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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우리를 덮은 수건(출애굽기 34,29-35; 고린도후서 3,12-18)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5.19 00:59
▲ Jean-Leon Gerome, 「Moses on Mount Sinai」 (1895-1900) ⓒWikipedia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프레임을 씌운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프레임이란 말 자체가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프레임이란 넓게 말하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결정하는 우리 사유의 틀입니다. 그것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습니디. 교육은 이 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넓게 말하면 세계관이나 인생관이란 말도 그에 속합니다.

또한 프레임이란 말은 보다 좁은 영역에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말이 문제되는 때는 이 틀이 특정 집단의 특정 목적을 위해 사회구성원들에게 덧씌워지는 경우입니다. 반공이라는 큰 이념적 틀도 있고 청와대를 피하기 위해 국민을 구실로 내세우며 국민에게 돌려준다고 했던 정치적 틀처럼 작은 것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처럼 크고 작은 틀들로 우리를 그 안에 가두고 그렇게 ‘사건’을 바라보게 하려고 할 때 프레임을 씌운다고 합니다. 많은 경우 그 안에는 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악의 프레임이 작동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진실 내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로 대항할 수 있을까요? 그 말이 우리에게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저항하라는 것으로 이해될 때 그렇습니다. 그때에만 그러한 프레임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은 영이시니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영이라는 것과 주님의 영이란 진술은 성격이 다릅니다. 주님을 영이라고 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그 몸을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제자들과 식사도 하셨습니다. 부활한 몸이 우리의 몸과 다르지만 몸의 특성을 지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영이라고 하면 주님에게서 몸을 제거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로 올려가실 때에도 너희가 보는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영이시라고 말하고자 하면 여러 가지 단서들을 붙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바울은 곧바로 이어서 주님의 영을 말합니다. 자주 사용되는 편은 아닌 이 말은 의미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게 적절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냥 주님의 영이라는 말을 쓰고자 합니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는 절대적 의미의 자유라기보다는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앞뒤 문맥에서 보면 수건이 자유와 대비되고 있으므로 그 자유는 수건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여기서 수건은 예전에 모세가 썼던 수건입니다.

모세는 황금 송아지 사건 때문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진 첫 번째 돌판을 산 아래서 춤추는 이스라엘에게 던져 깨뜨렸습니다. 그 후 그는 다시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하나님에게서 법이 새겨진 돌판을 받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 그를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처음에 그 이유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오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한 후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런 일은 그 후에도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뵙고 그에게서 들은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하고 난 다음 모세는 왜 그때그때마다 수건을 써야 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서 광채 나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모세는 그 아우라 때문에 높여지고 숭배 받게 되지 않았을까요?

만일 이 경우라면, 모세는 자신에게 돌려져서는 안 될 영광과 권위를 차단하기 위해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말씀이 자신의 빛으로 가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모세의 수건은 겸손의 표지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수건 뒤의 광채를 기억하고 그가 가린 이유에는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고, 광채는 그것으로 모세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고정관념을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얼굴의 빛은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그 고정관념은 그들 속에 튼튼히 자리 잡고, 이에 따라 하나님의 법은 모세의 법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좀 엉뚱한 방식으로 이용합니다. 장차 없어질 것이란 그의 얼굴의 광채일까요? 그렇게 본다면, 이것은 출애굽기 본문을 곡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모세는 그 광채가 결국 사라지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수건으로 가리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를 신비화하거나 영광의 자리에 앉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라지는 것은 그로 대표되는 ‘율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얼굴의 광채를 율법의 영광으로 보고 그 영광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수건을 썼다고 한다면 상징적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수건이 토라를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덮고 있고 따라서 이들에게 율법의 영광은 계속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새시대가 열립니다. 법이 지배하는 시대가 그 법의 정신인 사랑이 다스리는 시대입니다. 프레임으로 작동하는 그 수건을 벗을 때에만 이 시대적 전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그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수건은 비로소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건이 벗겨진다고 해서 그 법이 하나님의 법이 아니게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수건이 벗겨짐으로써 보게 되는 것은 그 법의 실질이고, 사랑인 그 법을 사랑으로 완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해를 낳을 수 있는 바울의 말이지만 곱씹어서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말이 또 하나의 수건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사건을 비뚤게 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는 것은 바울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수건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의 영은 진리의 영입니다. 주의 영은 진리로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주의 영은 우리 안에 사랑으로 존재하고 사랑은 진리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이로써 수건은 벗겨지고 자기의 영광을 가리는 겸손의 또 다른 ‘수건’을 쓰게 합니다.

우리 얼굴에 수건을 씌우는 것은 때로는 편견, 때로는 오만, 때로는 무지 때로는 욕심 등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수건을 벗을 능력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이 오셨고, 우리가 수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거짓과 위선의 프레임들이 난무하는 곳에서 진리와 진실을 찾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 거기에 우리가 있고,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이 여시는 자유의 길에서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일으킨 사랑으로 진실과 진리와 함께 합시다. 자유와 사랑, 진실과 정의가 만날 때 평화가 응답할 것입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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