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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세운 교회, 선교하는 공동체(룻 3:7-14; 고전 8:1-6; 마 11:16-24)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총회선교주일(6월12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6.09 22:01

1. 화 있을진저!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아!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째주일이자 총회선교주일입니다. 지난주 성령강림절 이후 성령강림절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계속되는 세 본문 말씀은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하나하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령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와 함께합니다. 따라서 오늘 설교 제목의 앞부분은 ‘성령이 세운 교회’입니다.

지난주도 그렇고 앞으로도 성령강림절기 동안 앞 제목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총회선교주일인데,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예수께서 활동하셨던 이스라엘 지역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이방 선교의 역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 제목의 뒷부분은 성령이 세운 교회로 ‘선교하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선교하는 공동체로서 성령이 세운 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셨으나 회개하지 않고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 관한 예수님의 책망 말씀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은 이방 여인인 룻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말씀으로 이방 선교의 시작이 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과 예수께서 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선교하는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서신서의 말씀은 이방 선교를 위한 걸림돌로 우상의 제물에 관한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우상 제물을 먹는 일에 관해 ‘지식보다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렇습니다. 선교의 목적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상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미성숙한 신앙인이 볼 때 우상 제물은 걸림돌이 되기에, 바울은 먹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세운 교회는, 특히 선교하는 공동체는 지난주 말씀처럼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뒷부분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 11:20-24)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권능을 베푸신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관해 책망하십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고을들이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명을 깨닫지 못한 세대를 이렇게 비유합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6-17)

물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것을 보고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이 와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헤롯이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한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볼까요?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마 11:18-19a)

사람들은 요한에게는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니 귀신 들렸다 하고, 예수님은 먹고 마시니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합니다. 무엇을 하든 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들은 말만 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마 11:19b)”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다운 지혜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따라서 사명은 행동하고 감당하는 것이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2.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따라서 구약 말씀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했던 여인을 소개합니다. 나오미의 며느리이자, 이방 여인인 룻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룻, 그리고 보아스의 이야기를 통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의 혈통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다윗의 조상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룻 3:7-9)

잘 아시다시피, 성경 룻기는 4장으로 된 짧은 말씀입니다. 1장인 제1부 발단은 ‘나오미와 룻의 귀향’입니다.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흉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죽습니다. 따라서 두 이방인 며느리와 함께 과부의 신세로 전락합니다. 이때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상상을 덧붙이자면, 롯이 시집가서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며느리 오르바는 그러한 신앙적 결단이 없었습니다. 참고로, 나오미의 또 다른 며느리 오르바의 경우, 성경은 오르바의 삶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유대 전승을 연구하던 미국의 종교작가 다이앤 A 맥닐(Diane A. McNeil)은 1997년 6월 7일 자 <이스라엘>이란 잡지에 “국제적 분열 이후의 예루살렘(The Jerusalem Post International Division)”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합니다. 그 내용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룻과 오르바 모두 강인한 여인이었다. 나오미에게 등을 돌렸던 오르바는 골리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오르바는 룻과 달리 모압으로 돌아가 거인족 르바임의 후예인 블레셋 사람과 결혼했다고 한다. 이후 오르바는 이스비를 낳았는데, 이스비의 아들은 바르실래이고, 바르실래의 아들이 가드의 거인 골리앗이었다. 그러므로 다윗과 골리앗은 룻과 오르바의 증손자 세대인 셈이다. 오르바는 자신의 아들이 테러와 살인에 연루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주 불행했을뿐더러 죽음을 갈망했다. 믿음의 가정에 시집간 그녀는 하나님을 믿는 가문에 속할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은 다른 신을 섬기는 자기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유대인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다고 합니다. 그저 참고로만 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2장인 제2부 전개는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룻의 헌신입니다. 그리고 룻이 보아스를 만납니다. 먼저 우리는 보리밭에서 일하는 룻을 만날 수 있습니다. 룻은 수확을 하다 떨어뜨린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라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만남을 통해서 문제의 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사람을 붙어주십니다.

