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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르네상스의 문명의례 집전자 새밝의 탄생Ecce Liber: 한국 영성의 대폭발과 세계 성경해석 전통의 대전환 - 『선(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문사철, 2022) (3)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2.06.10 00:32
▲ 30대 초반 변찬린

변찬린의 사유체계의 근거를 밝혀주는 책이 그동안 희귀 절판본으로 시중에서 구하기조차 힘들었던 『선(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이다. 이 책은 변찬린이 성서해석에 내세웠던 두 가지 축인 “성경은 선(僊)의 문서이다”라는 측면과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한다”는 틀을 벗어나 그의 심원한 사유체계를 집약하고 있는 책이다. 변찬린의 삶을 온전히 복원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의 구도관, 학문관, 종교관, 인간관, 역사관, 문명관 등등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성경의 원리』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그에 대한 인식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확장되어 평가할 수 있는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그의 깨달음의 높이와 지성의 깊이와 행동의 넓이는 ‘절정’이다. 영성(靈聖)의 절정에서 터져 나오는 한 글자 한 글자는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언어유희가 아니다. 삶과 글과 깨달음이 일체화된 그의 글은 시로써 독자를 긴장시키고, 격문으로써 풍류의 심성을 일깨우고, 산문으로써 ‘나의 궁극적 가능성’에 환성을 올릴 것이다. 종이호랑이인 중화(重華)의 사대주의와 뿌리 없는 서화(西華)의 식민주의에 억눌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던 동방의 한나라가 새 문명의 새벽을 밝히는 ‘동방의 빛(東華)’이라는 당위성을 체감할 것이다.

구도유언록이자 새밝에게 보내는 편지

이 책은 한밝 변찬린(이하 한밝 선생)이 1965년 여름부터 1982년까지 기록한 구도유언록이다.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는 적막한 고독 속에서 도의 동반자인 새밝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변찬린은 자신의 구도적 생애를 “번개와 피와 아픔과 눈물과 고독”이라고 표현한다. 번개는 절정의 찰나의 종교체험을 수식하고, 피와 아픔은 자신과 민중의 역사적 고난을 말하며, 고독은 누구하나 이해하는 자 없는 절대고독의 구도여정이다.

누구 한 사람도 이해하는 자 없이 고단히 행하는 길목마다 진한 객혈(喀血)의 장미꽃을 아름답게 피워 처절하도록 눈부신 화환을 엮어 저는 아버지의 제단에 바쳤읍니다. 불안의 균이 전염시킨 공포의 병, 우수의 균이 감염시킨 고독의 병, 허무의 균이 오염시킨 절망의 병, 원죄의 균이 부식한 죽음의 병을 앓으면서 저는 황금빛 젊은 날을 몽땅 악마에게 빼앗겼지만 믿음의 품위와 구도자의 성실을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심전(心田)안에 심어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저는 오늘도 신음하면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고 길을 가고 있습니다.(중략) 자장불식(自强不息), 오늘도 저는 홀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좋은 길동무를 만나 외롭지 않게 하십시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下』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572-574.

이 책은 ‘선(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이기에 가라지가 없다. 역사의 가을에 수확한 ‘알곡’으로 새 문명의 종자를 새밝의 가슴에 심는다. 그 이삭의 알곡에 사심과 사욕이 있을 리 없다. 한밝 선생이 새밝에게 위촉하는 목소리는 애절하고 애틋하다. 간절하다 못해 슬픔을 머금은 그의 언설을 인간의 궁국적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다.

‘한밝’이 고대한 ‘새밝’은 누구인가

▲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친필원고

‘새 밝’은 역사시대의 오메가이자 영성시대의 알파인 종교적 인간형이다. 세계 경전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포월하는 동방 르네상스의 주인공인 새밝은 한밝 선생의 도반이다. 책에 81차례나 ‘새밝이여’를 호명하는 말에는 동방의 빛이자 화쟁의 혼인 새밝에게 거는 큰 바램의 표현이다.

