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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우리도 죽으러 가자(요11:11-16)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6.12 21:22
▲ Duccio di Buoninsegna, 「The Raising of Lazarus」 (1310–11) ⓒWikipedia

1.

금년 우리 교회의 표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봅시다. ‘하나님 어떻게 생겼나? 잘 생겼나, 못 생겼나?’ 관상 보자는 말이 아니죠.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과 만나지는 않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소유하고만 있을 때가 많다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렵나요?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죽고 못 살게 사랑해요. 택배로 선물도 보내고 꽃다발도 보내고 편지도 직접 손편지를 써서 보내요. 다 바쳐요. 헌신적이에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조금 이상해요. 보내는 선물은 집 앞에 방치되어 있고, 전화도 하기는 하는데, 서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막 자기 이야기만 하고 끊어요. 집 앞에서 기다리고, 길거리에서 기다리고… 상대방은 그를 피해서 숨고 도망칩니다. 정상적인가요?

현실에서 이런 일이 있다면, 그리고 상대방이 이런 것을 싫어한다면, 하지 말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스토킹 범죄라고 부릅니다. 사랑이 나만의 일방적인 사랑일 뿐이면,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내 사랑의 대상으로 소유하려고만 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범죄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이 엄청나게 순수하고 아름답다 해도, 그 사랑이 나만의 일방적인 사랑이고, 상대방의 뜻과 상관없는 사랑이라면,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죠.

우리가 신앙을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신앙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달리 표현해 보면 새로운 느낌이 들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나? 사람 사이의 사랑도 일방적일 수 없고 서로 간에 교감이 필요한데, 나는 하나님과 어떤 교감을 나누고 있나? 하나님 의향은 물어보지도 않고 내 방식대로만 사랑해왔는데,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의 방식은 뭘까? 물론 그러실 리 없지만, 하나님 혹시 스토킹 당하는 사람처럼 내 사랑의 방식에 진저리치시는 건 아닐까?”

2.

신앙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신앙의 두 가지 측면을 보아야 됩니다. 한편으로는 신앙의 외형이 얼마나 철저한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기도를 예를 들어볼까요? 기도의 외형은 뭘까요?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가? 얼마나 오래 기도하는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는가?’ 이런 것들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마음먹잖아요. ‘하루 한 번씩 꼭 기도해야지. 시간을 정해놓고 그때 꼭 해야지. 시간은 이만큼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면 기도의 내용은 뭘까요? 기도에 대해서 배울 때, 이런 공부 하지요. ‘기도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내 잘못한 것들 회개하고, 소원하는 바를 청원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기도의 내용이라 함은 이렇게 소위 기도할 것들, 흔히 ‘기도 제목’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죠.

제가 말씀드린 기도의 외형과 기도의 내용이 올바를까요?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흔히 기도의 외형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기도의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 모두가 사실은 기도의 외형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기도의 내용은, ‘기도문’ 안에 들어있는 말의 내용이 아닙니다. 진짜 기도의 내용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교감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제가 앞에서 제멋대로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 사람은 스토커 범죄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지나치게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만, 서로 간에 교감이 없다면, 그 관계가 일방적이라면, 자기 스스로 아무리 헌신적이고 아무리 애틋한 순애보라 자부한다 해도,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기도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간절하고 아무리 절절하고 아무리 열심히 기도했다고 해도, 그 기도가 나만의 일방적인 기도였다면,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간절히 열심히 간구하는 그런 기도였다면, 하나님과의 어떠한 교감도 없는 기도였다면! 하나님께서 ‘그래 너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는구나’ 하실까요?

3.

표어를 삼아 ‘하나님의 얼굴을 봅시다’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깊이깊이 들여다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내 얼굴을 뚫고 들어가야 하나님의 얼굴이 보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우리의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 안에 감추어진 모습들도 알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모습도 있고, 드러내고 싶은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런 모습들 아래에 있는 내 본래의 모습, 이상적인 모습, 올바른 모습도 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차차 이루어가야 할 내 모습도 있습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내 모습이 있습니다. 그 모든 모습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성으로 지성으로 지혜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넣어두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참됨이 우리에게 그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 위에 덧입혀진 덧씌워진 헛된 것들을 벗겨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깊이 들여다 볼 때, 겉모습을 뚫고 그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내 내면의 민낯을 보게 될 때, 그때 비로소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그 헛된 것들을 붙들고 그 헛된 것들에 절실하게 매달립니다. 그것이 헛된 것인지는 모르고, 얼마나 열심히 매달렸는지 뿌듯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그 헛된 것들을 하나님에게 자랑 내지는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 보세요. 내가 얼마나 열심인지 보세요.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는지 보세죠?’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겠거니~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반응 없으시면 열심부족이라 생각하고 더 열심히 매달립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간절함과 열심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내용 없는 껍데기만 가지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진짜 기도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과의 교감,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과의 만남, 그건 도대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도 아니고, 환상으로 나타나시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진짜 기도의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다들 옳다고 말하는 것, 그것을 앵무새 마냥 되뇌이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내 마음 중심에서 솟아나는 내 진심, 그것을 드러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시선을 가지고 내가 스스로 고백한 그 마음을 찬찬히 바라보는 거죠.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음성을 들려주지도 않고, 그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 하나님이지만, 내 안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내가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내 기도를 내 마음을 돌아보는 겁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불러내어, 나와 교제하도록 하는 겁니다.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찰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 앞에 나를 노출시키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나에게 알려주셨던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내가 절실하게 깨달았던 하나님의 마음들,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나 자신을 보는 겁니다. 내가 간구하는 것들, 기도의 내용이라고 착각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내가 만나도록 하는 겁니다.

