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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혼은 처음입니다만날라리 기자의 [기자수첩]
정리연 | 승인 2022.06.03 00:12
▲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유작 「Viva La Vida(인생이여, 만세)」ⓒGoogle Arts & Culture

아파서 조퇴하고 온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진료를 마치고 근처 식당에서 설렁탕과 떡만둣국을 먹었다. 집에 도착해서 강아지 배변 패드를 뽀송뽀송한 새것으로 바꾸고 아이 약을 정리했다. 나가기 전에 돌리고 간 세탁기에서 엉켜있는 옷을 꺼내어 탈탈 털었다. 베란다에 빨래를 널면서 날이 점점 흐려지고 있네, 생각했다. 책 반납 날짜가 다 되었다는 도서관 메시지가 왔길래 대출을 연장하려고 앱에 들어가서 날짜를 봤다. 아! 잊고 있었네. 오늘이 그날이네! 이제는 덤덤해진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이혼하기 좋은 날?

스무 계단 정도 올랐을까? 대기실 문을 열었는데 깜짝 놀랐다. 자리를 꽉 메우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오, 무슨 일이래. 뭐 이렇게 많지?’ 삼십 쌍 이상, 60명은 넘었던 거 같다. 빈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건지, 원래 이 정도는 되는 건지, 나도 처음 와보는 거라서 알 수는 없었지만, 당황스러우면서도 피식 웃음이 났다. 이 안에 있는 어떤 사람도 나를 포함한 무리를 보면서 ‘오늘이 뭐, 이혼하기 좋은 날이라도 되나? 사람 대개 많네’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주변을 살짝 둘러봤다. 몇 사람이 눈에 띄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커플이 아기를 안고 서로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이곳과 굉장히 낯설었다. ‘누구 따라온 건가? 아니면, 할리우드 스타일인가?’ 눈길을 사로잡는 또 한 쌍 발견. 70은 넘어 보이는 노부부였다. 서로 별 말없이 앉아계셨는데 두 분 다 모진 삶을 살아온 것처럼 행색이 초라해 보여서 안쓰러웠다. 또 다른 한 쌍은 다문화 부부였다. 여성의 통역을 위해 도우미가 함께 있었다.

경력 단절과 빈통장 뿐

맨 앞쪽에 놓인 책상에는 두 명이 앉아 있는데 나중에 보니 우리가 미리 쓴 서류를 검토한 후에 그 옆방(판사가 있는)으로 보내는 서기관(이었나? 오래전이라 기억이 안 난다)이었다. 그 책상은 벽면에 붙어 있었는데 중앙에는 양쪽으로 열리는 갈색 문이 있었고 한 남성이 그 앞에서 이름을 불렀다. 호명된 두 사람은 앞으로 나가서 서기관들에게 서류를 검토 받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몇 분 후에 나와서 다시 그 서기관들에게 가서 서류를 내고, 확인받고,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다.

한 가지 공통의 목적을 위해 모인 사람들,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면서 작은 소리로 대화하기도 하고, 복도를 들락날락하기도 했고, 팔짱 끼고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거 같다.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협의이혼 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기다리는 대기실은 2월의 마지막 날씨처럼 싸늘하면서도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는 희망이 공존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만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서로의 행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내적 갈등은 있었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째와 유치원생인 둘째와 셋째. 그동안에도 거의 독박육아를 해왔지만, 바깥 활동을 하지 않고 살림만 했으니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나 혼자 양육과 살림, 경제 활동까지 해야 했다. 이미 경력은 단절되었고, 자격증도 내세울 만한 기술도 없었다. 게다가 잔고가 빵빵한 통장도 없었다. 나이 서른 후반인데,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나. 남은 거라곤 애 셋뿐이라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괴감과 실망감만 들었다.

그래도 언제나 낭만주의자로 

이름들이 불렸다. 두 사람씩 앞으로 나가서 서류를 확인받고 판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 바람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아기를 안고 있던 20대 커플과 우리만 남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이름이 불렸다. 미성년 자녀가 많아서 마지막이 되었다고 한다. 뭐, 자기들끼리 이런 법도 있나 보다.

판사가 서류를 훑어보더니 몇 가지 질문과 조언을 했다. 그리고 미성년 자녀가 있기 때문에 3개월의 숙려기간이 주어졌다. 그 사이에 “우리, 다시 잘해 보자”라거나, 서로 합의해야 할 부분들은 원만하게 조정하라는 의미겠다.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맞는 사람이 어딨니? 맞춰가면서 사는 거지”,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을까? 교회에서도 이혼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기도하면서 이겨내야지”, “애들을 생각해”, “이혼은 죄야!”라면서 종교적, 도덕적인 잣대로 정죄하고 판단했다.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교회 안에서 들어왔던 교리들 때문에 내 결정이 죄스러웠고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부족해서 맞춰가면서 살지 못했던 걸까? 믿음이 약했던 걸까? 그 시기를 견뎌냈다면 괜찮아졌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깟 교리에 나를 묶어두고 판단하실 분이 아니라고 믿었다. 누구보다도 내가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라실 거라고, 내가 고통스러워하면 예수님도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똑같은 상황이 온다고 해도 이혼을 선택할 것 같다. 그렇다고 ‘이혼옹호자’는 아니다. 으하하. ‘사랑의 존재’ 문제다. 여전히 사랑은 아름답다고, 사랑은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다고, 사랑은 우주를 넘어섬을 믿는다. 다만, 이혼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이혼은 결혼보다 훨씬 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고, 이왕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제대로,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 

누구나 처음 사는 오늘, 누구에게나 다른 오늘

결혼과 이혼 사이에는 수많은 사연과 고민이 있다. 누구도 쉽게 결정하지도, 짐작할 수도 없는 ‘사이’가 있다. 그대로 유지하든지, 정리를 할 건지는 각자의 몫이고 그저 좀 더 나은, 행복한 삶을 위한 선택이라고 믿을 뿐이다.

숙려기간 3개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평탄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이들과 함께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꿈꿨던 희망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팍팍한 현실이 놓여 있었지만 어떤 해방감이 가득했다. 판사의 도장이 찍힌 서류를 받자마자 시청에 가서 이혼 신고를 한 후 친구에게 전화했다.

“드디어 이혼했어!”
“축하해!! 맘고생 했던 거 다 잊어버려!”
“그런데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야!”
“뭐? 우연의 일치 혹은 운명의 장난인가? 하하하!!”

4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헤매기도 했다. 위태로울 때도 있었지만, 후회하지 않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악으로 깡으로’ 악착같이 몸과 마음을 혹사한 건 아니다. 힘들면 힘든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살았다. 앞으로도 삐뚤빼뚤 걸어갈 날이 많을 수도 있겠으나, 고통과 어둠 속에서 힘겹게 살다가 생을 마감한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가 마지막 작품에서 외쳤듯이, “VIVA LA VID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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