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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영성의 성장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가복음 4:3-9)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6.12 14:39
▲ Vincent van Gogh, 「The Sower」 (1888) ⓒWikimediaCommons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번 주일에는 저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함께 살펴보고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이 비유는 전부 해설이 뒤에 붙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유와 해설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이 해설이 정말로 옳은 해설인지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비유 자체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어디에’ 씨를 뿌렸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비유의 해설은 씨를 받은 땅이 ‘어떻게’ 씨를 받았는지에 집중합니다.

이런 눈에 보이는 차이점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비유의 해설은 예수님께서 직접 전하신 말씀이 아니라 초대 교회가 작성한 내용으로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받아 행해야만 한다는, 교리 혹은 신앙지침이 가미된 해설로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 해설 부분을 떼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본다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비유가 아니게 됩니다. 먼저 이 비유가 당시 이스라엘의 농업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비유라는 단어의 의미대로 상징적인 표현들로 이루어진 것인지부터 문제가 됩니다.

또 비유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도 문제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핵심인지, 씨가 뿌려지는 ‘땅’이 핵심인지, 혹은 결실을 맺었다는 ‘결과’ 자체가 핵심인지도 불분명합니다.

비유는 직설적인 표현들과는 다릅니다. 듣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특히 마가복음 4장 11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특정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당신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기에 의미를 감추기 위한 의도로 비유를 말씀하시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비유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 예수님의 본래 의도였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오늘 저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관한 몇 가지 해석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또 지금이 절기상 성령강림 후 기간이기 때문에 성령과 연결해서 이 비유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뿌린 복음의 씨앗

우리가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해석은 초대 교회로부터 전통적으로 전해져 온 해석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굳이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차이가 있는 해석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음에 살펴볼 해석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초점은 ‘사람’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 다음이 ‘결과’이고 마지막이 ‘땅’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네 종류의 땅에 씨를 뿌립니다.

우리는 이런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잘 개간된 땅에 씨를 뿌려야 씨가 잘 자란다는 사실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땅을 고른 뒤에 씨를 뿌리지 않고, 씨를 뿌린 후에 땅을 갈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길, 돌밭, 가시떨기에 씨를 뿌렸다는 사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아직 개간되지 않은 땅에 씨를 뿌렸습니다. 그가 뿌린 씨앗은 네 종류의 땅에 뿌려집니다.

그가 씨를 뿌린 후에 땅을 갈지 않았던 것인지, 그가 땅을 갈 새도 없이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넷 중 세 종류의 땅에서는 씨앗이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그 땅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뿌린 씨앗의 75%를 잃었지만, 결과적으로는 25%의 씨앗이 100배의 결실을 맺었기 때문에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씨 뿌리는 사람을 예수님으로 보고, 씨앗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복음은 여러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전파된 복음의 75%는 사라져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25%는 살아남아 더욱 많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의 해설은 땅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결실을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의 요지는 ‘좋은 땅이 되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으로 전파된 하나님 나라 복음은 결국 살아남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욱 많은 결실을 맺으며 만방에 퍼져나가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런 의미를 담아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예수님 공생에 후반부에 전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중심으로 내세워 말씀을 전하신 것은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이후입니다. 따라서 이런 해석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 비유가 본래 공생애 후반부에 전해졌고, 복음서가 그것을 공생애 초기로 옮겨놓았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농부에 빗댄 삶의 비유

이 비유에 대한 주석을 보면, 제대로 만들어진 주석이라면 어떤 것이든 비유와 직유와 알레고리에 관한 설명부터 합니다. 이 비유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이야기인지, 당시의 농업 현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직유적 표현인지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씨 뿌리는 사람의 행동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상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비유에 나타난 이상한 땅에 씨를 뿌리는 행위는 당시의 농업 현장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가 당시 농부들의 모습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직유인지 비유인지의 논쟁도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대상에 농부만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말씀은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농사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비유가 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람’은 비유의 핵심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건 이 비유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핵심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비유라면, 비유의 핵심은 ‘행동’과 ‘결과’에 있습니다.

여러 땅에 씨를 뿌렸다는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과정입니다. 때로는 길가에 씨를 뿌릴 때도 있고, 때로는 얕은 돌밭에 씨를 뿌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시떨기에 씨를 뿌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우리는 예상치 못했던 장애에 직면하게 됩니다.

새가 와서 우리의 씨앗을 먹어 버리기도 하고, 뜨거운 햇살이 우리의 씨앗을 말려버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예상치 못했던 가시덤불이 우리의 씨앗의 성장을 방해할 때도 있습니다. 씨앗이 발아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경우, 발아는 했지만 말라버리는 경우, 성장하다가 막히는 경우 모두 우리의 삶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일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절됩니다. 어떤 일은 괜찮게 시작되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실패하게 됩니다. 어떤 일은 잘 되어가는 듯 했지만, 뜻밖의 시련에 의해 좌절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시련과 좌절만 있지 않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어려움과 실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기쁨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의 손해를 뒤집을 만큼 성공의 기쁨을 누릴 때가 있습니다.

이 해석을 따르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복음 전파를 위한 말씀도, 신앙지침을 위한 말씀도 아닙니다. 그저 당시를 살아가고 있던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너무나 힘들고 고단했을지라도 분명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될 때가 있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비유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완전히 동떨어진 현실적 위로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농사를 비유의 소재로 삼으신 이유는 농사의 성공과 실패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연이 어떻게 운행되는지는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는 때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패만을 경험하도록 놔두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좋은 땅을 예비하셔서 우리가 더욱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현실적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위로의 말씀이 됩니다.

신앙 안에서 성령의 역할

마지막으로 ‘결실’을 중심으로 신앙적인 해석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는 초대 교회의 해석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더라도 우리는 때로 세상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여전히 육신에 속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악’이라는 결실만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이 결실이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일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의 결실을 맺는다고 하면, 누군가를 교회로 이끌어서 교회가 성장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결실, 성령의 결실은 교회의 성장이 아닙니다. 내 영혼의 성장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성령의 열매이고 신앙의 결실입니다.

저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한 가지 해석으로 한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유는 당연하게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여러분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떤 순간이라도 살아있음을 알게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이들에게 복음은 하찮은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결실을 맺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또 이 비유를 통해 세상의 삶에서 위로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실패만을 경험하도록 놔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실패를 경험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가 더욱 큰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안에서 믿음의 결실을 맺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첫 번째 해석에서 말씀드린,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이들이 바로 여러분이십니다. 여러분을 통해 복음은 지금도 이 땅에서 살아 숨 쉽니다. 날마다 성령 안에서 믿음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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