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성령이 세운 교회, 돌봄 공동체(삼상 28:8-10, 20-25; 갈 4:8-16; 마 12:46-50)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6・25민족화해주일(6월19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6.16 23:53

1.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성령강림절은 성령의 역사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곧 교회의 시작과 성장, 그리고 이방 세계까지 세워지는 교회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성령강림절기 말씀을 통해 성령이 세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묻고 있습니다. 처음 성령강림주일 말씀을 통해 성령이 세운 교회는 ‘이타적인 공동체’라는 것을 살펴보았고, 지난주 말씀을 통해서는 ‘선교하는 공동체’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성령이 세운 교회는 ‘돌봄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의 가족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진정한 가족은 혈연이 아니라, 사명의 길에, 서로 돌보는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그 돌봄의 예를 우리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무당)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돌봄 공동체는 가족이라는 혈연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6・25민족화해주일이기도 한데, 분단된 우리 민족이 소통하고 협력하며 화해를 통해 돌봄 공동체를 구현할 때 이 땅에 그리스도가 평화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서신서 말씀은 화해와 평화가 아니라, 깨어진 공동체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이것은 돌봄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서신서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지방 교회들을 향해 책망하는 말씀인데, 복음의 내용과 본질을 상실하고 형식과 가식에 치우친 교회, 또한 돌봄을 상실한 교회는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46-50)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켜 가족이라고 합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들이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명의 길을 가는 이들이 바로 가족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서로 돌보는 공동체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교회는 이렇게 돌봄 공동체로 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돌봄의 모습은 어떨까요?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이 돌봄의 아주 기본적인 예를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2.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하니,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는지라.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삼상 28:8-10)

사울은 블레셋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큰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따라서 사울은 어떻게 해야 할지 여호와 하나님께 물었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급해진 사울은 이전에 다 쫓아냈던 신접한 여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엔돌에 있는 여인을 찾아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도록 요청합니다. 물론 엔돌의 신접한 여인과 같은 무속과 사이비 미신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통해 사무엘을 부르는 모습

후반부 말씀이죠?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사무엘의 혼으로부터, 자신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렇게 말씀이 이어집니다.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삼상 28:20).”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울의 고통을 보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은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가 심히 고통당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순종하였사오니, 그런즉 청하건대, 이제 당신도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내가 왕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하니”(삼상 28:21-22)

엔돌 신접한 여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먹지 않겠다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제는 신하들도 함께 권면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사울이 거절하여 이르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의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가져다가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사울 앞에와 그의 신하들 앞에 내놓으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삼상 28:23-25)

엔돌 신접한 여인은 살진 송아지를 잡고 무교병을 구워 사울과 신하들을 대접합니다. 아니 돌본것입니다. 사실,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멸절시킨 자입니다. 쉽게 말해 엔돌 신접한 여인의 밥줄을 끊어버린 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에게 엔돌 신접한 여인은 대접합니다. 돌봄을 베푼 것입니다. 이렇게 돌봄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세운 교회가 이러한 돌봄의 기능을 제대로 회복할 때, 코로나 상황 이후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

▲ 케어 켈럭티브, 『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

더 케어 켈럭티브에서 출판한 『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니케북스, 2022)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돌봄(care)’에 관한 매우 유익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더 케어 켈럭티브는 말 그대로 ‘돌봄 공동체’라는 뜻으로, 2017년 영국 런던에서 학술 모임으로 시작한 단체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돌봄이 마주한 다면적이고 심각한 위기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돌봄 문제와 돌봄 위기에 대해 공부하고 논의하던 각기 다른 전공 분야에서 연구하고 활동하는 저자들이 공동 집필한 책입니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 아니며, 착취되거나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서문인 ‘무관심이 지배하다’에서 돌봄 선언문, 곧 ‘보편적 돌봄(universal care)’에 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는 이 선언문에서 너무 오랫동안 무시되고 거부되었던 돌봄이라는 개념을 세상에 대한 진보적인 비전으로 제안한다. 이것은 ‘보편적 돌봄’이라는 비전인데, 이는 돌봄이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되고 중심에 놓이는 사회의 이상을 추구하고자 함이다. 보편적 돌봄이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모든 돌봄이 우리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친족에서부터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적 돌봄을 우선시하고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것, 그리고 이것이 상식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돌보는 정치, 만족스러운 삶,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

이후 2장에서 6장까지 돌보는 정치, 돌보는 친족, 돌보는 공동체, 돌보는 국가, 돌보는 경제, 세상에 대한 돌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장 제목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책은 돌봄이라는 용어를 사회복지학의 일부 영역에서 쓰이는 약자에 대한 케어(돌봄)의 의미를 넘어 사회를 변혁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소개합니다. 따라서 돌봄의 개념을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여 소개합니다.

