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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하나님과 풍요‘만’ 바라는 백성들힘들 때 돕는 신(시편 22:24-25)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5.15 14:35
▲ 안락과 풍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하나님은 거추장스럽다. ⓒGetty Image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이번 주간 교회력에 따른 본문은 에스겔 34장 25-31절, 시편 22편 5-31절, 요한복음 10장 22-29절, 사도행전 20장 28-35절입니다. 이번 주간 선정된 본문을 핵심 단어로 연결해 본다면, ‘목자와 양 떼’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각각의 본문에 나타난 목자는 모두 다릅니다. 에스겔의 경우 다윗 왕조를 다시금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시편에는 목자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지만, 화자에게 있어서 목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나타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시냐고 묻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는 믿지 않는다.” 30절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은 하나님과 하나시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목자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목자가 되신다는 의미로 보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사도행전의 본문은 사도 바울의 고별 설교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바울은 온 양 떼를 위하라는 말을 전합니다. 이때의 양 떼는 교회의 성도들이고 목자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됩니다.

각 본문에 나타난 목자가 가리키는 바는 다릅니다. 하지만 목자와 양 떼에 관한 이미지는 유사합니다.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양 떼를 지키는 이가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 떼를 보호하며 그들의 삶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엄밀하게 따지면, 양 떼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 떼에게 영생을 주시며 멸망하지 않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본문에 나타난 목자의 역할이 현실적인 삶에서의 보호를 의미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자의 모습은 우리의 모든 삶을 포함합니다. 탄생과 죽음, 그 이후에까지 이르는 본질적인 보호의 약속입니다.

이번 주간의 말씀들은 양 떼인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또 때로는 우리가 목자가 되어 교회의 구성원들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번 한 주간 목자 되신 하나님을 느끼시는 기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주간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왜 믿고 따르는지 시편 22편의 말씀으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시인의 탄식

시편 22편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지시기 직전에 22편 1절의 말씀을 외치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을 외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제비를 뽑아 이긴 사람이 그 옷을 가져갑니다. 이 이야기는 4복음서 전체에 나타나는데, 요한복음은 이 일이 시편 22편 18절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될 정도로 시편 22편은 시인의 처절한 탄식이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습니다. 1-20절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시인의 처절한 탄식입니다. 그리고 21-31절에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나타납니다.

20절과 21절 사이에 시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시인은 어떤 방식으로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였고 이제는 탄식이 아닌 찬양을 올립니다. 어쩌면 이런 처절한 탄식과 감사 찬양의 극적 대비로 인해 요한복음이 시편 22편에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시편 22편 1절의 말씀을 외치신 이유도, 21절 이후에 나타난 구원과 감사의 찬양을 생각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이라는 처참한 상황과 부활 사건의 극적 대비를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시편 22편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인데, 저희는 먼저 시인이 무엇을 탄식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5절이나 20절의 말씀을 본다면, 시인은 죽음에 직면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14-17절을 보면, 그가 죽음 앞에 서게 된 이유는 아마도 육체적 질병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육체적으로 고통 받는 시인은 육체적 고통보다 더 심한 심적 고통을 느낍니다. 1-2절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건강이 사라져감에 따라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응답도 주시지 않는다는 마음의 고통을 느낍니다.

이와 동시에 주변 사람들은 시인을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하는 시인을 조롱하며 비방합니다. 이들이 조롱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그를 비웃습니다.

조롱하는 이들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영향 때문인지, 출애굽 사건 이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나님을 섬겼다는 생각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신앙 대상은 야훼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사기부터 열왕기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야훼 하나님이 주요 신앙의 대상이 된 적은 많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항상 우상이 있었습니다. 아세라 신앙은 바벨론 포로기가 시작되던 시기까지도 건재했습니다.

예레미야 44장을 보면, 애굽으로 피난 간 이스라엘 백성이 예레미야를 향해 원성하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이들은 “우리가 선조들과 왕들과 고관들이 원래 하던대로 하늘의 여왕을 섬겼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늘의 여왕은 아세라를 뜻합니다.

열왕기에 나타난 수많은 왕은 야훼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다고 전해집니다. 또 야훼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선포합니다. 우상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고 말합니다.

포로 귀환 이후에는 분명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이스라엘의 중심 신앙이 됩니다. 하지만 포로기 이전까지 이스라엘에서 야훼 신앙은 심하게 말하자면 약소 종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도 야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신앙 대상은 야훼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시편 22편을 읽는다면, 시인을 조롱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소수의 악인이거나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소수의 악인이나 이방인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시인 주변에 있던 일반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당장의 현실에서 풍요를 주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구약성서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가 이스라엘의 역사신조, ‘원-신앙고백’이라고 말하는 신명기 26장 5-9절을 보면, 하나님은 애굽에서 학대당하던 조상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고통을 보시고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원하는 신이십니다. 어려움과 고통을 보시고, 그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이들의 음성을 들으시고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고대 이스라엘 농경 사회에서 이런 신이 필요했을까요? 어려움이 생겼을 때 도와주는 신보다는 올해 농사가 풍년이 되게 하는 신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보다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땅에 비라는 씨앗을 뿌리는 신과 비를 받아 싹을 잉태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어려운 순간, 고난의 순간이 전제된 신은 그들에게 필요한 신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움이 오지 않도록 풍요를 주는 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22편 시인의 주변 사람들은 시인을 조롱합니다. “네가 의지하는 야훼가 너를 구원하겠구나”, “야훼라는 신이 너를 기뻐하니 그가 건져주겠구나”하면서 비웃습니다. 이 비웃음에는 ‘우리가 믿는 신은 풍요를 주는데, 네가 믿는 신은 고통을 주고 고쳐주는구나’라는 조롱이 담겨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

지금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지금까지도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이야기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 삶에 풍요를 주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풍요로운 삶, 물질적으로 넉넉한 삶으로 바로 치환될 수 없음에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신앙되는 신은 야훼 하나님이 아닌 바알과 아세라 혹은 맘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어려움 가운데 건져주시는 하나님이 아닌 풍요의 신을 바라보고 신앙해왔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많은 이들의 신앙이 흔들렸다고 말합니다. 이미 코로나 이전부터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신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다 해도 자신이 투자한 주식이 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해서 연봉이 높은 직장에 합격하지도 않습니다. 과거 교회에서 말해왔던 그런 하나님은 지금 시대에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코로나가 한풀 꺾인 이후 많지는 않지만, 교회를 찾는 분들도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자 교회를 찾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우울해진 마음을 달래고자 교회를 찾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픔을 바라보시며, 아픔으로 인해 울부짖는 이들의 음성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을 감싸 안으시고 고통에서 건져주시며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가진 근본적 고통인 죽음도 이겨낼 수 있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아픔을 감싸주고 위로하며 치유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도 아픔을 가진 이들을 끌어안고 위로하는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며,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일입니다.

풍요만을 바라는 사람은 풍요가 사라진 순간 그 고통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들은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일어서서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기에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구원받는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 아파하는 이들을 함께 감싸고 안아주며 위로하고 힘을 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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