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칼 바르트의 위대한 신학적 방향전환칼 바르트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와 문화 ⑶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2.06.04 15:54
▲ 1919년 칼 바르트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저술한 『로마서 강해(Der Römerbrief)』 ⓒGetty Image

바르트의 인생과 사상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실제적인 전환은 그가 스위스의 작은 공업도시 자펜빌에서 목회하던 시절에(1911-1921년) 일어났다.(1) 그로써 그는 인간중심적인 자유주의 신학에서 완전히 신 중심적,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부들과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 전환점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적인 사건이었다.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윤리적 실패

1914년 8월 1일, 독일은 전쟁을 선포하였고, 93명의 독일의 지성인들은 빌헬름 Ⅱ세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하르낙(A. Harnack)과 헤르만(W. Herrmann)을 포함하는, 바르트의 신학 교수들 대부분이 들어 있었다. 이 전쟁 지지 선언은 바르트에게 정신과 역사의 진보를 주창한 자유주의 신학의 파산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한다:

“1914년 8월 초 한 날이 나의 기억 속에 비통의 날로 각인되어 있다. 93명의 지성인들이 빌헬름Ⅱ세와 그의 자문관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발표를 했고, 놀랍게도 그들 가운데서 내가 존경했던 많은 신학 스승들의 이름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더이상 그들의 윤리와 조직신학, 성서해석과 역사이해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나에게 19세기 신학은 미래가 없었다.”(2)

바르트는 자신이 존경했던 스승들이 모두 시대정신과 타협하고 ‘전쟁신학’에 동조했던 사실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윤리적 실패를 보았고, 그들의 주석적, 교의학적 전제들마저도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3) 훗날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던 교의학과 윤리, 신앙과 복종 사이의 긴밀하고 확고한 관계는 이미 이와 같은 그의 초기 진술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삶의 원초적인 근본진리에 관하여 내면적으로 다시 묻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다시 설교단으로 돌아가자

바르트는 다시 설교의 과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설교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했었다.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수 있고, 또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건한 개념이나 바람직한 환상, 혹은 우리 자신의 종교적 감정들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어떻게 적절히 말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에 봉착한 바르트는 구약과 신약성서를 다시 철저하게 읽고 해석하며, “신학의 ABC를 새롭게” 배우려고 애를 썼다. 그러자 성서가 ‘현대신학’에서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말하기 시작했고,(4) 마침내 그는 “성서 안에 있는 신기하고 새로운 세계”(5), 즉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하면서 주권적으로 그리고 활동적으로 현재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1916년 6월부터는 그가 소년 시절에 견신례를 받으려고 성서교육을 받을 때 그 책의 중대한 중요성에 대해 배웠던 로마서를 마치 그 이전에는 한 번도 읽지 않았던 것처럼 읽고 주석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결국 1919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6) 인본주의적 혹은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의 종말을 알리는 이 저서는 전쟁과 패배의 아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은 바르트의 예언자적 능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바르트가 학문적인 성서 해석을 경멸한다고 비난하거나, 혹은 그가 칸트적이고 플라톤적이며 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7) 하지만 『로마서 강해』 초판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는 바르트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과 특히 우호적인 평가들을 고려하여, 다시 “돌 하나도 처음 장소에 남아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8) 개작하고 1922년에 제2판을 내놓았다.

바로 이 1922년판 『로마서 강해』가 바르트를 바르트 되게 하였고, 20세기 신학사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가톨릭 신학자 ‘칼 아담(Karl Adam)’은 이 작품의 영향력에 대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과도 같았다”(9)고 했다. 바르트의 초기 신학에 이른바 ‘위기의 신학’ 혹은 ‘변증법적 신학’이란 명칭을 부여해 주었던 것은 바로 이 새로운 강해서였다.

다음 글에서는 『로마서 강해』 제2판에서 그리스도와 문화 혹은 세속 사회의 관계가 어떻게 이해되고 해명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미주

(미주 1) 이 시절 바르트는 활발한 사회-정치적 활동을 수행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오영석, “칼 바르트의 정치 신학 연구”, 「한신논문집」 제13집(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1996)을 참고.

(미주 2) K. Barth, “Evangelical Theology in the Nineteenth Century”, The Humanity of God (London: Collins, 1961), 14.

(미주 3) Eberhard Busch, Karl Barth: His Life from Letters and Autobiographical Texts (Eugene, Oregon: Wipf & Stock Publishers, 2005), 81.

(미주 4) Ibid., 97.

(미주 5) 이것은 바르트가 1916년 가을, 그의 절친한 친구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Eduard Thurneysen)이 목회하던 교회에서 행한 강연의 제목이다. 「말씀과 신학: 칼 바르트 논문집 Ⅰ」, 7-26.

(미주 6) Busch, Karl Barth, 97 이하.

(미주 7) D. L. Muller, Karl Barth (Waco: Word Books, 1972), 이형기 옮김, 『칼 바르트의 신학사상』 (서울: 양서각, 1988), 21.

(미주 8) Karl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6th e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2.

(미주 9) John McConnachie, The Significance of Karl Barth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31), 43.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