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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 폰테스’믿음은 상식이 아닙니다(요한복음 12:3-8)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5.30 00:05
▲ Rubens, 「Feast in the House of Simon the Pharisee」 (1618–1620) ⓒWikipedia

1.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써붙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잘못에 대해서 그리고 올바른 신앙에 대해서 조목조목 따진 것입니다. 루터의 이 반박문을 시작으로, 오랜 세월동안 쌓이고 쌓였던 교회에 대한 불만과, 참된 교회에 대한 열망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게 되고 마침내 종교개혁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1517년 10월 31일입니다. 그날을 기념해서 우리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기념합니다.

500년이 지난 후, 500년 동안 진행된 그 개혁의 결과물을 누리면서 사는 우리들의 눈으로 볼 때는, 당시의 가톨릭교회의 모습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부패해 있었고, 신앙의 모습은 어이없을 정도로 왜곡되어 있었다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를 살던 사람들에게, 특별히 개혁가들의 눈처럼 날카로운 성찰의 눈을 가지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당시 교회는 이런저런 문제가 있기는 해도 당연히 그렇게 존재하는 교회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당시의 교회가 상식적인 교회였고, 당시의 신앙이 상식적인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면죄부 다들 아시죠? 우리는 흔히 ‘면죄부’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정확하게는 면죄부가 아니라 ‘면벌부’라고 해야 맞습니다. 죄를 면해주는 것이 아니라, 죄에 따른 벌을 면해주는 것이니까요. ‘면죄부를 돈 주고 사면, 이 땅에서 벌 받지 않는다. 이미 죽은 사람도 우리가 대신 그 사람 몫의 면죄부를 사 주면, 지옥에 안 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오늘날 우리들은 쯧쯧쯧 혀를 차면서 허탈하게 웃습니다. ‘어떻게 교회가 그럴 수 있어?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네.’ 하지만 500년 전에는 그게 상식이었습니다.

2.

사실은 제가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몰라서 ‘상식’이라는 단어를 썼는데요, 제가 ‘상식’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은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감하고 인정하는 삶의 토대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질서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때로는 법질서로 규정해 놓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법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 그렇게 합니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진리가 아니라는 것도 다들 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간사회를 은연중 지배하고 있는 질서 말입니다. 그것을 저는 상식이라고 표현해 봤습니다.

이런 상식에는 여러 가지 범주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육적인 상식이 있습니다. 인간도 동물이기에 육체적인 본성에 따라서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누구나 인정하는 것들입니다. 배고프면 먹는 거고, 졸리면 자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자기 음식이 아닌데 손을 뻗어서 주워 먹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아이가 배고팠나 봐요. 죄송해요.’ 그러면 또 다들 이해합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 하는 상식 때문입니다.

또 다른 상식은 이성적인 상식이 있습니다. 윤리나 도덕 같은 것들이죠.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것들입니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인간적인 것들 말입니다. ‘사람이라면!’ 하는 상식입니다.

이번에는 우주적인 상식도 있습니다. 달나라, 화성, 목성 하는 그런 우주가 아니구요, 우리가 사는 세상 말입니다. 세계관이나 정치질서, 경제 질서 같은 우리의 세상을 규범 짓는 체계, 체제, 역사, 전통 같은 것들입니다. 민주주의의 정치, 자본주의 안에서의 경제, 대한민국 안에서의 문화, 21세기 신자유주의의 세계 흐름,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그런 거야’ 하는 상식입니다.

제가 전부를 다 망라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이런 상식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안에는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상식들이 있어도, 그 안에서 잘 조율해 가면서 살아요.

3.

그런데 이런 상식들 옆에다가 종교를 놓고, 신앙을 놓고, 하나님을 놓아보면, 상식과 신앙을 서로 만나게 해 보면, 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상식 안에 종교가 있고 신앙이 있습니다. 상식이 허용하는 선에서 종교가 인정되고 신앙생활이 허용됩니다. 인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질서, 그 토대 위에서 인간의 삶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이라는 토대 위에 하나님의 질서를 만들어 놓습니다. 종교라고 하는 신앙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커다란 품속에서 인간의 상식이 풍성해지고 교정되고 발전해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고 신앙이고 하나님이고 전부 인간의 상식이라는 좁아터진 틀 안에서 삐걱거리고 있습니다. 그 틀에 잘 맞지 않으면 쳐내고, 그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품어내지 못하면 내던져버립니다.

우리 신앙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신앙을 가지고 우리 삶의 상식을 바꿔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상식에 따라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까? ‘원래는 이렇게 해야 되는데, 어떻게 다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 내 맘대로 안 되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어떻게 그렇게 해?’ 우리가 늘상 하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이, 종교가 인간의 상식에 사로잡혀 버리고, 그렇게 상식 안에 갇혀버린 종교가 새로운 상식이 되어버립니다.

4.