C. S. 루이스라는 분이 󰡔개인기도󰡕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평생에 걸쳐 드렸던 모든 어리석은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셨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루이스는 우리의 어리석은 기도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면 큰일 날 터무니없는 기도’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우리가 피해야 할 시험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겪는 세상일의 시험이기도 하지만, 더 큰 시험은 소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헛되게 간구하는 일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간구는, ‘내가 신앙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를 강요하지 않게 지켜주십시오’ 하는 간구인 것입니다.

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시선으로 내 기도를 돌아본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첫 번째로는 내 솔직한 마음을 주님 앞에 내어놓는 일입니다. 사실은 이 첫 번째 과정도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한번 돌아보세요. 예배 시간에 공적으로 드리는 기도 말고, 개인적인 기도를 말하는 겁니다.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보세요. 진짜 나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 놓습니까?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뻔한 정답 같은 내용만을 간구하나요? 어제 기도가 오늘 기도와 똑같고, 내일도 모레도 비슷한 기도만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막연한 추상적인 진리들, 그저 종교적인 교리적인 반복들, 내 삶의 구체적인 상황 속으로 파고 들어오지 못하는 피상적인 말들로만 내 기도를 채우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는 내 마음이 온통 향해 있는 것이 따로 있으면서, 교회에서 옳다고 좋다고 배운 허울뿐인 간절한 이야기들을 구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기도 모범이 가르쳐주는 기도를 잘 따르는 것보다, 서두르고 어설프더라도 현재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내어놓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나에게 있었던 일들, 겪었던 사건들, 그로 인한 내 마음의 감정들, 사사로운 생각들, 가족과의 사이에 이웃과의 사이에 느끼는 생각들, 정치적인 신념들, 미래에 대한 걱정들... 온갖 것들을 이야기하듯이 하소연하듯이 하나님 앞에 풀어 놓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그렇게 모든 것을 내어놓다 보면 말하기 싫은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말하기 싫고 감추고 싶은 것들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인데, 벌써 다 알고 계실 텐데, 굳이 내가 말로 해야 하나?’ 그렇습니다. 말해야 합니다. 굳이 말해야 합니다. 몰라서 알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고백하겠다고 하는 내 의지를 가지고, 내 입을 벌려, 내 행동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집니다. 그래야 기도에 비로소 내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잘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도 기도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런 기도야말로 주님이 귀 기울여 들어주시는 기도입니다.

솔직함으로 하나님께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되면, 그렇게 솔직하게 내려놓은 내 마음들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내 지혜로 내 지성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는 성찰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길로 바라보는 겁니다. ‘내가 이 모양이구나. 내가 이런 소망을 가졌구나. 내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구나.’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확인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다 내려놓은 나의 모습을 놓고, 내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겁니다. ‘재훈아, 너 이랬구나. 이런 마음이었구나, 이렇게 느꼈구나. 이렇게 힘들었구나. 이렇게 아팠구나. 이런 걸 원했구나. 이렇게 하고 싶구나. 이렇게 소망하는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하나님 도대체 어디 있냐’는 비웃음을 당하시던 하나님이, 나의 기도 중에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알게 됩니다.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나의 진짜 사랑이 시작됩니다.

5.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른 달려가서 고쳐주시지 않고 일부러 지체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덜컥 나사로가 진짜로 죽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나사로가 죽게 된 것을 절호의 기회로 삼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베풀 기회가 아니라, 구원의 진리를 보여주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한 존재가 온전히 죽어야 하나님으로 인해 온전히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온전히 살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어설프게 죽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은 ‘잠든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죽은 것’이라고 생각을 고쳐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완전히 죽은 나사로에게 가십니다. 가 보니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 함께 나눈 기도 이야기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겹쳐 봅시다. 나사로는 왜 죽었습니까? 육신의 병 말구요. 나사로의 영혼말입니다. 나사로는 왜 죽었습니까? 누이 마르다의 말을 떠올려 봅시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곁에 안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 책임 전가하는 듯이 들립니다. 제대로 말하자면 ‘나사로가’ 주님과 함께 있지 않아서입니다.

나사로는 기도로 주님과 만났어야 합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고하고, 주님께서 내 모든 것을 어루만져 주시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안타까워하고 함께 격려하고, 하나님 나라의 꿈에 함께 부풀고, 인간적인 삶의 성취에 함께 뿌듯해 하고... 그렇게 모든 순간을 하나님과 나눴어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순간 속에 하나님을 붙들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았기에 그는 죽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거꾸로 나사로가 기도로 주님과 만났기에 비로소 그는 진짜로 죽었습니다. 올바른 기도를 통해, 제대로 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안에 있던 헛된 인간적인 것들의 꺼풀이 벗겨지고 제대로 된 죽음을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헛된 것들이 다 죽어버리자 비로소 그에게 주님이 오셔서 주님의 것으로만 온전히 채워주시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기도하지 못하면 안타깝게 죽고, 기도하면 기쁘게 죽습니다. 어떻게 죽을지 우리에게 기회가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 기도합시다. 참되게 기도합시다. 도마의 말처럼 ‘죽으러 갑시다’. 내가 죽는 기도의 시간으로 들어갑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삽시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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