▲ 밀레 <추수 중에 휴식: 룻과 보아스>(1850~1853)

짐시 그림을 볼까요? 밀레가 농부를 소재로 그린 그림 가운데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작품인 <추수 중에 휴식: 룻과 보아스>입니다. 이 그림에는 ‘룻과 보아스’라는 부제가 있습니다. 그림의 맨 왼쪽에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이 룻입니다. 그녀에게 일꾼들과 함께 앉아서 쉬라고 이끄는 남자가 보이죠? 보아스입니다. 밀레는 실제 농부의 자세를 한 사람 한 사람 관찰한 다음, 이들이 겹쳐진 모습을 철저하게 계산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이 한 점을 위해 50여 점 이상 습작을 그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치밀한 사전작업 덕분인지, 아니면 성서 속 이야기라는 전통적 주제와 구도를 다뤘기 때문인지, 밀레는 이 그림을 통해 처음으로 살롱전에서 2등 상을 받았습니다. 밀레가 그간 선보였던 화가로서의 재능과 사실주의에 대한 그의 애호, 그리고 19세기 프랑스 풍경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농부의 일상이 결합하여 탄생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밀레의 4대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됩니다.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 3:10-11)

3장 3부 절정입니다. 이제 보아스는 본격적으로 행동합니다. 룻을 아내로 얻기 위해 먼저 ‘기업 무를 자’를 찾습니다. 여기서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고엘’입니다. ‘기업을 무른다’라는 뜻으로, 그 사람이 받아야 할 기업, 그 사람이 받아야 할 재산,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할 토지, 그것을 물러주는 사람, 즉 잃어버린 토지를 다시금 되찾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고엘은 잃어버린 두 가지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합니다. 하나는 재산이고, 하나는 아들입니다. 재산을 되찾는 방법이 있고, 아들도 얻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룻 3:12-14)

이제 4장 제4부 대단원입니다. 룻과 보아스의 혼인 및 출산입니다. 이렇게 이방 여인 룻에게서 훗날 다윗왕이 나게 됩니다.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죠? 성령의 놀라운 구원 역사는 이렇게 펼쳐집니다. 이후 다윗왕의 후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함으로 인류의 새로운 구원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선교 역사가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이제 마지막으로 서신서 말씀을 볼까요? 바울 사도는 우상 제물을 먹는 일에 관해 시험을 받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대원칙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식보다 사랑’입니다. 사실 우상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신앙이 미성숙한 이들이 볼 때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기에, 믿는 이들은 그들을 배려해서 우상에 받친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고전 8:1-3)

교만한 지식보다 배려하는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죠?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으니, 아무것도 아닌 우상의 제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4-6)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만물이 났고, 우리 역시 그로 말미암았기에, 모두가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천하 만민에게 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4.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앞서 오늘은 총회선교주일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선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문화를 싹 쓸어버리고, 그 지역에 기독교 교리와 가치관을 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나와 다른 것에 관해 혐오하고 배타성을 띠게 됩니다. 특별히 종교로는 이슬람에 관해 그렇습니다.

아랍 세계에서 25년간 생활해온 김동문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나와 우리 사이, 특별히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자리 잡은 배제와 혐오의 문화를 돌아보기 위해 책을 하나 저술했습니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가짜뉴스, 문명충돌, 이슬람포비아의 허상을 벗기다』(선율, 2017)입니다. 이 책에서 김동문 선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는 이슬람을 혐오하고 있는가? 이슬람 배제와 혐오에 머물러 있는 이슬람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바로잡아 합리적 의심을 품고 포용과 사랑의 길로 함께 걸어가 보자.” 오늘은 선교주일이니, 좀 더 이 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김동문 목사가 중동 사막지역에서 활동하던 당시 모습과 책 표지

