상황이니까요.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이는 거 맞지요?’ 하면서 예수님을 다그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예수님은 몸을 굽혀 땅에 주저앉습니다. 땅에 무언가를 손으로 쓰십니다. 하늘로 높이 손을 쳐들고 ‘이것이 법이요!’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몸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땅을 바라봐라. 이 땅을 딛고 사는 우리의 현실을 봐라. 이 땅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 누가 죄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 설령 죄짓는다 하여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품어주는 것이 우리 하나님인데, 그 누가 그를 정죄하고 죽일 수 있느냐?’

대답을 요구하며 다그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대답이 없으십니다. 정답을 모르셔서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대답이 없는 것이 정답입니다.

왜 대답을 못합니까? 죄를 지으면 죽어야 마땅하다는 그 지엄한 율법 앞에서, 이 땅을 바라보면, 누구라도 죄인일 뿐입니다. 누구라도 다 죽어야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역시 우리는 모두 죄인이요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 죽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다 죽이실 겁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정답이 없지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서 그 삶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우리들이, 스스로를 성찰하지는 못한 채, 자기는 정의로운 양, ‘법이요!’를 외쳐대면서 아웅다웅하고 있는 이 세상, 예수님은 한 발짝 물러서서 이 좁아터진 세상의 어리석은 질서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계신 겁니다. 그랬더니 너희들은 다 똑같이 죄인이라고, 하나님의 손아귀에 붙들렸을 뿐이라고 일러주시는 겁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좁아터진 시야로 법조문을 들추던 그 시야가 넓어지고 그 눈이 떠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도 나도 누구나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놓은 내 인생의 쓰레기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누구를 치리하고 정죄할 자격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는 부끄러움이 밀려옵니다. 하나 둘 움켜쥐었던 돌을 내려놓고 떠나갑니다.

4.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여인은 용서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왜 용서받았습니까? 무슨 믿음을 보여줬습니까? 무슨 죄를 고백하고 무슨 눈물의 회개를 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용서받았을까요?

여인이 용서받은 핵심에는, 여인 스스로 자기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워하고 통탄해 하고 ‘벌 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인은 자기 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랬는데...’ 하면서 변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죄를 인정했을 것이며, 이 자리가 죽을 자리라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자기 죄를 고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기의 잘못을 돌이키고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체험, 그 체험이 있는 자에게 주님의 용서가 임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하시는 말씀을 들고서 모두가 자기 죄를 돌아보고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행동과 여인의 모습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 둘 떠나갑니다. 돌아갑니다.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용서의 핵심이 있습니다.

죄를 발견하고 깨닫는 것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죄를 직면하고서 주님 앞에 오느냐? 아니면 자기 죄를 직면하고 자기 삶 속으로 도망쳐 꼭꼭 숨어 버리느냐? 하는 커다란 차이입니다. 모두들 주님의 면전을 피해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숨어버렸지만, 여인은 예수 앞에 남았습니다.

여인은 예수 앞에 남았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남았습니다. 내 모든 죄가 다 까발려져서 더 이상 변명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고 어디 숨을 데도 없이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주님 앞에 서 있는 겁니다. 그러자 용서가 임했습니다.

5.

오늘 말씀을 7절에서 11절까지 읽었습니다만, 성경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이 단락은 사실 7장 53절부터 11절까지가 한 묶음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3절과 1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 말씀을 주의하여 읽어야 합니다. ‘저녁이 되었으니 다들 제 갈 길로 간 것이 뭐 대단한 일입니까?’ 하겠습니다마는, 오늘 이야기의 핵심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구절입니다.

음행한 여인을 정죄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폭력적인 정죄를 막아서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 이 극명한 대비를 만들어내는 것이 기도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자비하고 교만한 진노와 정죄냐? 아니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냐 하는 이 이야기의 출발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올리브 산으로 갑니다. 예수님이 가신 올리브 산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올리브 산에서 밤새 기도로 씨름하시다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오신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율법이 온 세상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 기를 쓰고 논쟁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제 집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누운 그 때, 자기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아니 오히려 자기 삶의 부스러기가 혹시라도 땅에 떨어질까 문을 걸어 잠그고 단도리를 하는 중에,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에서 하나님 앞에 꿇어 앉아 모든 것을 내놓고 피땀을 흘리며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내 인생의 쓰레기통을 뒤엎어보는 순간입니다. 이 시간이야말로 내가 살아나는 순간이요, 내가 구원받는 순간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시는 음성을 듣는 순간입니다. 엉터리 회개와 엉터리 용서로 끊임없이 옛 사람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하시는 말씀으로 새 힘을 얻어 거듭난 삶으로 나가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애써 힘써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도의 삶입니다. 이 기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비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로 주님께 매달리고, 깊은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라는 말씀입니다. 크고 원대한 삶의 가치관과 철학에서부터, 작고 세세한 일상의 모든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이야기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 편안히 쉬며 잠자리에 들 때, 너희도 똑같이 그렇게 쉬지 말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서, 나만의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새 삶을 보게 되고, 그 새 삶을 따라가게 되고, 그 새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그런 자비가, 그런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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