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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목표, 사명과 연대, 그리고 역할 분담!(신 1:5-18 빌 4:10-20 마 22:23-33)부활절 다섯째 주일/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5월15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5.13 01:35

1. 부활 신앙의 의미

오늘은 부활절 다섯째 주일이자,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입니다. 부활절기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부활 신앙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의 시작, 부활 신앙의 주체, 부활 신앙의 완성 등. 오늘 말씀은 부활 신앙의 목표입니다. 도대체 부활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아니, 과학 기술 혁명 시대에, 초자연적인 부활이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부활 신앙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이 지향하는 것, 부활 신앙의 목표를 알 때 우리는 반석 위에 굳게 선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부활 신앙의 목표에 관해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은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 신앙의 의미에 관해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이들, 곧 부활 신앙을 가진 이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울 것이라고 자신의 부활 신앙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제대로 된 부활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구약 말씀은 부활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며 역할 분담을 할 때,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구약 본문 말씀은 모세의 설교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착에 관한 말씀입니다만, 이것은 신약성서의 맥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야 말로 제대로 된 부활 신앙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입니다. 1980년 5・18 당시 광주에서 죽임을 당했던 이들은, 오늘 우리들의 부활 신앙으로 말미암아 민주주의라는 영원한 생명 마당에 부활의 산 소망으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 정신을 이어받고 함께하며 연대하고, 새로운 역사를 위해 역할 분담하며 사명을 감당할 때,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과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복음서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부활에 관해 질문하며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마 22:23-28)

사두개인은 대제사장인 ‘사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들은 신약시대에도 대제사장 등의 종교 고위직을 독점하고, 유대교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을 합니다. 사두개인은 철저하게 문자로 기록된 토라(모세 오경)를 중시하면서, 토라에 언급되지 않은 영적 세계는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세 오경에 부활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유대교의 종파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유대교 4대 종파와 조선 시대 훈구파, 제도권 사림과 재야 사림, 그리고 개화파

유대교에는 4대 종파가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에서 예수 시대를 전후하여 유대교 내에는 적어도 대표적인 4대 종파가 있다고 합니다. 곧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열심당(젤롯당)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신구약 중간기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B.C. 215~164년)는 유대교 말살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안티오코스 5세는 어느 정도 유대교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사독 가문이 아니면서 뇌물로 대제사장이 된 메넬라오스를 경질하고, 사독 가문의 알키모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알키모스가 사독 가문이면서도, 그리스 문화에 영양을 받아 순수한 유대교 신앙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순수한 신앙을 고수했던 경건한 유대인, 곧 하시딤(Hasidim, 경건한 사람들)은 반발합니다.

이후, 마카비 전쟁(B.C. 167~164년)(1)으로 유명한 유대 혁명가 유다 마카비의 동생인 요나단 마카비가 사독 가문 사람이 아니면서 스스로 하스몬 왕조의 왕이자 대제사장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때도 하시딤은 많은 반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 마카비의 또 다른 동생인 시몬 마카비도 스스로 왕이면서 대제사장을 겸하는 일이 발생하자, 결국 하시딤은 반발하며, 서로의 입장에 따라 분열하게 됩니다.