우리는 이슬람에 대한 공통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머리에 검은색 히잡을 쓰고 있는 여성, 긴 통옷에 수염을 기르고 머리덮개를 눌러쓰고 있는 남성,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씩 기도하고, 라마단 기간 한 달 동안 낮 금식을 하고, 꾸란에 충실하고, 이슬람 사원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 자신의 종교로 포교하기 위해 테러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 정말 무슬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살아갈까요? 무슬림, 그들은 테러리스트인가요? 광신도들인가요? 김동문 선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 이슬람 인구가 17억 명이 넘습니다. 세계 3대 종교로 꼽힐 만큼 전통도 깊죠. 하지만 여전히 바깥의 시선은 공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무지로 인한 근거 없는 비판은 갈등만 악화시킬 뿐이에요.”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를 나오고 14년 동안 이집트와 요르단에서 거주했으면 25년 이상 수많은 이슬람 교인과 속 깊은 친분을 맺어온 김동문 선교사는 먼저 우리가 이슬람을 혐오하게 된 기원을 추적합니다. 시작은 1970년 4월, 박정희 대통령 당시, 농촌재건 운동인 새마을 운동 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농업과 유대인 전문가에게 새마을 운동을 맡기며 자연스레 ‘이스라엘의 키부츠 운동’을 새마을 운동의 표본으로 삼게 됩니다. 그리고 아랍 이슬람 국가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 이스라엘과 중국, 소련, 북한 등 주변 적대적 세력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인 한국을 일치시킵니다. 자연스럽게 국가교육 안에 친이스라엘 정서와 반아랍 정서가 자리 잡게 되겠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교회 설교도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의 탁월성을 찬양하는 예화가 가득했습니다. 성공한 농업 운동 키부츠, 유대인의 교육, 열강에 둘러싸인 작지만 강한 나라 이스라엘! 이 같은 이스라엘의 이미지를 불러와 한국을 ‘동방의 이스라엘’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보수적인 한국교회가 합세합니다. 따라서 극단적인 친이스라엘 경향을 강화해 나갑니다. 동방의 예루살렘인 양 서울을 묘사하고, 한국교회를 영적 이스라엘로 여깁니다. 이런 맥락에서 2017년 초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대형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한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바로 이러한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흐름이 아랍은 멀고, 이스라엘은 가깝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김동문 선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슬람은 포교를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사실 무함마드는 6세기 말 이슬람을 창시한 후, 이슬람 세력은 7~8세기 왕성하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이때 이슬람 세력은 외부인이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엄격하고 폐쇄적이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던 아랍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세력에 대해 우호적이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압제를 받던 아랍인들에게 이슬람 세력은 압제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해줄 해방자였던 것입니다. 또한 아랍 이슬람 세력의 유입을 통해 이란의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략과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근현대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 종교보다 가문과 종족과 민족 그리고 도시와 국가를 위해 싸웠습니다. 1, 2차 세계대전, 1991년 1월의 걸프 전쟁, 2003년의 이라크 전쟁, 레바논 내전, 시리아 전쟁, 예멘 전쟁에 나선 아랍 이슬람 국가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군대와 연합전선을 펼쳤습니다. 또한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전쟁에서도 서로 손을 잡거나 대립했습니다. 따라서 이 전쟁은 이슬람 종교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이 아닙니다. 정치적 이해득실과 이슬람 종파 간의 주도권 싸움이었습니다. 김동문 선교사는 반문합니다. “이런 전쟁을 포교를 위한 전쟁이거나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김동문 선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슬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유럽 내 무슬림의 99%는 IS를 싫어한다. 심지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도 IS를 반대한다. 유럽을 이슬람화하기 위해 IS가 테러를 일으킨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을 가져다 쓸 뿐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이슬람 관련 ‘가짜뉴스, 괴담, 선동’, 따라서 진실을 위한 ‘팩트 체크’가 필요합니다. 이슬람과 무슬림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두려움이 커지고, 정치·문화·종교적 이유로 그 두려움은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슬람포비아(Islamophobia, 이슬람 공포증)’라 불리는 극도의 혐오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같은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가진 개신교에 의해!

▲ 국내외 이슬람포비아 현상

이러한 괴담은 국내산이 있고, 국외산이 있습니다. 김동문 선교사는 이 책에서 이마트 ‘노브랜드’와 IS 테러 자금, 익산 할랄 단지 조성, 인천 검단스마트시티와 한국 이슬람화 전략, 이슬람화 8단계 전략, 이슬람 대학 설립 계획, 무슬림 불법 체류자 생활수칙 5계명 등 국내에서 생산되어 유포되는 괴담에 관해서 진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왜 이러한 괴담이 만들어지고 왜곡되고 유통되는지를 추적합니다.

국외산은 “유럽이 이슬람화되고 있다”, “<이슬람, 평화의 종교>라는 프로그램 중단 사유” 등의 이름으로 해외에서 역수입되는 괴담도 살펴봅니다. 배제와 혐오에 머물러 있는 이슬람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합리적 의심을 하고, 포용과 사랑의 길로 함께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하는 공동체인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본질입니다. 그것은 바로 ‘환대’입니다.

5. 선교의 본질: 무조건적 환대

지난주에도 <나의 해방일지>를 소개하며 말씀드렸지만, ‘환대’란 “나쁜 놈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환대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조건적 환대(초대의 환대, 선별적 환대)’를 넘어 ‘무조건적인 환대(방문의 환대)’를 진정한 환대로 본 것입니다.

“환대란 조건 없이 방문자에게 문을 여는 것이며 때때로 두려움을 동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손님으로서 주인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내 구역을, 나의 장소를 내어놓아야 하는 이러한 무조건적인 환대가 필요하다.”

이러한 데리다의 환대 이해는 아주 종교적입니다.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성서는 이방인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굶주림’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로 그들을 환대하라고 말합니다. 룻에게 보아스가 그랬죠?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상 제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대할 때, 그들의 마음을 살펴 배려하고 환대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권능을 많이 행하셨던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은 어땠나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죄인인 우리 인간을 환대하지 않으셨나요? 그 사랑을 깨닫고 성령이 세우신 우리 교회가 참된 선교의 의미를 깨닫고 제대로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는 사랑으로 환대하며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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