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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있다고 믿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예수님의 길(요한복음 14:5-7)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5.22 15:45
▲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The ascension of Elijah」 (1860) ⓒGetty Image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이번 주간 성서일과에 따른 본문은 열왕기하 2장 1-15절, 시편 98편, 요한복음 14장 1-14절, 에베소서 4장 1-16절 말씀입니다. 시편의 본문을 제외하고 나머지 본문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 주제는 승천입니다. 이때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흔히 우리가 천국에 이른다고 말할 때의 승천입니다.

열왕기하 2장은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가 그의 뒤를 잇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엘리야가 승천하는 장면만 본다면, 그가 하늘로 올라갔는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죽음을 맞은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앞뒤로는 그가 하늘로 올려졌음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 때, 많은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회오리바람과 함께 사라진 이후에 선지자의 제자들은 그의 시신을 3일간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진술들로 봤을 때 엘리야는 하나님에 의해 하늘로 올려졌습니다.

요한복음 14장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전하신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가게 될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 간다는 말씀과 동시에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그곳에 마련하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 말씀은 저희가 장례예배 때 많이 보게 되는데, 저희가 생각하는 천국의 이미지와 요한복음 본문의 이미지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함은 본래 그 분께서 땅으로 내려오셨음을 의미하며,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수행할 사명과 능력을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저희는 이 본문들 중에서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무엇일지, 또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요한복음의 말씀으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늘로 올려짐

요한복음 13장은 공관복음서에도 나타나는 최후의 만찬 이야기입니다. 약간은 다른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공관복음서와 유사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14-17장은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요한복음만이 독자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면 몇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알지 못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복음의 저자가 알고 있었고 이를 적어놓았다고 보는 게 첫 번째입니다. 둘째는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모르던 단편적인 말씀들을 요한복음이 확장시켜서 적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닌데 요한복음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입을 빌려서 전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세 번째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4-17장의 말씀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기보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공동체의 신앙, 또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을 요약 정리한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시작됩니다. 이때 제자들이 근심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의 다른 부분을 보았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기 전까지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근심은 모순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이야기도 다른 복음서에 나타나는 이미지와는 조금 다릅니다. 아버지의 집에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신다는 말씀은 종말론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기존의 종말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든다는 이미지의 종말론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죽어서 가게 되건,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하늘로 들려 올려져서 가게 되건, 땅에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유입되는 이미지로 변경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의 이미지와 유사합니다.

분명 오늘 본문의 핵심은 2-3절의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공간이 있고, 사후에 그곳에서 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주기 위한 본문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어떤 순간, 그것이 죽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순간 이후 우리는 하나님의 거처에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이르는 길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집에 마련된 거처에 어떻게 이를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도마의 입을 통해 제시합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은 그 길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길’은 문자 그대로 길을 뜻하지만, 그곳을 향해 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해도 무관합니다. 영어단어 ‘way’가 ‘방식’과 ‘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과 도마의 질문에 나타난 길은 모두 ‘방식’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굳이 드리는 이유는 6절에 나타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오랫동안 타종교를 배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길’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과거에 유행했던 ‘사영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영리 원리를 담은 책자를 보면 항상 그런 그림이 있습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절벽에 한쪽에는 인간이라고 써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이라고 써 있습니다.

사람의 죄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과 단절된 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음 그림을 보면 여기에 다리가 하나 놓여집니다. 그 다리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적혀 있습니다. 단절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가 생겼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찌보면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요소가 빠져있습니다. 예수님을 중계자, 다리로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믿는’데에 집중합니다.

10-11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내가 이런 일을 행하고 있으니 너희는 이미 하나님을 보았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지 못한다면, 내 행위를 보고 믿어라”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품고 계시기에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기적을 일으키는 이런 놀라운 모습을 보며 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기적행위도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이지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가장 많이 보이신 모습, 행위는 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며 품어주신 모습입니다.

13장에 나타난 최후의 만찬 때에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요한복음에만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행위를 보라”고 하신 말씀은 이러한 모습과 연결시켜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14장 12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라” 이 본문 속에서 이적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적을 염두한 표현들도 아니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랑을 행하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의 계명은 앞선 13장의 본문과 연결시켜서 본다면 ‘사랑’입니다. 13장 3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23절의 말씀은 이를 더욱 확실하게 해줍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절에 나왔던 거처가 여기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길이신 이유입니다.

믿음과 사랑

재작년 코로나 사태 초기에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을 전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에 따라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면서 믿음이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과 다른 요한복음 본문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사랑을 너희도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묘하게 중첩되어 나타납니다. 믿음과 사랑이 같은 개념이 될 수는 없지만 둘은 떨어질 수도 없는 개념입니다.

믿지 못한다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부족함을 보인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을 믿으셨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사건 이후 그들이 변화되리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렇기에 끝까지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며 그들의 발까지도 닦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랑하려는 사람들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들을 신뢰할 때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신뢰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믿지도 않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세상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세상에는 분명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신뢰해서는 안 될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게 손해를 끼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대한 신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남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가 남에게 신뢰받는 사람이 되고, 남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일도 중요합니다. 어쩌면 내가 신뢰받는 사람이 된다면, 다른 이들도 나에게 믿을 수 있는 존재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지난 요한복음 13장 설교의 결론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 예수님께서 마련해 놓겠다 말씀하신 그 거처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믿으며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또 신뢰받고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런 성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 받으면 된다고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행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도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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