먼저 이때 셀레우코스 왕조가 임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독 가문의 사람이라면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혈통의 정당성과 토라의 기록을 중시하며 등장한 이들이 바로 사두개인입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독실하고 경건하다면 누구라도 정통성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파루쉬(분리된)’에서 파생된 말인데, 이들은 주로 평민 출신의 학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평민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기록이 아닌 구전으로 토라를 전달했습니다. 따라서 토라로 다 충족되지 않는 규율들을 자신들이 추가하며 전통을 세우게 됩니다. 복음서에는 ‘장로의 유전’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신약 시대 당시, 일반 시민들을 가르치는 교사(랍비)나 학자들 상당수는 바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많이 나오는 서기관인 율법학자들도 상당수는 바리새인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성전이 아니라, 평신도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독실하고 경건한 사독 가문의 진정한 대제사장이 아니면 아무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독실하고 경건한’입니다. 이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사막에 들어가 세속과 연을 끊습니다. 물론 결혼도 하지 않고 공동체를 이루어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을 에세네파라고 하는데, 그리스어 ‘에세노이(신성한, 경건한)’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자신의 순수하고 경건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막에 숨어 지낸 사람들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막에서 금욕적인 삶을 보낸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도 이러한 에세네파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지막으로 급진적인 민족주의 혁명파인 열심당(젤롯당)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목표로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갈릴리 출신이 아닌, 가룟 출신 유다가 바로 열심당의 일원이었습니다. 또한 수제자 시몬 베드로 말고, 가나안 사람 시몬도 열심당 출신입니다. 아무튼 이들 열심당은 로마와의 해방 전쟁에서 실패하자 유대 종교 역사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사두개인도 로마 침공 이후 멸망당했고, 에세네파는 사막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유대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이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러한 유대교의 4대 종파를 조선시대 유학자로 유비해 보면, 사두개인은 조선전기 ‘훈구파’로, 바리새인은 ‘제도권 사림파’로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야의 사림파’는 에세네파로, 마지막으로 열심당을 개화파로 유비하면, 조금 비약이 있고, 정치적 입장이 다르지만, 또한 유대교와 성리학이라는 관점의 차이가 있지만, 연결이 가능하고 이해하기도 쉽습니다. 조금 더 살펴볼까요?

먼저 훈구파는 조선 왕조의 설립과 왕자의 난, 세조의 정변에 이르기까지 격변기에 공을 세웠던 혁명파 사대부를 계승한 세력을 말합니다. 이들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귀족적 관료학자들입니다. 원래 훈구파라는 명칭은 훈구공신(勳舊功臣), 훈구대신(勳舊大臣) 등 오랫동안 공로를 많이 세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 훈구 세력에 맞섰던 이들이 사림 세력들입니다. 이들은 지역 향촌 사회를 중심으로 성리학적 질서를 가르쳤으며 수신(修身), 제가(齊家), 그리고 왕도 정치를 앞세워 이상 국가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사림파는 훈구파가 주도하는 공신 정치가 아니라, 학문과 지식이 높은 지식인들이 정치 주도권을 잡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사림파는 성리학에 근거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법체계를 세우고, 과거를 통한 관료제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후 조선 시대 정치의 중심이 된 사림 세력들은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당파 싸움을 계속하였고, 임진왜란(1592~98년), 병자호란(1636~7년) 등 양란에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반성도 없이 근본주의에 빠져들면서 성리학 이외의 학문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던 배타성으로 인해 결국 조선의 패망과 일제 식민지화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반면 재야 사림파들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후학을 배출하여 그들이 정치에 등장하게 만들었던 인물들입니다. 대표적인 이가 바로 남명 조식(曺植, 1501~1572년) 선생입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자 제도권을 견제한 조선 최고의 재야 선비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리학 근본주의로부터 벗어나 근대적 개혁을 추구했던 개화파는 어떻게 보면, 시대의 선구자들이었습니다. 성리학에서 오랑캐로 규정했던 청으로부터 서구의 문물과 상업, 그리고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개화파는 강화도 조약 이후의 위기 상황 속에서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켰습니다.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지만, 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추진했고, 갑오개혁(1894~96년)에도 기여했습니다.

독립협회를 만들고, 신문을 발간하였으며, 만민공동회와 같은 집회 결사를 통해 대중들을 계몽하여, 수백 년 간 계속된 군주제를 개혁해 입헌군주제를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노력이 실패하자, 일본의 힘을 빌려서까지 군주제를 없애려고 했고, 결국 식민지화에 협조하게 됩니다.

앞서 유대교에서는 지금도 남아 있는 이들이 바리새인이라고 말씀드렸죠? 현재 대한미국에도 제도권 사림파들이 남아 한국 사회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부활이 없다고 믿고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3.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29-30).” 부활 신앙이 없는 자들은 부활을 폄훼(貶毁)하기 위해 꼬투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로 그 질문 자체를 박탈합니다. 부활을 신비의 영역으로 돌리시고, 단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부활 신앙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 22:29-33)

무슨 말씀인가요?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 때, 부활의 모습이나, 부활의 때나, 부활 사실 여부 등이 아니라, 그저 그 일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 자가 아니라, 부활 신앙을 통해 지금도 살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부활 신앙의 의미는 먼 미래가 아니라, 또한 오래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지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 신앙을 가진 이들은 지금 그 어떤 환란이 닥쳐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그렇습니다. 서신서 말씀을 볼까요?