새밝이여
참사람은 자기에게 심취(心醉)하고 외경(畏敬)하고 추종(追從)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 자유하기를 바란다. 소인은 성인(聖人)을 번거롭게 하여 누(累)를 끼친다. 소인은 성인(聖人)에게 기생하여 붙어살이를 하며 무위도식(無爲徒食)한다. 성인(聖人)은 그 문하에서 기라성같은 제제다사(濟濟多士: 재주 많은 여러 선비)가 배출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 그런가?
재주꾼은 대인(大人)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해한 철학은 관념의 사희(思戱, 생각놀이)
동문(東問)에 서답(西答)하는 선문답(禪問答)도 마음의 군더더기
일심(一心)과 여래장(如來藏).
유현(幽玄, 아득하게 깊은)한 골 안에서 산수와 노송(老松)과 백운(白雲)과 만월(滿月)을 농(弄)하며 유유자적 하던 조사(祖師)들은 역사의 변두리에 서성거린 한인(閑人: 한가롭고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신과 사상
사색의 상아탑 속에서 주의를 양산해 낸 철인들은 역사의 가운데 선 전범자(戰犯者)들이었다.
새밝이여
마음을 농(弄)하지 말고 신을 희(戱)하지 말라. 소인은 한가하면 헛된 공상을 한다. 선문답과 신학도 고독을 잘못 소화한 소인들이 앓던 암(癌)이며 염(染, 찌꺼기)이며 벽(癖, 버릇)이 아니던가? 진여(眞如)한 마음은 몇몇 고덕(高德)과 운객(雲客)들의 잔유물이 아닌 민중 전체의 범심(凡心)이 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159-160쪽)

새밝은 깨달음과 믿음과 행동이 일치된 인간형이다. 이상과 현실이 괴리되고, 마음의 성전과 건물의 성전이 분리된 인간형이 아니고 자신이 있는 곳이 성전이다. 즉 인간성전이다. 축적된 과거와 응축한 미래를 현실에서 자각하는 새밝은 낡은 문명과 새 문명의 가교적 존재이다. 새ᄇᆞᆰ이 없이는 새 문명의 새벽은 밝아오지 않는다. 계율과 율법, 회개와 참회를 통하여 현실의 전장터에서 믿음의 반석을 밟고 최상의 깨달음의 체험하고 현실에서 행동하기를 독촉한다.

이 밤 고타마의 눈동자 같은 달 천공(天空)에 밝고 자성을 밝히는 내 눈동자도 성성(惺惺)하여 졸립지 않도다.
옛 사람은 숲길 은둔의 묘역(妙域)에서 지혜의 황금 광맥을 캐고 하나님의 존엄하신 성상(聖像)앞에서 불멸의 믿음을 찾았으나 우리는 피투성이의 역사 안에서, 자유의 광장에서, 비정한 전장(戰場)에서 혁명의 대열 속에서, 병든 도시의 지붕밑에서 혈행(血行)하고 있다.
참으로 이 시대의 고뇌를 걸머진 자는 향내(向內)하여 성인(成人)된 자성(自性)을 보며 향외(向外)하여 역사의 의미를 해독하고 현대의 골고다에 장렬하게 전사할 줄 아는 자이다.
새밝이여
그대는 이 밤 초연(硝煙)이 자욱한 불모(不毛)의 산으로 입산하라. 주저항선(主抵抗線) 참호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자. 탄우(彈雨)가 빗발치는 서부전선에서 니르바나(열반) 를 명상하라. 그렇다. 전역사(全歷史)의 십자가를 지고 도(道)를 닦자. 그러면 바른 해답을 주시리.
새밝이여
성인(聖人)의 반열을 따라 앞서간 조상들이 명명(冥冥)한 영계(灵界)에서 역사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결단과 행동을 주시하고 있으며 탄식하는 만물들도 우리들이 절규하는 혁명의 구호를 귀담아 듣고 있음을 명심하자.(87–88쪽)

새밝이여
그대는 날개 돋친 비존(飛存)임을 자각하라.
한 종교의 죄인, 한 사상의 괴뢰가 되지 말라.
한 성인(聖人)의 고제(高弟), 한 주의의 주구가 되지 말라.
한 당의 대변자, 한 이념의 기수가 되지 말라.
새 시대의 당당한 아들은 대식견(大識見)의 날개로 비상하며 지혜와 도(道)의 산맥(山脈)을 조감(鳥瞰)하고 지인(至人)의 도량으로 망망한 해원(海原)에 앉아서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우신(又新)한 일륜(日輪)을 본다.(55쪽)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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