종교개혁은 그저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대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우리 지금까지 실수했는데, 다 같이 회개하고 마음 고쳐먹고 잘해보자’ 하는 그런 인간적인 반성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이건 잘못됐고, 이게 올바르다. 이게 새 질서다. 이렇게 하자’ 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우리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입니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에게 확신하고 있는바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토대들, 제가 뭐라 표현할 재주가 없어서 무식하게 ‘상식’이라고 말했던 인간 생활의 토대가 되는 질서들, 그런 모든 것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눈으로, 인간의 지성으로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놓고, 하나님께서 처분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웠던 말이 있습니다. ‘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 본질로 돌아가자!’ 하는 말입니다. 원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하는 말입니다만, 단순히 성경이라고 하는 책, 그 책 속의 글자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근본이 뭐냐?’를 묻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이 뭡니까? 신앙의 근본은 ‘계시’입니다.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좋고 싫고를 따져 취사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과 장소를 따질 수도 없고 형편과 사정을 고려할 수도 없습니다. 불현듯 우리의 삶에 뚫고 들어오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그저 받아들이고 결단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알려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고, 믿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고, 믿는 바를 실천하며 살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입니다. 철저하게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계시’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의 ‘돌아간다’는 말은 회귀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우리의 능동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극적인 은혜이며, 우리는 수동적으로 순종하며 감사할 수 있을 뿐입니다.

5.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에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계신 식탁 자리에 고급 향유를 가지고 와서는, 그 비싼 향유를 몽땅 예수님 발에 붓습니다. 심지어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그러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가 발끈하여 말하죠. “이 비싼 향유를 이렇게 다 낭비하면 어떡합니까? 적어도 300데나리온은 할 텐데, 그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이라도 도우면 될 것을,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마리아는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고급 향유를 들고 와서 한 번에 깨버리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됩니다. 게다가 발에다가 부었습니다. 중요한 손님이 오시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기는 했지만, 발에 기름 붓는 일은 없습니다. 또 여성이 자기 머리를 풀어서 남성의 발을 닦는다는 것은 당시 문화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스캔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장례식을 준비한 것이라고 변호해 주기는 했지만, 장례식 때에도 죽은 육신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지 죽지도 않은 산 사람에게 기름을 바르지는 않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절대적으로 비상식적입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그 짧은 순간 향유의 가격을 눈대중하여 알아냅니다. 어느 정도면 낭비가 되고 어느 정도면 적당한지도 잘 압니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분도 갖추었습니다. 앞으로 있을 일입니다만, 자기 신념과 맞지 않는 가망 없는 지도자라면 가차없이 배신해 버리는 것도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그들은 한결같이 비상식적인 사람들입니다. 물론 자신의 급박한 상황 때문에 상식 따위를 따질 겨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으니까 비상식적인 행동까지 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의 참된 원인은, 우리들의 소위 상식 가지고는 버텨낼 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와 맞닥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 앞에 엎드렸기 때문입니다. 계시에 자기의 삶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계시를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비상식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6.

종교개혁과 우리 신앙의 개혁을 생각해 봅니다. 개혁이라고 해서, 그저 반성하고 회개하고 각오하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신앙생활에 뭐가 잘못됐을까?’ 그런 반성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성수 잘 못 했는데, 이제부터는 예배를 꼭 드려야지. 헌금생활 제대로 못 했는데, 이제부터는 십일조 감사헌금 잘 드려야지. 기도생활 제대로 못 했는데, 이제부터는 시간날짜 정해놓고 기도생활 철저히 해야지. 성경쓰기 한다고 해 놓고는 잊어버리고 있었네. 성경쓰기 다시 시작해야지…’

물론 이런 것들도 중요합니다. 신앙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점검하고, 마음을 다시 챙기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개혁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새로운 것, 파격적인 것, 획기적인 일을 시작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전에 없던 특별한 생각을 하고 특별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해야 하는 진짜 개혁은,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반성하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드 폰테스!’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상식적인 모습 전형적인 모습에 내 모습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가 보고, 상식적 신앙에 내 신앙을 잘 맞춰가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상식적인 모습을 완성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의 상식 자체를 만들었던 애초의 힘, 하나님의 계시, 그 만남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계시 앞에 내 존재를 내어놓겠다는 각오, 그 각오가 내 신앙의 참된 개혁입니다. 내 존재가 산산이 부서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 계시를 비켜서지 않겠다는 각오가 참된 개혁입니다. 비켜서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계시를 갈구하고 간절히 소망하고 그래서 그 계시를 찾아서 계시를 향해서 내 삶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것이 참된 개혁입니다.

마리아의 모든 비상식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함입니다. 마리아는 간절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인간적인 욕심과 욕망이 있어서 그것을 해결하고 싶어서 간절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간절합니다. ‘예수님이’ 간절합니다. 예수를 만나는 시간, 예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간절합니다.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상식, 그런 것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향유옥합,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눈길도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지금 내 앞에 예수가 계시다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이 시간을 내가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식의 시간은 우리에게 이미 충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 하나님의 계시가 마침내 내 삶으로 뚫고 들어오는 순간은 지금뿐입니다. 가난한 사람이야 언제든 내 곁에 있습니다. 상식적이고 윤리도덕적인 종교행위야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는 시간은, 지금 내 앞에 찾아오신 계시로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은 지금뿐입니다.

주님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누구든지 그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함께 먹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언제나 항상 아무 때나 내 문밖에 일년365일 그저 하염없이 서 계신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할일 하다가,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이 세상이 힘들 때 서운하고 아쉬울 때 문득 하나님이 생각날 때, 그 때 문 열고서 아무 때나 만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서 계신 그 문은, 우리 또한 간절함으로 두드려야 하는 문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내가 너를 만나러 가는 그 결정적인 순간, 카이로스의 순간, 그 순간에 문을 열 수 있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는 순간은 바로 지금뿐입니다. 그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지금뿐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지금이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 순간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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