4. 내게 능력 주시는 자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0-13)

바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환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칭찬했던 교회입니다.

처음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입니다. 지금의 터키 지역(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마게도냐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행 16:9).”고 말하는 마게도냐 사람의 요청에 따라 유럽으로 건너가 처음 세운 교회가 발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당시 바울은 디모데, 누가와 함께 빌립보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자주색 옷감 장수인 루디아를 만나고 그녀의 집에서 빌립보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업에 지속적으로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빌 4:14-16)

이렇게 바울을 도와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제 바울은 그들을 위해 풍성한 열매, 곧 복을 빕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빌 4:17-20) 

이렇게 부활 신앙을 가진 이들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함께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의 목표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약 말씀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4. 부활 신앙의 목표 1, 사명과 연대: 나는 홀로 짐을 질 수 없도다!

오늘 구약 말씀 신명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모세가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형식으로 씌어졌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과거를 회상하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하며 이제 곧 들어갈 약속의 땅, 곧 가나안 땅에서 믿음 생활 잘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모세가 요단 저쪽 모압 땅에서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신 1:5-8)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사명의 말씀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땅을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명의 말씀을 홀로 짊어 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연대성을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구약 본문 말씀은 가나안 정착에 관한 말씀입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약성서의 맥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 곧 부활 신앙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이며 나아가 이 사명을 위해 함께 하는 것, 곧 연대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모세는 사명의 짐을 홀로 질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는 홀로 너희의 짐을 질 수 없도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번성하게 하셨으므로 너희가 오늘날 하늘의 별 같이 많거니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일과 너희의 힘겨운 일과 너희의 다투는 일을 담당할 수 있으랴?” (신 1:9-12) 

5. 부활 신앙의 목표2, 역할분담: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받는 자를 택하라!

이제 세 번째 부활 신앙의 목표를 살펴볼까요? 모세는 받은바 사명을 함께 이루기 위해서는 역할분담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우리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활 신앙의 목표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 너희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당신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다 하기에, 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곧 각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신 1:13-15)

▲ 모세가 일꾼을 세우다

왜냐하면 새로운 공동체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역할 분담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재판에 있어서는 더 그렇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받는 자를 택해서 역할 분담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고 제대로 재판하라고 합니다.

“내가 그 때에 너희의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때에 쌍방 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에 있는 타국인에게도 그리 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내가 너희의 행할 모든 일을 그 때에 너희에게 다 명령하였느니라.”(신 1:16-18)

물론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모세에게 찾아오라고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사명 받고 함께 연대하며 역할분담을 통해서 법과 정의가 제대로 시행되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부활 신앙의 목표를 깨닫고 믿음 안에서 신앙생활 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미주 1) 마카비 가문은 신구약 중간 시대에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예루살렘 박해에 반발해서 혁명을 일으킨 이들입니다. 안티오코스 왕은 B.C.167년 성전에서 사람을 죽이고 돼지 피를 바치는 등 성전 모독을 자행했습니다. 이때 마타디아스라는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이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 아들들 중 유다 마카비가 B.C.165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재봉헌하며, 그의 형제들인 요나단 마카비와 시몬 마카비가 그를 계승하여 혁명을 완수하고 이스라엘 땅 전체를 차지하게 됩니다. 마카비는 ‘망치’라는 뜻으로, 유다 마카비에게 붙여진 별명이었지만, 후에는 이 가문을 마카비 가문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레위인으로서 왕이 될 수 없음에도 세습적인 왕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을 ‘마카비 하스몬 왕조’라고 합니다. 그 후 에돔 사람인 헤롯이 로마와 결탁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따라서 신약 성경 시대에는 헤롯 왕조가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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