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존중의 적은 탐심부모를 공경하라(출애굽기 20,12; 마 15,1-6)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5.11 23:47
▲ 존중하는 마음을 품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탐욕에서 기인한다. ⓒGetty Image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품은 한 주간입니다. 사람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존재합니다. 가족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학적 관계를 뜻합니다. 그렇기에 가족의 형태와 크기는 다양하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그 안에서 서로 간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가족의 형태나 크기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공통되고 아마도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날들은 존중의 날들입니다. 사람은 사람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누구나 존중받고 또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을 존중합니다. 존중하고 존중받을 때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끼고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날들이 있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그러한 존재라는 의식이 그 날들을 있게 했습니다.

부모에 대해서는 십계명이 공경하라/존중하라 하고, 자녀/어린이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6,4와 골로새서 3,21이 화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린이와 부모를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으로 바꿔 말할 수 있는 이 두 명령의 공통점은 명령을 받는 자들이 성인들이라는 점입니다. 성서시대에 성인이란 20대 이상을 가리킵니다. 20대는 독립하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연령대로 간주되고, 19세까지는 부모의 돌봄을 받습니다. 따라서 성인이란 어린 자녀와 노인이 된 부모 사이의 사람들입니다.

일상에서 아이들을 화나게 하고 상처 주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그 이면에는 어리다고 무시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와 손을 얹어 기도해주시기를 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습니다(마 19,13-15; 막 10:13-16; 눅 18:15-17). 왜 그랬을까요? 그들의 시선이 어른들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일에 방해만 되는 귀찮은 것들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아이들이 왔는데도 이러니, 아이들만 왔을 때는 어찌 될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제자들의 이 같은 태도가 제자들만의 것이었을까요?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온 부모들에게서 자녀들을 위하는 부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데도 그 마음과 달리 부모들이 아이들을 무시하고 화나게 하는 경우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어린애가 … 하는 말투나 태도가 그렇게 만드는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들이 겉으로 보기에 빨리 아무는 경우들이 대부분일지라도 그 상처들은 기억의 형태로 평생을 따라다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성인들에게 부모를 존중/공경하라는 명령은 노인이 된 부모를 향합니다. 노인은 신체적으로 또 때로는 심리적으로도 쇠퇴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신체적인 힘이 약해지고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경제 활동이 중단됩니다. 이러한 부모들은 때때로 노인네가 … 하는 언사를 듣고 뒷방으로 밀려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기를 빕니다.

어린이든 노인이든 인격체임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인격적 기반이 단단해지기를 빕니다. 노인은 우리의 미래이고 어린이는 또 다른 의미의 우리 미래입니다. 미래를 일구고 미래를 바라보면 어린이를 작다고 무시하거나 힘없다고 노인을 무시하는 일은 사라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십계명은 탐심에 대한 계명으로 끝납니다. 거기서는 이웃과 관련해서 언급되지만, 탐심이 꼭 밖으로만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인을 무시한다면 그것도 탐심 때문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힘없는 노인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짐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어리기 때문에 자신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귀찮아하거나 무시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적대할 수도 있습니다. 탐심은 이처럼 사람을 이익이나 도움의 관점에서 보게 만들고 그를 대상화 내지 사물화시킵니다. 무시 속에 가려진 탐심을 들여다보고 탐심의 작동을 억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부모님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 부모님에게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지한다고 강하게 비판하십니다. 부모님의 것은 부모님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는 것과 같습니다. 저자들처럼 가르치고 이를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사람은 교활합니다. 아끼고 싶어 하는 탐심이 작동한 결과입니다. 탐심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모를 무시할 수 있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소유를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게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합니다(골 3,5).

사람이 이러한 탐심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제한적일지라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사람에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은 약함을 가려주고 모자람을 채워줍니다. 사랑은 공감하고 지지하고 연대를 낳습니다. 사랑은 악을 도모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악을 이기는 길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탐심에 맞서는 길입니다.

우리로서는 탐심의 장벽을 넘어 사랑의 길에 들어서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 안에 사랑을 낳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의 내용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유도된 사랑, 그 사랑에 공명된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로 바뀌는 것이 새창조입니다. 새피조물로 살아가기를 빕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살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약자들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삶, 사랑의 삶이 우리 삶의 모습이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상기 목사(백합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