첫째는 누군가를 신체적으로 돌보는 행위를 의미하는 ‘대인 돌봄(caring for)’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해온 돌봄 개념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케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누군가가 대신 케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누군가의 안위를 염려하며 마음을 쓰는 ‘정신적 돌봄(caring about)’이 있습니다. 잘 아는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등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이 건강하기를 바라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돌봄입니다. 물론 이 책은 이러한 정신적 돌봄을, 아는 사람들을 넘어 낯선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 또는 바람 등을 포괄하는 의미, 곧 생명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으로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정치적 돌봄(caring with)’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이념과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 돌보고 돌봄을 받는 것이 세상의 본질인데, 이러한 돌봄이 삶의 본질적 모습으로 인정되고 중시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사회질서, 사회체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물도서관(Library of Things)(1), 협동조합 형태의 대안경제나 연대경제, 주거비용을 낮추는 정책들, 화석연료의 감축과 녹지 공간 확대를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의 활동 등이 정치적 돌봄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책은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무관심의 기저에 있는 ‘상호연결성’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책의 부제가 ‘상호의존의 정치학’입니다. 아무튼 이 책은 다양한 삶의 영역들이 모두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관심의 일상화가 어떻게 세상과 시장, 국가, 공동체, 친족 간의 인간관계를 해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시 개인 간의 관계로부터 시작해 지구적 차원으로 규모를 넓혀가며 페미니즘, 퀴어, 반인종차별주의, 생태사회주의를 아우르는 대안을 모색하며 ‘보편적 돌봄’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6장 세상에 대한 돌봄에서 저자들은 서두에서 언급했던 ‘보편적 돌봄’에 관해 언급하여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보편적 돌봄은 직접적인 돌봄 노동뿐 아니라, 타인들과 지구의 번영에 대해 관여하고 염려하며 공동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형식을 되찾는 것과 자본주의 시장의 대안을 수용하고 돌봄 인프라의 시장화를 환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의 복지국가를 중앙정부와 지역 차원 모두에서 회복하고 근본적으로 심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국가적 차원에서 그린 뉴딜(Green New Deal)을 창조하는 것, 돌보는 국제기관들과 좀 더 느슨한 국경, 일상적 세계시민주의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상은 자국 국민을 돌보는 국가, 자국 국민만 돌보는 경제를 넘어, 초국가적·지구적 차원의 돌봄 연대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추천사를 쓴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특히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것에 실패했다!”라고 쓴 것은, 우리가 보편적 돌봄을 통해 함께 연대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이미 늦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따라서 이러한 돌봄의 기능을 상실한 공동체를 오늘 서신서 본문 말씀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갈라디아 지방 교회가 그렇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8-11)

▲ 갈라디아 지방

바울 사도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 복음을 받고 율법에서 해방된 생활을 하던 갈라디아 교회가 어느 순간, 유대주의자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다른 복음(갈 1:6)을 받아들인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인데, 유대주의자 그리스도인들은 초등학문인 율법을 다시 강조하고 안식일(날), 월삭(달), 3대절기(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와 무교절, 나팔절, 수전절(하누카, 성전 봉헌절), 부림절 등 절기를 지키며 안식년과 희년(해)에 강조점을 둡니다. 내용이 아닌 형식에 치우친 것입니다. 복음이 아니라, 율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와 관련하여, 아끼고 사랑하고 돌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데, 다시 율법과 형식의 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유대주의자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공격하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존경하는 것에 질투심을 느낀 유대주의자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약점을 찾아 공격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애착을 가지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음으로, 돌봄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이 잘 담겨있는 말씀이 본문에 이어집니다. 말씀을 볼까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갈 4:12-14)

그러나 동시에 바울의 분노도 엿볼 수 있습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갈 4:15-16)

이렇게 교회공동체가 돌봄의 기능을 상실하고 율법과 형식에 갇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은 교회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며 불의의 씨앗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참된 말을 합니다. 그 말이 비록 갈라디아 교인들과 원수가 될지라고 그리하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엔돌의 신접한 여인과 같이, 비록 원수인 사울이지만, 따스한 돌봄을 통해 사랑을 베풀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세우신 돌봄 공동체로 사명을 받은 교회, 아름다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나 다른 길도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처럼 형식과 교리, 겉모양과 가식이 가득 찬 공동체가 되는 길입니다. 이것을 다음 주 말씀은 ‘곡식’과 ‘가라지’로 잘 비유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지혜를 주시어 진리의 길, 올 바른 생명의 길을 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1) 책뿐 아니라, 여러 가지 물건, 특히 가끔 필요하지만 구입하기에는 부담이 되는 물건들을 대여해주는 공공 도서관을 말한다. 카펫 청소기, 각종 연장, 주방용품, 스포츠 장비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이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4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