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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꿈을 이해하지 못했다항상 함께하신 하나님(창세기 28:20-2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5.29 16:29
▲ Jose de Ribera, 「Jacob’s Dream」 (1639) ⓒWikipedia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세기 28장 10절 이하에는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야곱은 창세기 25장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그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것은 27장부터입니다. 오늘 본문의 벧엘 사건은 35장의 벧엘 제사와 연결되어, 야곱의 생을 여닫는 역할을 합니다.

야곱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벧엘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도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벧엘은 야곱의 삶과 신앙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장소입니다. 벧엘에서 처음 하나님을 만났고, 결국 다시 벧엘을 찾으며 이야기가 마친다는 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신앙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벧엘 사건이 우리에게는 십일조 본문으로 더 익숙합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약속했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예전부터 이러한 점에 대해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마침 이번 주간 성서일과에 따른 본문으로 지정되어 있기에 창세기 28장 본문의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벧엘 사건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야곱의 삶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해주고 있으며, 십일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야곱의 삶과 신앙

오늘 본문은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은 뒤,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 도망가던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도망 길에 오른 야곱은 가나안 땅 루스라는 지역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자던 중에 꿈을 꾸게 됩니다.

야곱은 그 꿈속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를 보았고, 그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땅과 자손의 복을 약속하십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그곳이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이 베고 있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은 뒤, 그 지역의 이름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그 이후에 야곱이 하나님께 간구하며 서원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말합니다. 만약 자신이 몸 성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하나님을 섬길 것이며, 재산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전리품 십분의 일을 바친 이야기도 해석해본다면, 십일조와 연관성을 찾을 수 있지만,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명시된 첫 번째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창세기 28장의 본문은 여러 민담 전승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이 민담들은 여러 가지 기원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 지역이 왜 벧엘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왜 십일조를 바치는지에 관한 기원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의 역할은 벧엘 성소와 십일조의 기원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 십일조를 제대로 바쳤는지 아닌지에 대해 창세기는 침묵합니다.

창세기 34장에서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하고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이들을 몰살한 이후에야 야곱은 벧엘로 돌아가 하나님을 찾습니다. 도망 길에 오르던 때 하나님과 했던 약속을 그제서야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5장의 본문에서 야곱은 그냥 제사를 지낼 뿐이지, 십일조를 바쳤다는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재산 중 큰 몫을 누군가에게 바치는 이야기는 그 앞에 나타나는데, 하나님이 아닌 형 에서에게 자신의 재산을 바칩니다. 이는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값으로 사용됩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이들은 야곱과 하나님의 사자가 씨름했던 지역의 이름 브니엘과 야곱이 에서를 만났을 때 했던 표현, 하나님의 얼굴 뵌 것 같다는 표현을 대비시키면서 죽을 처지였던 야곱이 살아나게 되었고 이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긴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은혜는 하나님께 입었으나 예물은 형 에서에게 바쳐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창세기는 여러 기원 설화들이 엮여있기 때문에 이를 한 가지 의미로 묶어서 해석하는 일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를 마지막으로 편집한 이들은 이런 흐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창세기 28장의 벧엘 사건은 창세기 35장의 벧엘 제단과 연결되는 이야기이고, 창세기 32-33장의 이야기는 아예 별개로 생각하면서 엮어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에서에게 바쳐진 예물은 당시 사회에서 흔히 통용되는 수준의 예물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큰 의미 없이 전승된 내용을 그대로 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에는 이런 의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에서를 만났으나 야곱이 죽지 않았고, 야곱은 에서를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재산을 거리낌 없이 에서에게 떼어 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로 묶여있는 창세기의 이야기 속에서 야곱의 모습에 조금 더 집중해서 본다면, 야곱은 자신의 재물이 불어나고 자손이 늘어난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습니다. 여전히 불안해하며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며 고민합니다. 어쩌면 그의 서원은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는 순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야곱이 그때까지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이야기

오래전에 창세기 32장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브니엘에서 야곱과 천사가 씨름한 사건에서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점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과거 조상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말씀을 읽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 자신들의 이야기로 읽게 되는 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과의 관계에서, 형 에서와의 관계에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지역민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약자의 위치에 있던 점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비슷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생각하면서 본다면, 그들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그들을 이끌며 도우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외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는지 도우시지 않는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고, 그 과정에서 갈등도 만들어갔습니다.

이런 모든 순간에 야곱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형 에서와 삼촌 라반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는 도피라는 방법을 택합니다. 고향에 돌아오며 형을 만나게 되었을 때는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된 때는 시므온과 레위로 인해 주변 족속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가나안 땅에 머무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을 때입니다. 그제서야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이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창세기 28장 10절 이하의 본문도 자세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땅과 자손의 복을 약속하십니다. 또 이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야곱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상한 점은 그 이후 야곱의 태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에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새로운 계약을 제시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며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자신은 하나님을 섬길 것이며 십일조를 바치겠다는 계약 조건을 제시합니다.

어쩌면 야곱은 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몰라서 먼저 계약 조건을 제시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말씀 중에는 어떤 조건도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점은 하나입니다. “내가 네 자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야곱이 제시한 계약 조건에도 이 점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거기에 실제적 형태의 섬김을 제시합니다. 소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조건입니다.

이후 야곱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겼는지 창세기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재산은 늘어났고, 야곱은 자신의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계약 조건을 지켰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셨다는 점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돌보시고 지키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다시금 벧엘에 제단을 쌓은 것처럼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 바른 제단을 쌓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헌금과 신앙

오늘 본문 말씀은 아무 조건 없이 지키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가 십일조의 기원에 대한 민담일 수도 있지만, 지금 우리 손에 놓인 창세기 전체의 이야기 속에서 십일조는 야곱이 하나님께 제시한 신앙 형태의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헌금을 내는 데에는 신앙적인 이유와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한 비용으로의 헌금이 필요합니다. 또 야곱이 어떤 신앙 속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제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중요한 신앙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소득의 10%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십일조를 바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소득의 10%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해서 내 삶이 어려워지지 않는다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그 10%의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신앙 표현입니다.

예전부터 십일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그런 식의 표현을 많이 써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라는 표현입니다. 저는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우리에게 10%의 리베이트를 받으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 만약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돈이 조금 부족한 건 아닌가 생각해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도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없는 평화를 허락하신다고 말합니다. 삶의 기쁨과 안식을 허락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런 신앙을 표출하는 행위가 십일조입니다.

야곱 이야기에서 나타난 십일조 이야기는 헌금을 꼭 해야 한다는 강조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며 인도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어려운 순간이 닥쳤을 때에만 하나님을 찾아왔다는 반성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진 않았는지, 외면하고 살아가진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때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살아간 순간이라도 우리 옆에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며 여전히 인도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오늘 다시금 기억하시며 만나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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